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81화 (581/604)

흙을 만난 열매는 파르르 몸을 떨었다. 개화의 순간은 언제나 떨린다.

마거리트를 마지막으로 열매 개화는 참 오랜만이었다. 내 모험의 시작이었던 드라이어드 열매 개화.

열매 개화를 통해 제일 먼저 엘더와 메스키트를 만나는 커다란 행운을 얻었지.

지금 생각해 보면 열매에서 무려 가디언을 바로 얻는 건 정말 엄청난 일이었다. 모험을 통해 가디언의 존재가 얼마나 대단한지 깨달았고 평범한 방법으론 결코 만나기 힘든, 어떤 드루이드는 살면서 단 하나의 가디언도 만나지 못할 매우 희귀한 존재라는 것도 알게 됐지.

그런데 다시금 열매 개화를 통해 가디언의 등장을 바란다. 메스키트의 경우가 얼마나 특별했는지를 알면서도.

“제발….”

기도를 따라 석판이 푸른빛을 낸다.

열매의 떨림은 포트에서 굴러떨어질 것처럼 아주 세차게 변했고, 마침내 찬란한 금빛으로 차올랐다.

투툭, 열매의 껍질이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부디….”

깨진 껍질 사이로 동그란 새싹 잎 두 장이 톡 튀어나왔다. 언제 봐도 정말 사랑스러운 모습이었다.

새싹이 나오자 석판이 더욱 밝게 빛나며 급격한 변화를 일으켰다. 일단 드라이어드 열매란 걸 확인했으니 최악의 경우인 ‘NO DATA’ 상황은 지나갔다.

드라이어드 정보를 곧바로 보기에 겁이 나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곤 아주 천천히 눈을 떠 석판의 문구를 읽었다.

맹그로브 나무(mangrove)

칭호: 고대 바다의 신

꽃말: 미래

자생지: 오션 필드 (★★★★☆)

필드 발생 확률: low (★★★★★)

가치: 식재, 정화, 생태계 구성

특성: 방어형, 회복형

최종 확정 등급: 스페셜(Special)

내염성이 뛰어나 바닷물에 잠기는 땅에서도 살 수 있는 거대한 관목이다.

전투 보너스가 존재하지 않는다.

식물 중 유일한 태생종으로, 해안가에 거대한 숲을 이뤄 독자적인 생태계를 구성한다.

이러한 식물이 모인 숲을 일컬어 맹그로브라 부르기도 한다.

특정 조건이 되면 방어형에서 회복형으로 전환된다. 공격력은 없다.

“어어….”

석판의 문구를 읽자 머릿속이 멍해졌다. 열매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존재를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션 필드의 스페셜 등급 드라이어드. 여태 만났던 스페셜 등급은 메스키트가 유일했으므로….

“설마… 설마….”

어쩌면 기대 가능한 한 가지의 가능성에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온몸이 떨렸다.

“허억…. 스… 스페셜…!”

함께 석판을 지켜보던 과수원 직원이 마치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처럼 굴었다. 유니크 등급이 나타나면 모든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를 지경인데 스페셜 등급이니 오죽할까?

“고대 바다의 신이라니…. 이건 가디언을 떠올릴 수밖에 없잖아….”

석판에 담긴 정보는 여러모로 특별했다. 어디부터 짚어 봐야 할지 고민될 정도로 모든 게 이 열매에 담겨 있는 존재가 얼마나 특별한지 가리키고 있었다.

“방어형과 회복형 특성을 동시에 갖는 드라이어드라니….”

그 어디에도 턴 오버 속성이란 말이 없었다.

바곳은 엄연히 말해서 공격형과 회복형을 ‘동시에’ 갖는다고 말할 수 없었다. 턴 오버를 통해 특성을 전환해서 사용하기 때문이다. 공격형일 땐 공격 스킬만, 회복형일 땐 회복 스킬만 사용하는, 어떻게 보면 직업 변경이라 볼 수 있었다. 공격 바곳 따로, 회복 바곳 따로.

그런데 특정 조건만 되면 방어형과 회복형을 넘나들 수 있다니.

“공격력은 없다라…. 방어형과 회복형을 동시에 갖는 것에 대한 반작용인가…?”

공격력이 없다는 말은 조금 걸렸다. 아예 공격을 하지 않는 평화주의자 드라이어드라는 걸까?

