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율을 입에 담은 지 너무 오래되었어. 기억이 나질 않아.”
자신감이 넘쳤던 모습은 어디로 가고 시무룩해진 얼굴이 되었다.
“날 원망하고 있으면 어떡하지? 내 선택에 의해 바다를 망쳤잖아.”
“쟤는 갑자기 왜 땅 파고 들어가는 거야?”
지켜보고 있던 엘더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가디언들이 반드시 겪는 고충 같은 건가 보지. 다른 가디언들이 영혼의 부름을 할 때 함께 있었다면 감을 잡는 게 쉬웠을 텐데…. 당장 힘들 것 같다면 전투를 통해 뭔가 깨달음을 얻는 건 어때?”
맹그로브가 규율을 기억할 때까지 마냥 기다려 줄 순 없는 노릇이었다. 지금도 전장에선 수많은 자들이 우리의 도움을 기다리고 있었다.
“전투라… 정말 간만이군. 좋다! 이 몸이 계속 좋지 못한 모습만 보일 필욘 없지. 자! 내 도움이 필요한 곳이 어디냐! 내가 시원하게 쓸어 버리마!”
“가자! 가자!”
“다 쓸어 버려!”
넌 공격력이 없잖아? 라는 말을 목 끝까지 차올랐다가 간신히 삼켰다.
“회복력이 빠른 건 좋네. 아주 좋아. 그런데 너와의 전투는 처음이라 그런데, 너의 전투 스타일에 대해 알려 줄 수 있어? 네 정보를 확인하긴 했지만 이전에 만났던 드라이어드와는 양상이 달라서 조금 이해하기 힘들어.”
“내가 좀 특별한 드라이어드긴 하지.”
“특별해! 맹그로브 특별해!”
칭찬에 대한 반응은 엘더보다도 뛰어났다.
“맹그로브는 방어형과 회복형 특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어. 팀원 수는 갈수록 늘어나는데 민들레 아이들은 어리고 바곳은 특화 힐러라 엘더가 고생해야만 했는데 이제 좀 수월할 거야.”
정통 힐러가 엘더뿐이라 그가 무너지면 팀의 균형도 크게 흔들려 어떻게 보면 위험이 많은 포메이션이긴 했다. 엘더가 너무 많은 짐을 지는 구조였지.
언제든 대비할 수 있는 서브 힐러가 필요했는데 민들레 아이들이 다 자랐어도 어떻게 보면 바곳과 비슷한 특화 힐러에 회복력도 좋다고 보긴 어려워 엘더만큼의 포텐셜을 기대하긴 어려웠다.
물론 회복형 하나 없는 시들링과 같은 팀 구성과 비교해 보면 분에 겨운 소리였지만, 그만큼 엘더급의 좋은 힐러를 얻기 어려움을 뜻했다.
그런데 이제 회복형 특성을 갖는 맹그로브가 합류하게 되었다.
“그다지 고생하지 않았어….”
엘더는 자존심이 상한다는 얼굴로 말했다. 최악의 상황이 와도 아무 말 없이 자신의 능력을 한계까지 몰아붙여 사용하는 그를 알기에, 그가 좀 더 편해질 수 있다면 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내 능력에 대해 어떻게 설명해 줘야 하려나….”
“특히 방어형과 회복형을 동시에 갖는 부분, 그게 턴 오버 형태가 아니란 점이 의문이야. 어떻게 그게 가능해?”
“흠흠, 특이하긴 하지. 좋다. 쉽게 설명해 보마. 난 특정 조건에서 특성이 변화한다.”
맹그로브는 삼지창을 들고 있지 않은 손으로 자신의 주위를 돌아다니는 미니미들을 가리켰다.
“이렇게 나의 권속들이 모두 존재할 때, 나의 방어력은 최상의 상태이다. 반면 회복력은 0에 가깝지.”
지금의 맹그로브는 완전한 방어형의 상태.
“간단한 설명은 이쯤하고 직접 보여 주며 설명하마! 자, 당장 도움이 필요한 곳으로 가 볼까!”
맹그로브가 허공에서 크게 공중제비를 돌고 삼지창을 들어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곳엔 테라리움 외벽을 공격 중인 폰 세 마리가 있었다.
