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을 담은 바다여!”
“규율!”
“바다의 힘이 그대와 함께한다!”
“야!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니까! 규율!”
맹그로브는 지칠 줄 몰랐다. 아니 지치지 않는 점은 드라이어드로서 좋은 소양이었지만, 이건 다른 의미였다. 끊임없이 전투 상황을 만들어 낸다.
“공격력도 없는 게 자꾸 일만 벌이면 어떡해?”
그가 공격력이 없기에 이런 상황은 더욱 주변을 지치게 만들었다. 전투가 끝나기도 전에 어그로를 끌어 새로운 불을 데려오니… 지금이 레벨업을 위한 경험치 사냥이었다면 완벽했겠지만, 생명이 촌각을 다투는 위험한 전쟁터였기에 좀 더 신중할 필요가 있었다.
“네가 가장 먼저 해야 할 건 필드의 규율을 떠올려 다른 규율 협약자들에게 영혼의 부름을 하는 일이라니까? 그걸 잊지 말래도.”
“친애하는 나의 드루이드여. 물론 잊지 않았다. 나는 끝없는 전투를 통해 내 안의 깊은 해구 속에 가라앉은 규율을 떠올리려 하고 있다네!”
“너무 깊어!”
“잘 안 떠올라!”
“으으….”
정말 많은 전투를 겪다 보면 그가 깨닫게 되는 걸까?
내가 버프 구매를 하다시피 얻어 낸 세계수 가지의 축복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알 수 없었다. 우리에겐 축복으로도 만들어 내지 못한 변환점이 필요했다.
킹은 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외부 전투에서도, 내부 전투에서도 발견하지 못했다면 나와 정반대편에 위치하고 있는 걸까?
“아무래도 안 되겠어. 다른 가디언을 보고 배우는 건 어때?”
“오오, 나의 옛 친우를 말인가?”
그가 규율을 떠올릴 수 있도록 도우려면 누가 좋을까?
정석적인 멘토와 다름없는 메스키트? 그의 밝은 성격과 가장 비슷한 포인세티아? 스스로 규율을 학습한 데이지? 아니면 과거 동료였던 실새삼?
“실새삼!”
난 그가 과거 규율을 떠올리려 한다는 점에서 어쩌면 옛 동료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 실새삼을 골랐다.
평소라면 부르자마자 내게 왔을 실새삼이 어쩐지 바로 나타나지 않았다.
“아….”
생각해 보면 맹그로브의 기운을 느꼈다면 내가 부르기도 전에 먼저 실새삼이 왔어야 하지 않나 싶었다. 그가 과거 기억을 많이 잊었다 하더라도 과거로부터 이어지는 익숙한 기운은 잘 잡아냈기에 인사라도 할 겸….
꼰대 같은 그라면 포인세티아에게 했듯이 텃세도 부릴 테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먼저 보러 오지 않았다는 건…. 어쩌면 과거 둘은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특히나 실새삼과 맹그로브의 성격은 완전 상극이었으니 실새삼 쪽이 일방적으로 그를 싫어했을 수도 있고.
난 이마를 짚으며 재차 그를 불렀다.
“실새삼… 어디 잘못된 건 아니지? 걱정되는데.”
걱정한다는 말에 그는 곧바로 내 곁으로 돌아왔다.
“오오! 나의 그리운 옛 친우여!”
“친우! 친우!”
맹그로브가 우아한 걸음으로 아주 느릿하게 다가오는 실새삼을 보며 두 팔을 벌리고 큰 소리로 환영했다.
“왜….”
그런 그를 보며 실새삼은 대뜸 물었다.
“왜 개화를 해도 하필 저따위 녀석을 한 거냐? 차라리 그 녀석이었으면 몇 배는 점잖았을 것을.”
“맹그로브를 기억해?”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그가 무척이나 짜증 나고 싫은 놈이란 기억은 남아 있어.”
예상대로 실새삼은 맹그로브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기색이 역력했다. 과연 그가 좋아하는, 친하게 지내는 드라이어드가 있을까 의문이 들었다.
“정말 간만이지 않는가?”
