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80화 (580/604)

정문은 예상대로 굳게 닫혀 있었다. 불에 타지 않는 합판을 대어 최후의 방어선을 지키고 있었지만 상태가 심각해 보였다.

망루에서 동태를 살피고 있던 사람이 우릴 향해 손을 내저었다. 돌아가라는 손짓이었다.

그래도 버티고 있자 크게 소리쳤다.

“더 이상 부상자를 받아 줄 여력이 없습니다!”

“저는 부상자가 아니에요!”

나 역시 크게 소리치며 답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보급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망루에 있던 자는 문을 열어 주길 꺼려 했고 등 뒤로 간신히 터 놓았던 길이 불에 의해 닫히는 게 보였다.

“테라리움에 볼일이 있어요!”

93번째 테라리움이 내 입장을 거부한다면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다른 테라리움까지 갈 시간은 없었기에 좀 더 부탁해 보기로 했다.

밀려오는 불을 한 차례 몰아내며 버티자 보초를 서고 있던 사람이 갈팡질팡하는 게 보였다. 그가 안심할 수 있도록 문 주변을 깨끗이 정리한 후 다시 손짓을 했다.

“잠깐만 들렀다 갈게요!”

그는 아주 크게 갈등하고 있었다. 테라리움이 사람을 더 수용할 여력이 없긴 하나 테라리움을 지키러 와 준 드루이드를 매몰차게 돌려보낼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거대한 문 구석의 작은 쪽문이 덜컹 하고 열렸다.

“메스키트와 데이지는 다시 전장에 복귀해 줘.”

“행운을 빌게요.”

가디언들을 빨리 본래 있던 자리로 돌려보내는 게 여러모로 많은 도움이 될 터였다. 내 말에 둘은 지체할 것 없이 곧바로 무기를 들고 뛰어갔다.

“그리고 엘더, 바곳, 가막살나무는 출입문 위주로 지켜 줄래? 내가 돌아올 때를 대비해서.”

“걱정 말고 어서 다녀와.”

테라리움 안보다 밖이 드라이어드의 도움을 더 필요로 할 테니 함께 가는 것보다 남겨 두는 게 더 낫겠단 판단이 들었다. 곧바로 가막살나무가 주변에 방어의 울타리를 펼치자 문을 열어 준 이가 크게 안심하는 게 느껴졌다.

가막살나무는 과거 스케어크로우가 그래프트를 펼치며 단신으로 테라리움 전체를 지킬 수 있게 만든 종이었다. 망가진 군락지 역시 홀로 지켰던 적이 있고.

장소를 지키는 데 특화된 드라이어드니 방어에 큰 역할을 해 줄 거라 믿었다.

난 곧바로 쪽문을 통해 테라리움 안으로 들어갔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미리 말씀드렸다시피 저희는 더 이상 부상자를 받아 줄 수 없습니다.”

“과수원에 볼일이 있어요.”

내게 문을 열어 준 자는 무척이나 지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마른 체형에 남루한 차림새만으로도 이곳에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고초를 겪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과수원에… 혹시 행정 관리원님을 만나러 오신 겁니까? 안타깝지만 그분께선 몸져누우신 지 오래라 만나기 어려울 듯합니다.”

“아뇨. 온실만 이용할 수 있으면 괜찮아요.”

왜 이런 때에 온실을 찾느냐는 의문 가득한 눈을 하면서도 그는 과수원으로 향하는 방향을 알려 주었다.

난 그가 알려 준 길로 향하며 테라리움을 둘러봤다. 안은 전체적으로 한산했다. 거리엔 주민이 거의 보이지 않았는데, 텅 빈 가게나 집, 방치된 가구들, 거리에 굴러다니는 쓰레기들을 보니 위험을 피해 상당수가 이주한 걸 알 수 있었다.

“그나저나 행정 관리원이 침대 신세라니….”

건강한 사람이라도 테라리움이 이런 꼴이 된 걸 보면 앓아누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망할 날만 기다리고 있을 텐데 제정신을 유지하는 것도 용하지. 하지만 이런 때일수록 잘 버텨야 할 텐데.

앓는 소리가 들려 바라보니 빈 건물을 개조해 임시 병동으로 사용 중인 구역들이 눈에 들어왔다. 더 이상 부상자들을 받아 줄 수 없다더니 그럴 만해 보였다.

침대가 부족해 천을 깔고 바닥에 누운 이가 대다수였고, 그사이를 바쁘게 돌아다니는 의료진들이 보였다. 큰 테라리움에서 전문적인 치료를 받아야 할 환자들이 아주 많이 보였다.