전투 보너스가 존재하지 않는 점도 특이했다. 특정 달이 되면 전투력이 강해지는 드라이어드들과 달리 이 드라이어드는 그런 조건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뜻했다.

더욱이 전투 보너스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매칭되는 태양의 보석도 없는 거나 다름없었다. 그렇다면… 액세서리를 통해 이 드라이어드의 전투력을 비약적으로 증가시키는 것도 어려울 터였다.

“가치가 무려 생태계 구성이란 점도….”

이 드라이어드 모체가 가진 가치가 단순히 표현될 수 없을 만큼 대단하다고 이야기하는 듯했다.

정말 스페셜한 정보 그 자체.

“개… 개화는 안 하시나요?”

문구를 읽을 때마다 머리를 때리는 충격에 석판에서 도통 눈을 뗄 수 없었다. 직원은 그런 내가 뜸을 들인다고 생각했는지 개화를 재촉해 왔다. 주인인 나만큼이나 흥분하다니.

난 떨리는 손을 새싹을 향해 뻗었다.

엄청난 기운과 위압감이 아직 개화하지도 않은 열매에서 느껴졌다. 대단한 정보를 확인하고 느끼는 기분 때문인지, 정말 이 열매가 내뿜는 기운이 대단한 건지 알 수 없었다.

아티팩트가 채워진 왼손이 힘겹게 새싹에 닿았다. 마치 물을 흡수하는 휴지처럼 응축된 기운이 단번에 손끝부터 심장을 향해 전달된다. 오래도록 이 접촉을 몹시 기다려 왔다는 듯, 달려든 기운이 내 영혼의 한 자락을 거칠게 휘어잡는 게 느껴진다.

영혼이 터질 것처럼 막대한 기운이 차올라 일순 숨을 쉬기 힘들었다. 잠깐 동안 시야가 검게 점멸했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아무렇지 않게 버티기엔 지금 연결을 맺은 드라이어드의 영혼의 크기가 너무나도 대단했다. 아니 대단하다 못해 내 영혼이란 그릇을 깨트려 버릴 것처럼 너무나도 거대했다. COST가 오버해 버린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손발이 피가 통하지 않는 것처럼 저릿했다.

“각오했잖아! 흐아… 버텨야 돼…!”

호흡을 가다듬으며 이 거대한 영혼을 온전히 받아들이기 위해 집중했다. 영혼을 터뜨려 버릴 것처럼 날뛰는 혼란을 하나하나 다스렸다. 콧속에서 찡한 고통이 일고 입 안에선 비릿한 맛이 느껴졌다.

주저앉고 싶은 걸 간신히 참으며 영혼을 다스리자 마침내 혼란이 잠식되었고 숨을 쉬기 편안해졌다. 시간상으론 몇 초 만에 벌어진 일이었지만 체감은 몇 시간을 시달린 기분이었다.

눈부신 빛이 열매에서 터져 나오며 아주 진한 바다 내음이 콧속을 파고들었다. 귓가에 청량한 파도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내가 서 있는 이곳이 온실이 아니라 바다 한가운데인 것처럼 느껴졌다. 더 나아가 풍덩 하고 깊은 바닷속에 빠진 기분이었다.

첨벙, 무언가 물속에서 훌쩍 뛰어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허공에서 물에 풀어진 물감처럼 굽이치는 자주색 머리카락, 보석처럼 새빨간 눈.

정열이 담긴 선명한 색은 마치 물속의 보석처럼 뚜렷하게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눈길을 끄는 게 있었으니….

“인어…?”

그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독특한 모습을 한 드라이어드를 보자 꿈을 꾸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드라이어드의 하반신은 다리가 아닌 물고기의 꼬리가 자리하고 있었다. 동화 속에 나오는 인어 공주처럼 말이다. 다만 햇빛에 그을린 듯한 건강한 피부와 잘 짜인 상체 근육은 인어 공주라기보단 인어 왕자에 가까워 보였지만….

청록색 지느러미는 아주 얇은 실크 드레스처럼 하늘거렸고 허리까지의 하반신 전체가 나선형으로 요동치는 물의 고리로 감싸여 있었다.

주변엔 그를 축소한 듯한 모습의 아주 작은 미니미 일곱이 바로 곁에서 춤을 추듯 빙글빙글 돌며 둥둥 떠다녔다.