마치 포옹이라도 할 듯 해일처럼 헤엄쳐왔다. 그런 그를 실새삼은 질색하는 표정으로 바라보며 슬쩍 뒤로 물러났다.
“나는 과거가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새로운 주인과 함께 다시 태어나며 전부 버렸지.”
그 말에 맹그로브는 멈칫했고 이내 슬픈 표정을 지었다.
“우리가 함께했던 나날들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단 말인가? 끝이 좋지 않았어도 즐겁고 행복했던 순간들이 많았는데.”
“글쎄. 그런 걸 기억해 봤자 무슨 도움이 되지?”
“함께 세상을 구하는 여정을 떠났지 않는가? 수많은 생명들을 돕고 어려운 일도 다 같이 힘을 합쳐 이겨 냈던 소중한 기억들을 말이다.”
맹그로브의 말은 얼핏 처절하기도 했다. 그는 진심으로 과거를 잊은 실새삼을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카수스는 어떻게 보면 결말을 제외하곤 모든 모험가들이 꿈꾸는 대단한 업적을 이뤘다고 볼 수 있었다. 분명 굉장한 모험을 했겠지. 그의 드라이어드들과 함께 수많은 추억들을 만들어 냈을 것이다.
끝내 그의 드라이어드들이 그에게 영생을 주어 영원히 곁에 있고 싶어 할 만큼 말이다.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결국 그렇게 걸었던 길 끝에 무엇이 있었느냐가 중요하지. 아무리 좋은 면만 기억하더라도 그 일들이 모여 과거의 우린 절대 해선 안 될 일을 저질렀다. 그렇다는 건 우리가 겪었던 모든 과거가 잘못됐다는 게 아닌가?”
“그렇지 않다! 분명….”
“이름 모를 나무여. 우린 세계에 멸망을 불러왔다. 그건 지워도 지우려 해서도 안 되는 일이다. 우리가 어떤 일을 겪었든 그 모든 일들이 모여 결국 악행을 벌이는 데 일조했으니 미화해서도 안 될 일이다.”
실새삼은 단호했다. 그는 과거에 전혀 미련이 없음을 밝혔다. 얼마나 찬란했고 아름다웠고 즐거운 추억들로 점철되어 있든 마무리가 좋지 않았기에 전부 부질없는 일이라 판단한 것이다.
“그래, 그게 너였지.”
맹그로브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아직까지 옛 추억을 끌어안고 살 셈이라면 집어치우도록. 제희에게 온 이상 넌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 카수스와의 추억이 네 뿌리를 잡는 일이 생긴다면 그땐 내가 널 가만두지 않겠다.”
맹그로브는 다양한 감정이 담긴 눈으로 나와 실새삼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인간이여, 말해 보거라. 유한한 삶을 살아가는 생명이 과거를 잊는 게 쉬운 일인가? 추억으로 만들어지는 존재가 아니더냐? 비록 끝이 좋진 않았으나 그 과정도 모두 버려야 하는가?”
“과거는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한 좋은 발판이지. 내게도 과거는 있어.”
난 내 아바타 제이를 떠올렸다. 아직 제이의 끝을 보진 않았기에 좋지 않은 과거라 볼 수 없었지만 제이가 걷는 길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는 잘 알았다.
세계수의 힘을 갈구하여 끝내 나를 버리게 되는 길, 어쩌면 카수스처럼 영생을 얻고 싶어 발악하게 될지도 모르는 길, 마거리트가 보았다는 배드 엔딩으로 향하는 길.
그래서 제이가 걸으려고 했던 길을 걷지 않으려 경계하며 노력 중이었다.
“카수스의 과거를 기억하고 있다면, 내가 그와 같은 전철을 밟지 않도록 네가 막으면 되잖아?”
“널 그따위 것과 동일시하지 말거라.”
실새삼이 무척이나 불쾌하단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추억을 원동력 삼아 지내는 사람들도 있고. 다시 행복했던 세계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거야. 하지만 실새삼의 말처럼 카수스와의 과거가 널 옭아매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어. 넌 세계를 위해 기꺼이 전 주인을 버리고 내게 왔다고 말하지만 조금 불안하긴 해. 드라이어드에게 드루이드가 어떤 존재인지 아주 잘 아니까. 어떻게 명확하게 인연을 끊어 낼 수 있을까….”