내가 테라리움으로 들어가기 위해 내부까지 돌파한 탓에 전투 장소가 외부에서 내부로 바뀌었다. 외부는 드루이드 구출 위주로 진행된 반면, 내부는 직접적으로 테라리움에 위해를 가하는 불을 막는 전투가 주를 이루었다.
“일어나라, 파도여!”
맹그로브는 불을 향해 크게 기합을 내질렀다. 그러자 서핑을 타는 듯한 그의 몸짓을 따라 거대한 파도가 일어나 불들을 덮쳤다. 하지만 고함과 웅장한 이펙트와 달리, 기술에 적중당한 불은 조금의 타격도 입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하다못해 회복형인 엘더의 기술을 맞아도 변화가 생기는 불인데, 대미지를 조금도 받지 않았다는 듯이 멀쩡했다.
“공격력이 없다더니…!”
정말로 적을 상대로 피해 계수를 1도 입히지 못하는 평화주의자 드라이어드였던 것이다.
이런 걸 어디서 본 적이 있는 것 같기도…. 그러니까 모 게임의 물고기를 닮은 캐릭터가 제자리에서 팔짝팔짝 뛰어오르기만 한다든가….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물론 정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건 아니었다. 파도를 뒤집어쓴 불들은 마치 벌통을 쑤신 벌처럼 일제히 맹그로브를 향해 달려들었다. 어그로를 끄는 효과가 가히 대단했던 것이다.
불의 공격을 받기 직전, 맹그로브는 거대하고 투명한 방울에 감싸였다. 불의 공격은 전부 투명한 막에 막혀 그에게 어떠한 대미지도 주지 못했다.
그가 방패를 들고 있지 않음에도 어째서 방어형이라 불리는지 알 수 있는 광경이었다.
“오호….”
같은 방어형인 가막살나무가 그 광경을 꽤나 흥미롭다는 얼굴로 지켜봤다.
“파도여, 멈추지 말거라!”
맹그로브는 이에 그치지 않고 또다시 파도를 일으켜 시야에 보이는 모든 불의 어그로를 끌었다. 어떻게 보면 무모하다고 보일 수도 있는 모습이었다. 어그로를 잔뜩 끄는 건 좋으나 감당할 수 없다면 오히려 독이 되기 때문이다.
그 역시 메스키트와 같은 가디언이었기에 겨우 이 정도로 무너질 거라 생각하진 않지만, 그녀는 공격도 가능한 탱커였기에 적의 수를 줄여 부담을 낮추는 게 가능했다. 하지만 맹그로브는 얻어맞는 것만 가능한 막무가내 탱커였다.
수많은 불의 공격이 집중되자 맹그로브의 방어막에도 이상이 생겼다. 진동이 거세지고 여기저기 깨지기 시작했고, 마침내 공격을 이기지 못한 막이 완전히 깨져 사라져 버렸다.
그러자 다시금 새로운 막이 생겨 그를 지켰다.
“이건….”
그의 기술을 보자 바로 생각나는 드라이어드가 있었다. 바로 이리스의 유니크 등급 방어형 드라이어드인 유칼립투스 디글럽타였다.
그 드라이어드는 7번의 공격을 무효화시킬 수 있는 방어 기술을 가지고 있었고, 내구력을 웃도는 공격을 받을 때마다 방패의 껍질이 벗겨지는 방식이었다. 헌 껍질을 버리고 새 껍질로 다시금 풀 내구도의 방패로 맞서는 거다.
방어막이 깨지자 곧바로 다른 방어막이 대체하는 방식이 이를 닮았고….
“미니미 하나가 사라졌어.”
막이 하나 사라지자 맹그로브의 주변을 둥둥 떠다니던 일곱 미니미 중 하나도 사라졌다. 아니 사라졌다기보단 모습이 변했다.
그를 꼭 닮은 아기 인어 대신 그 자리에 오뚝이를 닮은 열매가 자리하고 있었다. 설마 죽은 건가 싶었는데… 그건 아니었다.
열매는 느리지만 천천히 그 끝에서 새싹 눈을 내보내고 있었다. 싹을 틔우고 있었던 것이다.
“내 권속이 하나 사라지면 그만큼 방어력은 줄지만 회복력이 상승하게 되지.”
그제야 맹그로브가 가진 기술 메커니즘에 대해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어째서 그가 방어형과 회복형 특성을 동시에 갖는 드라이어드인지 제대로 알게 되었다.
그는 이쪽을 향해 삼지창을 뻗었다.