그에 비해 시설은 열악하고 의료진의 수도 무척 부족했다. 한 사람이 수십은 되는 환자들을 쉴 틈 없이 살피는 걸 보니 가슴이 아팠다.

테라리움에 주민들은 없으나 환자는 넘쳐났다.

초기에 전투에서 다친 드루이드들은 후방의 임시 처소로 빠지는 게 아니라 테라리움 안으로 향했을 것이다. 지금은 엄청난 불을 돌파해야지만 테라리움에 들어올 수 있지만 초기엔 테라리움 근처가 가장 안전했을 테니까.

이대로 방어선이 뚫린다면 이곳에 누워 있는 부상자들은 전부 끝이었다. 다들 상태가 심각해 도망칠 여력이 없으니 그대로 최후를 맞이해야 하는 거다.

그나마 부상이 덜 심각한 사람들은 거리에 나앉아 건물 벽에 등을 기대고 불편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하나같이 힘이 없는 모습을 보아하니 오랫동안 굶주린 걸로 보였다.

의료품의 수도, 식량도 무척이나 부족한 게 분명했다. 출입문이 저 꼴이니 원활한 보급 지원도 무리일 테지.

밖이 버티더라도 안이 그만큼 버텨 줄지도 미지수였다. 빠른 시간 내에 해결하지 못하면 지켜도 지킨 게 아니게 되는 셈이었다.

예상은 했지만 심각한 상황을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니 가슴이 저렸다. 이 모습을 매일 보고 있을 행정 관리원의 마음이 이해가 됐다.

“아, 여기도….”

과수원 역시 부상자들로 가득했다. 테라리움 중 가장 나은 건물이 과수원일 테니 환자들을 위해 개방한 것이다.

그래도 잇속을 챙기기 위해 급급했던 다른 테라리움보단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테라리움의 얼굴이라며 과수원에 집중적으로 사치를 벌이는 곳도 더러 있는 데다, 환자들은 외지인들이나 다름없으니 외면할 수도 있었는데 말이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환자들을 살피고 있던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위에서 아래로 훑는 시선이 내게 어떤 부상이 있나 살피는 듯했다.

“못 보던 얼굴이군요. 혹시 어느 곳이 아파서 오신 건가요?”

말투엔 날이 서 있었다. 피로에 찌들어 스트레스를 잔뜩 받고 있는 목소리 그 자체였다. 툭 쏘는 목소리가 아픈 데도 없는데 왜 왔냐고 묻는 것처럼 들렸다.

“부상자가 아니에요. 과수원에 볼일이 있어서 왔어요. 혹시 온실이 어느 쪽인지 아세요?”

“전 과수원 직원이 아니니 다른 분을 찾아보세요.”

용건이 없다고 판단하자마자 차갑게 돌아서는 모습이 매정하게 느껴질 순 있으나, 부상자가 아니라는 말에 일순 다행이라며 안도하는 눈빛을 봤기에 그냥 넘겼다.

상황이 사람을 매정하게 만든 것으로 정말 심성이 좋지 않은 사람이라면 부상자들을 위해 지금까지 남아 있을 리가 없었다.

난 정신없는 사람들의 동선을 방해하지 않도록 물러난 후 사람들을 살폈다. 괜히 여기저기 기웃거렸다가 귀찮게 만들 수 있으므로 행동을 조심해야 했다.

환자들을 살피는 의료진들 사이로 물건을 나르거나 무언가를 적는 등 잡일을 하는 사람 몇이 눈에 들어왔다. 아마 저들이 과수원 직원일 터였다.

차분히 살펴보다 마침 이야기할 틈이 생긴 사람을 붙잡았다.

“죄송한데 온실을 좀 이용할 수 있을까요?”

“네?”

이런 상황에서 온실을 이용할 손님이 왔다는 사실에 어지간히 놀라운지 내게 붙잡힌 이가 눈을 크게 떴다.

“드루이드셨나요? 아니지. 이런 곳에 올 사람이라면 드루이드밖에 없겠구나. 온실은 무슨 연유로…?”

“드라이어드 포트가 필요해요.”

“아, 수확제가 지난 지 오래라 설마 열매를 개화하려나 싶었습니다. 현재 귀중품들을 전부 온실에 보관 중이라 관계자 외 출입이 금지되어 있는데… 꼭 지금 개화하셔야 하나요?”

“전투에 더 도움이 되려면 지금 꼭 필요해요.”