지금은 기억을 잊었다고 하나 지금과 같은 행동을 보이던 실새삼도 얼마나 카수스를 그리워했는지 잘 기억하고 있다. 은둔자의 정원에서의 그는 정말… 처절했지.
차라리 기억을 잊는 방법으로 카수스를 끊어 낸 게 그에겐 잘된 일일 수도 있었다.
아름다운 추억이 있다면 그리워하게 된다. 맹그로브가 카수스를 악이라 규정했어도 그를 그리워하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었다. 지금도 이렇게 소중한 추억이라 말하지 않는가?
난 카수스와 절대 화합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우리는 둘 중 하나가 사라지기 전까진 끊임없이 서로를 적대해야 했다. 내 숙적이란 말이다.
그런데 맹그로브가 그 숙적과의 인연으로 망설이는 순간이 온다면….
“내가 널 불안하게 했군. 사과하마.”
“앞으로 네가 날 안심시키면 돼. 일단 카수스가 아닌 내게 올 결심을 한 것만 해도 큰일을 해낸 거야.”
“실새삼의 말이 맞다. 그래, 난 과거를 버리고 완전히 새로 태어날 필요가 있겠군. 그걸 더 이상 소중한 추억이라 미화하지 않겠다. 내 새로운 주인이 불안해할 일이라면 조금도 하지 않겠다!”
얼핏 본 실새삼의 눈빛은 ‘과연 그게 가능할까?’라고 말하고 있었다.
“이제부터 날 새롭게 태어난 맹그로브라고 불러라. 화려하게 다시 태어난 맹그로브도 괜찮군.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새파란 바다의 드라이어드도 나쁘지 않아.”
“나쁘지 않아! 나쁘지 않아!”
“새롭게 태어났어! 새로운 맹그로브!”
“너… 제대로 이해한 건 맞지?”
“원래 저런 녀석이었을 거다. 피곤하게 됐군.”
“나는 다시 태어난 위대한 맹그로브!”
“우와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걸까…. 어쩐지 두통이 일었다.
“그건 그렇고 날 부른 이유가 무엇이더냐? 굳이 저 녀석과의 해후를 위해 부른 건 아닐 테고.”
실새삼이 당장이라도 자리를 뜨고 싶다는 얼굴로 물었다.
“맹그로브가 영혼의 부름을 못 하길래 다른 가디언이 조언해 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그는 다른 드라이어드들과 다르게 완전 옛 시대를 기억하는 가디언이잖아? 오랫동안 잊고 있던 과거의 규율을 떠올려야 한다는 점에서 옛 동료의 얼굴을 보면 혹시 떠오르지 않을까 싶어서….”
그다지 옳은 선택은 아니었나 싶기도 하고. 차라리 멘토처럼 가르쳐 줄 수 있는 메스키트가 나았을까? 하지만 나이와 경력으로 따지면… 놀랍게도 메스키트가 한참 가디언 후배라….
“딱 봐도 단순한 녀석이니…. 누군가 협약자들을 부르는 모습을 보면 곧바로 떠올릴 거다.”
맹그로브를 이름 모를 나무라고 부를 정도로 그를 잊어버린 실새삼이었지만 대하는 태도는 오래 만난 지인을 대하는 것처럼 익숙했다.
“그럼 부탁할게.”
시범을 보이면 된다는 거지?
내 부탁에 실새삼은 손짓으로 맹그로브를 집중시켰다.
“네가 가치 없는 추억보다 가장 명확히 기억했어야 하는 걸 알려 주마. 가디언 주제에 드루이드와의 추억에 얽매인 볼품없는 꼴 하곤….”
난 ‘너도 그랬잖아.’라는 말을 간신히 참은 채 실새삼을 바라봤다.
“오오, 잘 부탁한다!”
“부탁해! 부탁해!”
실새삼은 맹그로브의 성원을 받으며 다시금 전장의 바이오 필드 드라이어드들을 향해 영혼의 부름을 시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