MMORPG 게임에서 대규모 인원으로 진행하는 레이드엔 그런 기믹이 있다. 수많은 인원이 동시에 진입하여 전투를 시작하지 않으면 실패로 끝나는.
이를 위해 파티를 쪼개어 인원을 나누고 적절히 직업을 분배해야 별 탈 없이 레이드를 진행할 수 있었다.
또는 그런 기믹도 있었다.
어느 한쪽에 전력이 치우치거나 또는 한쪽이 심하게 딜이 모자랄 경우, 아무리 협동력을 발휘하여 동시에 시작했더라도 끝을 내지 못하도록 전멸을 야기하는 기믹이.
이런 기믹을 가진 레이드를 위해 진입 시간 조율이 필요했고 딜 컷이란 용어가 존재했다. 여기서 딜 컷은 연리지 상태의 아카시아 드라이어드들을 상대했을 때 사용했던 경험이 있다.
대규모 레이드는 누구 하나가 특출나다고 해서 쉽게 클리어할 수 없었다. 전략이 필요했고 무엇보다도 전략에 맞춰 다수가 함께 움직이는 협동력이 중요했다.
“망할….”
킹은 아무래도 대규모 레이드가 필요한 보스 몹일지도 모른다.
킹을 상대한 난 후 뒤늦게 이를 깨닫고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내 드라이어드들이 뛰어나더라도 치트급이 아닌 이상 해낼 수 없다는 걸 두 눈으로 확인했다.
“퇴로를 열게요!”
겨우 찾아낸 킹이었지만 등을 보인 채 도망가야 하는 현실이 암담했다.
처음 킹을 마주했을 때 예상과는 다른 모습에 조금은 놀랐었다. 킹이란 이름에 걸맞게 아주 거대하게 덩어리진 불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주한 킹의 모습은 거대하긴 했으나 생물이 아닌 구조물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4개의 우뚝 선 아치형 문이 사각형으로 배치된 형태로 그 중앙엔 동그란 구체의 불이 자리하고 있었다.
저렇게 제자리에 붙박인 채 있으니 접근하기 전까진 찾지 못했던 것도 이해가 갔지만….
마차나 기계처럼 사물의 형태를 띤 불은 만나 봤어도 건물에 가까운 구조물의 형태를 띤 불은 처음이었다. 생태계 최강을 모방하는 습성으로 도무지 무얼 모방했는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렉스는 어쩌면 킹을 직접 본 적이 없을지도 모른다. 저런 모습을 봤다면 내게 단순히 터주급 불이 있고 이를 킹이라 부른다고 간단히 설명할 순 없었을 테니까.
킹은 형태로나 행태로나 그나마 불을 생성하는 ‘공장’에 가깝다고 볼 수 있었다.
“전투라기보단 철거 작업에 가깝겠는데.”
킹을 막 목도한 난 그렇게 생각했다. 어쩌면 불을 생성하는 것 외에 움직임이 거의 보이지 않아 조금은 쉽게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끊임없이 새로운 불을 뱉어 내는 모습은 열린 지옥문에서 악마가 튀어나오는 것과 같았기에 저 불을 처치하는 게 얼마나 시급한 일인지 확실하게 와 닿았다.
“중앙에 있는 구체는 핵인가?”
“먼저 탐색전을 펼칠 건가요?”
전투에 나갔던 모든 가디언들이 보스전을 실행하기 위해 모였고, 그중 메스키트가 최전방에서 킹을 살피며 물었다. 적을 먼저 살피는 건 중요했기에 그렇게 하자고 말했지만, 살펴보는 것만으론 많은 정보를 얻을 순 없었다.
4개의 아치형 문에서 크기가 일정한 불이 계속 생산된다는 것, 그리고 생산된 불은 필드로 나가 잠시 후 모습을 바꾼다는 게 가장 단적인 조사 결과였다.
더 나아가 4개의 문에선 각각 특성별로 나뉜 불이 생성된다는 점도 알 수 있었다. 공격형, 방어형, 지원형, 회복형 불을 생성하는 문이 따로 존재한다는 뜻이었다.
