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82화 (582/604)

내게 꼭 필요한 드라이어드가 올 거란 말, 목화 드라이어드는 정말 내게 엄청난 축복을 선사했다.

“그런데 네가 하는 말을 들어보니 과거를 기억하는 거 같은데…. 얼마나 기억해?”

맹그로브는 어딜 봐도 새로 태어난 드라이어드는 아니었다. 리버 필드 가디언을 기억하는 거나, 카수스를 기억하고 있음을 은연 중에 말에 내포하고 있으니까.

“모두 기억하지. 난 모든 게 뛰어나서 기억력도 뛰어나거든.”

“뛰어나! 뛰어나!”

“엄청 대단해!”

맹그로브가 말을 하면 일곱이나 되는 미니미들도 한마디씩 거들기 때문에 금방 시끄러워진다.

“그런데도 전 주인에게 가지 않아도 괜찮아? 보통은….”

기억을 가진 드라이어드들이 얼마나 이전 주인을 그리워하는지 알기 때문에 과거를 모두 기억한다는 맹그로브가 카수스를 버리고 내게 온 게 쉽사리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난 세계를 사랑하고 평화를 사랑하기 때문이지.”

그의 목소리에서 방정맞음이 빠지고 좀 더 진중해졌다.

“그는 세계를 망칠 인물이야. 아니 이미 한 번 망쳤지.”

과거를 회상하는 듯한 말투였다.

“난 아직도 기억해. 내가 사랑하는 바다의 절반이 지옥으로 변했어. 여린 생물들은 모두 죽었지. 더 이상 아이들도 태어나지 않았어. 바다는 오염되고 해안선은 무너졌어. 내가 한 일을 깨달았을 땐 이미 늦은 후였지.”

맹그로브는 카수스가 멸망을 불러왔을 때를 이야기했다. 은둔자의 정원에서나 겨우 확인할 수 있었던 멸망의 진실이 조금이나마 드러나고 있었다.

“그런 일이 되풀이되어선 절대 안 돼.”

“카수스가 같은 일을 다시 반복할 거라 확신하는 거야?”

“그가 되살아났잖아? 미련이 가득한 생이지. 다시 살아나기 위해 기꺼이 스노우 필드의 저주를 감내할 정도로.”

그가 전 주인인 카수스를 얼마나 적대하고 있는지 잘 알 수 있었다. 대부분 주인에게 집착과 같은 애정을 퍼붓는 드라이어드만 만나왔기 때문인지 그런 그의 태도는 어딘가 생소하기도 했다.

세계를 위해 주인을 버릴 수 있는 드라이어드. 어쩌면 가디언의 덕목에 가장 어울리는 드라이어드가 아닌가 싶었다.

물론 그가 과거 멸망을 불러왔던 10그루의 가디언 중 하나란 사실은 변하지 않지만, 이제 잘못을 뉘우친 게 분명해 보이니….

“지금 바다의 상태는 어떻지? 내 모체는 해안선을 늘리고 생물들이 번성할 수 있도록 돕는다. 그동안 내가 잠들어 있었으니 좋은 상태는 아닐 거라 생각되지만….”

그에게 거의 절반에 가까운 바다가 말라 버렸다고 말해도 될지 고민이 됐다.

“너희가 활동하던 시대로부터 지금 시대가 시간이 얼마나 지난 후인지는 알고 있어? 불의 침범은 더욱더 가속화됐고… 지금은….”

난 어렵사리 90번대 이후의 바다가 어떻게 됐는지 알려 주었다. 그러자 시종일관 유쾌한 웃음을 짓고 있던 그의 얼굴이 무너져 버렸다.

“아아… 나의 공백이 너무 길었구나…. 수많은 생명이 사그라졌겠지. 바다는 생명의 보고. 끝까지 지켜야 할 곳이…. 어쩐지 느껴지는 바다의 기운이 무척이나 미약하다고 생각했다. 아아….”

그가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절망하자 주변의 미니미들도 덩달아 침울한 표정을 짓는 게 보였다.

“그러니 앞으로 더 나빠지기 전에 지켜야겠지? 네가 내게 온 이유도 그걸 위해서일 거 아냐?”

내 말에 그가 손바닥 너머로 슬쩍 날 바라본다.

“미래의 꽃말을 가진 네가 내게 온 건 아주 큰 의미를 가지고 있어. 세계는 아직 끝나지 않았어. 어쩌면 바다를 다시 넓히는 것도 가능할지도 몰라.”

내가 가지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땅의 축복을 유지하며 불을 몰아낸다면 다시금 바다의 면적이 넓어질 것이다. 오랜 시간이 걸릴 수도 있지만 그 정도는 인류에게 큰 시간이지만 세계에겐 찰나에 불과한 시간일 테지.

“그래! 네 말이 맞도다! 역시 내가 선택한 주인이다. 세계를 지키기 위해 이 한 몸을 다 바쳐 널 돕기로 하지!”

“멋있다! 완전 멋있다!”

“잘생겼다!”

“할 수 있다!”

그는 회복이 빨랐다. 다시금 우렁찬 성량으로 포부를 밝히자 미니미들도 밝은 목소리로 환호하기 시작했다.

“너에게 듣고 싶은 이야기가 아주 많지만 지금 상황이 심각해. 현재 이 테라리움을 사수하기 위해 불과 거대한 전쟁을 벌이고 있어. 내가 전투를 잠시 중단하고 널 개화시켜야 할 만큼 전력이 부족한 상황이야.”

“세계수 밖으로 나오자마자 전투라니! 그야말로 나의 첫 데뷔에 어울리는 상황이군! 걱정하지 말도록. 여기 위대한 바다의 신이 강림했으니 승리는 머지않은 일이도다!”

“와아!”

자신감 하나만큼은 정말 마음에 들었다.

어서 맹그로브를 전투에 투입시키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아직 이곳에서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저기요. 제가 온실에 오기 전에 했던 말 기억 하시나요? 행정 관리원을 좀 뵙고 싶다고 했는데.”

“아, 네! 지금 당장 연락해 보겠습니다!”

이곳에서 맹그로브의 개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직원에게 어떤 심경의 변화가 생겼는지, 처음엔 행정 관리원을 만나기 어려울 거라 부정적으로 말했던 이가 지금은 한시라도 빨리 나와 만나게 해야 된다는 것처럼 열정적으로 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직원의 눈에도 맹그로브가 얼마나 대단한 드라이어드인지, 그와 내가 나눈 대화가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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