직원은 난감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자신이 맡던 일을 잠시 옆 사람에게 넘긴 후 날 온실로 안내했다.

“밖은… 지금 어떤가요?”

자세히 보니 직원은 상당히 어려 보였다. 로웰라의 또래라고 볼 수 있을 만큼.

피곤에 절어 수척해진 모습 때문에 본래 나이보다 더 많게 느꼈던 거다.

“물론 심각하겠죠. 그러니까 제 말은… 가망이 있나요? 일주일 전부터 보급도 끊기고 수송 마차도 오지 않아서 다들 이대로 테라리움 안에서 죽는 건 아닌가 걱정하고 있어요….”

바쁘게 일할 땐 그런 걱정을 할 정신이 없었으나 조금의 여유가 허락되자 둑이 무너진 것처럼 걱정이 밀려오나 보다. 급기야 직원은 울먹이기 시작했다.

“미리 대피해야 됐던 걸까요?”

“밖엔 아직도 테라리움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드루이드들이 많아요.”

내 말에 직원은 말을 멈추고 물기가 가득한 눈으로 날 바라봤다.

“지원도 올 거예요. 상황은 분명 나아질 거예요. 머지않아 테라리움의 문을 다시 열 수 있을 테니 너무 절망하지 말아요. 반드시 불로부터 지켜 낼게요.”

“…감사해요. 빨리 안전해졌으면 좋겠어요.”

난 위로가 될까 싶어서 92번째 테라리움의 상황을 전했다. 두 테라리움은 동시에 공격을 받았으니 이웃 테라리움의 사정이 나아지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안심할까 싶어서였다.

물론 93번째 테라리움은 그로 인해 배는 더 위험해졌지만 그렇잖아도 불안에 떠는 이에게 굳이 부정적인 이야기를 할 이유는 없었다.

“거긴 벌써 안정 단계란 말이죠…. 그렇다면 저희 테라리움도 머지않은 거겠죠? 다들 열심히 싸워 주고 계시구나….”

울먹이는 소리가 많이 잦아들었다. 다시 희망을 갖기 시작한 건지, 무너졌던 얼굴도 많이 평온해 보였다.

온실로 향하며 이곳의 세계수 가지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곳 사람들만큼 가지도 많이 수척해 보였다. 이래선 제대로 된 축복을 낼 수 없겠지.

망해가는 테라리움은 그만큼 다이아 수급이 어려워 가지가 제대로 다이아를 공급받지 못한 기간이 꽤 길었을 것이다. 지금처럼 불이 침범해 오는 시기엔 더욱 다이아를 잘 공급해 줘야 하는데 지금은 거의 끊기다시피 했을 테고.

내게 세계수 가지를 또 얻을 거냐고 묻던 엘더가 떠올랐다. 가지의 상태를 보고 나니 더욱더 그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꼭 내가 가지를 가져야만 하는 건 아니지.

“혹시 온실에서의 볼일이 끝난다면 행정 관리원을 만날 수 있을까요?”

“네? 아… 행정 관리원님께선 지금 병상에 누워 계셔서….”

“제가 찾아갈게요. 전 28번째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인 제이라고 해요. 아무래도 드루이드로서가 아닌 다른 방면으로도 도울 방법이 있을 것 같아서요.”

“왜 28번째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님께서 이런 곳에…. 그… 일단 연락은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기운이 많이 없으셔서 원활한 대화는 어려우실 수도 있어요….”

내게 묻고 싶은 게 많은 눈치였으나 간신히 참는 게 느껴졌다.

“여기가 온실로 통하는 문이에요.”

유리문을 열쇠로 열고 들어가자 보관 상자들로 복잡해진 온실이 나타났다. 공간을 말끔하게 유지하는 다른 테라리움의 온실들에선 보기 어려운 광경이긴 했다.

난 석단 위에 올려진 드라이어드 포트를 향해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 주변이 좀 더럽긴 해도 제 기능만 할 수 있다면 상관없었다.

바닥에 물이 좀 마르고 흙도 푸석푸석해 보여서 걱정이 되긴 하지만….

직원은 내가 드라이어드 포트를 이용할 동안 문 옆에서 손을 모은 채 어색하게 서 있었다. 모습으로 보아 이런 일을 많이 겪어 보진 않은 것처럼 느껴졌다.

주머니에서 드라이어드 열매를 꺼내 포트의 흙 위에 조심히 올려 두었다. 부디 이 상황을 타파할 수 있는 드라이어드가 나오기를…. 어떤 드라이어드가 나올지 알 수 없는 열매를 보며 간절히 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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