“넘쳐나는 생명의 축복을!”
새파란 이파리들로 이루어진 실바람이 삼지창을 휘감으며 나타나 우릴 향해 쏘아졌다. 갑작스러운 스킬에 눈을 질끈 감았지만 어떠한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숲속, 습기를 잔뜩 머금고 퇴비가 되어가는 풀과 낙엽이 가득한 땅에 코를 묻은 것처럼 진한 향에 바다의 짠내가 섞인 기묘한 향이 퍼져 나가며 속을 시원하게 만들었다. 이건 그의 회복 스킬이었다.
그동안 출입구를 지키는 전투를 하느라 손상되어 있던 드라이어드들의 바크가 아주 느리게나마 회복되는 게 보였다.
“오호….”
미니미의 수가 줄어들면 회복력도 강해질 터.
마침 맹그로브를 지키던 또 하나의 방어막이 깨져 사라졌다. 이전보다 빠른 속도였다. 막이 깨짐과 동시에 새로운 방어막이 생겼고 미니미 하나가 열매가 되어 버렸다.
“이거… 완전 디글럽타의 상위 호환 드라이어드잖아…?”
슬프게도 게임엔 종종 비슷한 기술을 사용해도 등급에 따라 더 높은 효율을 가지는, 일명 상위 호환이라 불리는 캐릭터가 존재하곤 했다. 맹그로브의 미니미는 일곱이니 디글럽타처럼 일곱 번의 방어 기회가 존재하지만 회복 기술을 탑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가장 먼저 열매로 변했던 미니미가 새싹을 틔운 후 길쭉길쭉하게 자라나는 모습이 보였다.
맹그로브의 정보 중엔 식물 중 유일한 태생종이란 설명이 있었다. 새끼를 어미의 체내에서 충분히 성장시킨 후 낳는 방식인데 포유류의 특성이기도 했다. 그런데 식물이 태생종이라 하면…
맹그로브가 미니미들을 직접 길러 곧바로 내보낼 수 있다는 걸 뜻했다. 즉, 열매로 변한 미니미는 머지않아 다시 아기 인어의 모습으로 돌아올 테고 그의 방어력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 돌아올 것이란 뜻이었다.
만약 공격 속도를 제대로 조절한다면 일곱의 방어막이 전부 깨지기 전에 다시금 미니미가 회복되어 사실상 무한에 가까운 방어를 할 수 있는 거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결국 디글럽타의 상위 호환이라 볼 수밖에 없지 않는가….
그 드라이어드도 대단한 유니크 등급인데 결국 태생 스페셜 등급엔 어쩔 수 없다는 건가….
난 맹그로브의 세 번째 방어막이 깨지는 걸 지켜보며 정신을 번쩍 차렸다.
“저거 저대로 내버려 두면 안 돼! 쟨 공격력이 하나도 없어!”
그가 닥치는 대로 어그로를 끈 탓에 방어막이 소진되는 속도가 너무 빨랐다. 갈수록 방어력은 낮아질 테니 금방 다음 방어막이 깨질 터였다.
“내게 풍요로운 생명의 힘을!”
그의 외침에 따라 열매로 변한 미니미들이 녹빛 아우라에 감싸이는 게 보였다. 성장 속도를 높였나 본데 그래도 무한정 버티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쟤는 왜 기술을 쓸 때마다 시끄럽게 구는 거야?”
엘더가 귀찮다는 듯이 스태프를 꺼내며 눈살을 찌푸렸다.
확실히… 맹그로브는 스킬을 사용할 때마다 입을 열었다. 마치 주문을 외우는 것처럼 말이다. 진짜 유별난 드라이어드였다.
우려하는 상황이 일어나지 않도록 그의 능력을 지켜보고 있던 드라이어드들이 함께 전투에 뛰어들었다.
가막살나무가 어그로를 나눠 받고 바곳이 불에 디버프를 걸며 제대로 된 전투를 벌였다.
확실히 전력이 하나 늘어나니 전투가 무척이나 안정적으로 변한 걸 느낄 수 있었다.
“하하! 대단하구나, 나의 영혼의 동료들이여!”
“규율을 기억해 내는 게 먼저라는 걸 잊지 마!”
곧바로 또 한 무리의 불의 어그로를 끌려는 조짐이 보여 다급히 그를 말려야 했다. 은근히 불도저 같은 기질도 가지고 있어 난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