다만 중앙의 구체가 하는 역할은 쉽게 알 수 없었고, 중앙에 있으니 핵이 아닐까 의심은 되었다.
“하나씩 무너뜨려 보자. 가장 시급한 건 회복형을 생산해 내는 문부터.”
남쪽을 향하며 위치한 문은 회복형 불인 비숍을 생산해 내고 있었고, 전투를 꽤나 까다롭게 만드는 특성이었기에 최우선 타깃으로 정했다.
우린 차례차례 문을 하나씩 파괴하면 킹도 해치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중앙에 있는 구체를 파괴하는 게 가장 중요해 보였지만, 사방으로 보호를 받고 있기에 곧바로 공격할 순 없었다.
그런데 그런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문 하나를 공격했을 때, 일시에 모든 문이 불을 생산하는 걸 중단했고 이상 현상을 보였다. 아치형 문이 일그러지더니 마치 주물러진 반죽처럼 뒤죽박죽 뭉치다가 새로운 형태로 변모했다.
더 이상 문의 형태가 아닌, 거대한 인간 형태로 변한 것이다. 그것들은 드라이어드 특성에 따른 보편적인 무기도 함께 들고 있었는데 방패를 든 탱커, 검을 든 딜러, 오브를 든 서포터, 스태프를 든 힐러를 형상화한 게 분명해 보였다.
대놓고 드라이어드의 일반적인 파티 한 개를 나타내는 모습에 기가 막혔다. 불이 드라이어드의 특성을 그대로 따라 하는 것도 어이가 없었지만 이젠 모습마저 이를 따라 하니 솔직히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자신들이… 정말 드라이어드라도 된 것처럼 구는 게 아닌가.
거인의 형태로 변했으나 4개의 불은 무기를 든 채 동상처럼 제자리에서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움직임이 없는 게 수상했지만, 어쨌든 드라이어드들은 총력을 다해 일점사(특정 적 하나, 혹은 특정 부위 하나만을 집중적으로 공격하는 행위)로 회복형 불을 노렸다.
그때였다.
스태프를 든 회복형 불을 제외한 나머지 세 개의 불이 마치 하늘에 기도를 올리는 것처럼 두 손으로 각자의 무기를 쥐고 들어 올렸다. 분명 움직임을 보였으나 뚜렷하게 공격을 하려는 징조처럼은 보이지 않았기에 의아할 무렵….
펑! 퍼펑! 펑!
회복형 불을 향해 공격을 시도했던 드라이어드들이 일제히 커다란 폭발과 함께 떨어져 나갔다.
“다들 괜찮아?”
갑작스러운 상황에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기분이었다. 무려 가디언들이었다. 보통 드라이어드도 아닌 그중 대표라 일컬을 수 있는 가디언들 말이다. 그런데 그들의 공격이 막힌 데다 반격을 받을 줄이야.
“괜찮아요. 걱정 말아요. 그다지 센 공격은 아니었어요.”
커다란 폭발음과 달리 의외로 다들 멀쩡해 보였다. 불씨와 재를 뒤집어쓰긴 했지만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공격이 먹히지 않았어요.”
메스키트는 침착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도중에 가로막힌 기분이었지. 기이하게 적의 존재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어.”
실새삼은 완전히 타 버린 줄기들을 떨쳐 내며 눈살을 찌푸렸다.
“아, 손이 얼얼해. 꽁꽁 언 바위를 맨손으로 내려친 기분인데? 뭔가 이상해.”
“전 검이 그대로 아무것도 베지 못하고 통과한 느낌이었어요.”
모두들 서 있던 자리에서 폭발로 인해 멀찍이 물러나게 되었다. 각기 느낀 점은 달랐으나 공통적으로 공격이 전혀 통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특이점을 발견했다. 맹그로브는 폭발 피해를 받은 것처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른 드라이어드들처럼 불씨와 재를 뒤집어쓴 것도, 본래의 자리에서 밀려나지도 않았다.