드라이어드와 미니미가 함께하는 모습이 모체로 따지면 하나의 ‘숲’처럼 느껴졌다. 단독이 아닌 숲으로 움직이는 느낌처럼 말이다.

물갈퀴가 있는 손엔 금으로 만든 거대한 삼지창이 무기로 들려 있었다.

개화를 끝내도 드라이어드는 여전히 물속에서 헤엄치듯 허공에 떠 있는 상태로 날 내려다봤다.

“와아….”

난 존재감만으로 온실을 가득 메운 맹그로브를 멍하니 바라보며 감탄했다. 그저 감탄만 나올 뿐이었다.

날 빤히 바라보는 맹그로브의 눈빛은 마치 한여름 바닷가의 태양처럼 강렬했다. 메스키트의 눈빛이 사막의 건조한 열기라면 맹그로브의 눈빛은 습하고 더운 바다의 열기였다.

우린 잠시 동안 말없이 서로만 바라볼 뿐이었다.

지켜보던 과수원 직원조차 숨 소리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먼저 침묵을 깬 건 맹그로브였다.

“와하하하!”

그는 대뜸 아주 호탕하게 웃어 젖혔다. 그가 웃자 미니미들도 따라서 꺄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미니미들도 하반신이 물고기인 인어의 모습이었기에 얼핏 보면 거대한 어미 고래 곁을 따라다니는 새끼 고래 같기도 했다.

“직접 보니 더 대단하잖아? 그 녀석에게 갔다면 엄청 후회할 뻔했잖아? 안 그러냐, 아그들아?”

“맞아! 맞아!”

“꺄하하하!”

목소리가 제법 거칠었다. 문득 은둔자의 정원으로 향할 때 탔던 애드너의 배가 떠올랐다. 그 배의 선원들의 사나운 말투가 맹그로브와 많이 닮아 있었다.

“이 내가 선택한 드루이드다, 이 말이야!”

“잘했어! 잘했어!”

“대단해! 대단해!”

성량도 꽤 커서 온실을 울릴 정도였다. 더욱이 주변의 미니미들이 쉴 새 없이 재잘거리니 금방 소란스러워졌다.

뭔가… 신비로운 신과 같았던 첫인상과 지금의 명랑한 행동이 상반되어 확 깨는 게 없잖아 있긴 했다. 푼수처럼 보이기도 하고….

“반갑다! 나의 새로운 주인이여! 난 오션 필드의 가디언, 맹그로브라고 한다! 자, 다들 박수!”

귀가 아플 정도로 큰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휘익!”

“와아! 박수!”

그의 말에 따라 미니미들이 휘파람을 불거나 작은 손을 짝짝 부딪히며 손뼉을 친다.

지나치게 하이 텐션인 드라이어드였다. 아직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눠 보지도 못했는데 벌써 기가 빨리는 기분이었다.

“잠깐…. 가디언이라고? 정말 네가 가디언이야?”

“그렇다!

“맙소사….”

리버 필드 외에 다른 필드의 가디언에 대한 가능성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물론 석판의 정보를 보고 어느 정도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지만 정말 가디언이 튀어나올 줄이야.

“세계수 안에서 너의 영혼을 느낀 순간부터 계속 지켜봤지. 너야말로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드루이드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리버 필드의 밍밍한 자식이 밖으로 나가려고 할 때 나 역시 따라 나왔지. 네가 용케 내가 담긴 열매를 가져가서 다행이야!”

“다행, 다행!”

“잘했어, 아주 잘했어!”

16번째 테라리움을 먹은 날을 기점으로, 세계수 안에 있는 모든 드라이어드들이 내 존재를 느끼게 되었다는 건 알고 있었다. 마거리트도 그로 인해 날 주인으로 찜해 뒀다고 했고.

그런데 오션 필드의 가디언까지 날 찜해 뒀을 줄이야.

“그럼 카수스가 가진 열매가 리버 필드 가디언의 열매인 건 확실하다는 거네….”

“서운해하지 말게나! 난 리버 필드의 밍밍한 녀석보다 훨씬 더 대단하니까!”

“대단해, 맹그로브는 대단해!”

카수스가 결국 리버 필드의 가디언을 얻게 된 건 꽤나 절망적이었지만, 내가 무려 기대하지도 않은 오션 필드의 가디언을 얻게 된 건 엄청난 희망이었다.

“잘 왔어.”

그래서 진심을 담아 맹그로브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정말 잘 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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