“넌 왜 멀쩡해?”
“그건 내가 아주 특별하고 대단하기 때문일지도 모르지!”
“대단해! 대단해!”
“맹그로브 특별해!”
미니미들이 꺄르르 웃음을 터뜨리며 우쭐댔다.
“맹그로브는 공격력이 없잖아? 그래서 아무런 반향도 없었던 건가?”
“무슨 그런 섭섭한 소리를! 비록 공격력은 없어도 나 역시 팀을 위해 힘을 사용했지. 이를테면 다치는 걸 미리 방지하기 위해 회복 기술을 사용한다든가….”
“넌 지금 작은 맹그로브들이 전부 존재하고 있으니 회복력이 0인 거나 다름없잖아?”
“다들 총력전을 기울인다는데 손을 놓고 있을 순 없지 않은가? 뭐라도 해야지.”
쟨 진짜 뭐 하는 드라이어드지? 뭔가 하려는 시도를 했다는 점에서 기특하다고 봐야 하나?
“아니, 저 말은 좀 더 주의 깊게 살필 필요가 있다. 넌 네 기술이 전혀 통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진 않은 게냐?”
실새삼이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글쎄. 난 너희들이 느꼈다는 기이한 감각을 전혀 느끼지 못했어. 내 기술은 제대로 사용됐거든. 역시 내가 뛰어나기 때문일까?”
“뛰어나! 완전 뛰어나!”
이 말을 찬찬히 듣고 있던 메스키트가 곧바로 엘더에게 눈짓을 했고, 그는 불쑥 스태프를 내밀고 회복형 불을 향해 기술을 시전했다.
공격력이 전혀 없는 맹그로브와 달리 엘더는 회복형임에도 공격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공격형 드라이어드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수준이었지만, 그래도 제법 딜을 낼 수 있었다.
엘더의 스태프가 새하얀 빛을 내며 반짝거렸고 뒤이어 새하얀 꽃을 매단 가지가 땅에서 산발적으로 쏟아져 나와 회복형 불을 공격했다.
앞서 겪었던 상황에 따르면 엘더 역시 공격 직후 갑작스러운 폭발에 의해 나가떨어졌어야 했지만… 폭발은 일어나지 않았고 그는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았다.
“역시 예상대로군.”
“그래요. 예상대로예요.”
이를 지켜보고 있던 실새삼과 메스키트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왜 뭔데? 뭐가 문제인데? 왜 쟤는 공격이 되는 거지?”
포인세티아가 제자리에서 펄쩍 뛰며 분을 내보였다.
“쯧쯧, 멍청한 녀석. 공격하려던 저 불을 자세히 봐라.”
실새삼은 혀를 차며 한심하단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 나 또한 실새삼의 말을 따라 회복형 불을 살폈다.
“저건….”
회복형 불의 주위에 도깨비불과 같은 덩어리 3개가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공격에 성공한 드라이어드의 특성을 떠올려 봐라. 우리와 뭐가 다른지.”
“저 물고기처럼 생긴 드라이어드는 특성이 뭔데?”
포인세티아가 손가락으로 맹그로브를 가리키며 물었다. 맹그로브를 소개할 시간도 없이 퀸을 뒤쫓았으니 그에 대해 모르는 것도 이해가 됐다.
“물고기라니!”
더구나 이름도 몰랐던 포인세티아는 인어 형태의 맹그로브를 물고기처럼 생겼다고 표현했다. 이에 맹그로브는 큰 소리로 맞받아쳤는데 화가 나 발끈한 게 아닌가 싶었지만….
“칭찬 고맙다! 이왕이면 바다에 사는 물고기를 닮았다고 해 주지 않겠나?”
“물고기! 물고기 좋아!”
“고래도 좋아!”
그는 굉장히 기뻐했다.
“스노우 필드의 기운을 가졌으나 생소한 얼굴을 가진 이여. 나는 방어형과 회복형 특성을 동시에 가진 나무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