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지가 풀어 가는 규율은 마치 그녀가 피워 냈던 전설을 닮아 있었다. 그녀는 규율을 자신의 모험과 성장을 통해 깨달은 것이다.
“노멀 필드의 규율 협약자님들께선 부디 제 말을 들어주세요.”
솨아아.
봄바람에서 가을바람으로. 좀 더 세찬 기운이 데이지에게서 터져 나와 필드를 훑었다.
“저희는 무엇이든 될 수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으나 특별하게 규정되지 않은, 이 세계의 친절한 도우미입니다. 어느 땅에서나 피어날 수 있기에 소외되는 곳 없이 널리 퍼져 나가 그 땅을 이롭게 만들어야 합니다.”
화아아.
좀 더, 좀 더 강한 기운이 파도치듯 퍼져 나갔다. 그러자 마침내 전장 곳곳에 도달할 수 있는 거대한 흐름이 되었다.
“아….”
멀리 하나둘 피어나는 빛들이 보였다. 데이지의 목소리가 닿은 것이다.
“이 땅은 우리의 도움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모두가 행복해질 때까지 저희는 멈추지 않을 겁니다. 땅을 힘들게 만드는 불을 무찌르고 이 땅에 평화를 가져와야 합니다.”
빛은 아주 빠르게 수를 늘렸고 마침내….
마치 하늘의 은하수가 땅에 피어난 것처럼 필드에 빼곡히 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우리, 노멀 필드의 규율은 이 세계의 모두가 웃을 때까지 계속 이어질 겁니다.”
데이지는 전장의 모든 노멀 필드 드라이어드들의 영혼을 울리는 데 성공했다.
데이지가 가디언의 자리를 전승받은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아 어쩌면 큰 효과를 내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우려를 딛고 그녀는 멋지게 가디언 신고식을 치렀다.
“저도 다녀올게요!”
짐을 덜어 낸 것처럼 한결 홀가분해진 목소리로 데이지가 전장으로 뛰어갔다.
4그루의 가디언들이 전장을 진두지휘하는 모습은 나를 벅차오르게 만들었다. 이제 그 누구도 이 가디언들을 보고 의무를 저버렸다고 비난할 수 없을 것이다.
눈앞에 마치 사계가 펼쳐진 듯하다.
데이지가 펼쳐낸 노멀 필드의 영역은 마치 봄의 싱그러움을 가득 담은 듯했다. 드넓은 초원과 따사로운 햇살. 시시각각 땅과 기온이 바뀌며 뜨거운 모래와 강렬한 햇살이 되기도 하고 매서운 눈보라와 새하얀 눈밭이 되기도 했다.
새까만 재로 가득한 공간에 다양한 색채가 입혀진 모습에서 재생 가능한 희망을 엿봤다.
“넷에게 모두 맡길 순 없지. 우리도 가자.”
내겐 가디언이 아니더라도 강한 드라이어드들이 더 있었다. 그들과 함께 전장에 뛰어들었다.
미리 설명을 들었던 대로 불은 무척이나 체계적으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중심에 있을 킹이라는 존재는 보이지 않으나 92번째 테라리움보다 확연히 많은 불의 숫자에 그 위력을 실감할 수 있었다.
뚜렷한 체계를 보이지 않고 마구잡이로 공격하는 거대한 불도 있었다. 아마도 92번째 테라리움에서 도망쳐 온 녀석들일 것이다.
그 녀석들이 오히려 이 전투의 변수가 되고 있었는데, 공격, 방어, 회복, 지원에 맞춰 대응하던 이들이 갑작스레 난입한 마구잡이 형태의 불에 재빨리 대응하지 못해 큰 부상을 입는 모습들이 보였다.
따지고 보자면 두 가지 특성을 동시에 지닌 드라이어드의 모습에 빗댈 수 있었는데, 방어와 공격 특성을 동시에 가진 메스키트나 공격과 회복의 형태를 턴 오버로 지닌 바곳으로 예시를 들 수 있었다. 변칙적인 공격이 가능한 드라이어드와 같다고 볼 수 있었다.
“저게 비숍… 회복형 특성을 가진 불이라는 거지?”
전략에 맞춰 힐러를 우선순위로 노렸다. 가장 먼저 마주한 회복형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불은 거대한 꽃봉오리와 같은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오므린 꽃잎 위로 불씨를 뿜어내고 있었는데 마치 꽃이 꽃가루를 뿌리는 모양새와 닮아 있었다.
불씨에 맞은 불은 꺼져 가기 직전이라도 형태와 전세를 회복했다. 명백히 다른 불을 치료해 주는 모양새였기에 사람들이 회복형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전투에 참가했던 드라이어드 리스트를 확인하는데 회복형만 필터해서 본다 하더라도 그 수가 상당히 많았다.
“어떻게 회복형 능력만 뽑아 창조해 낼 생각을 했을까…. 내 생각이지만 갈수록 불이 지능적으로 변하는 거 같지 않아? 처음 만났던 불과 지금의 불은 너무 차이가 커. 앞으로 이런 불을 계속 만나게 된다면….”
“기분 나빠.”
비숍을 바라보고 있던 엘더가 끔찍하다는 말투로 말했다.
“저딴 게 감히….”
자신이 회복형 드라이어드이기에 이 상황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회복형 드라이어드들이 전투에 임하는 자세는 살신성인에 가까웠다. 자신이 무너진다면, 끝까지 살아남는다면 팀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잘 알고 있기에 묵묵히 제 역할을 해내는 게 그들이었다.
실제로 우린 엘더의 슈퍼 플레이로 많은 고난을 이겨 냈다.
“버러지 같은 녀석들이 뭘 흉내 낸다고?”
그런 수많은 치유사들이 희생되어 저 비숍 안에 포로로 잡혀 있었다. 불에게 잡아 먹힌 드라이어드는 세계수의 품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했던가.
오늘날 이 땅에 순환하지 못한 수많은 드라이어드의 영혼이 스러져 가고 있겠지. 불은 드라이어드들이 지키는 필드의 규율과 완전히 상반되는 존재였다. 그들은 종말을 노래했다.
“불씨를 뿜어내며 아군을 치유하는 형태는 민들레와 닮아 있어. 완전히 똑같다고 볼 순 없겠지만 우리가 이전에 겪었던 분진 폭발을 사용할 수도 있으니 조심해야 해.”
마침 내겐 방어의 가막살나무, 회복의 엘더, 공격의 바곳이 남아 있었다. 얼마든지 전투 중인 가디언들을 불러와 합류시킬 수도 있지만, 벌써 그들이 주축이 되어 전세를 바꾸고 있는 게 보여 그럴 순 없었다.
메스키트는 굳건한 방어를 펼쳐 아군의 숨통을 터 주고 있었다. 이 틈에 부상을 입은 자들은 후퇴하고 나머진 전세를 가다듬는 식으로 기회를 만들어 준다는 점에서 전장에서 큰 의지가 되고 있었다.
내가 그녀에게 팀의 의지가 되어 달라고 부탁했던 게 더 나아가 모든 아군의 의지가 되어 주니 무척이나 든든했다.
저쪽에 변칙이 존재한다면 이쪽에도 변칙이 존재했다. 힘을 되찾은 실새삼은 존재가 변칙 그 자체였다. 현재 전투에서 가장 효과적인 드라이어드의 능력을 카피해 위력을 가중시킬 뿐만 아니라 부상을 당해 갑자기 빈자리가 생겨도 곧바로 그 자리를 메꿀 수 있었다.
실새삼의 능력의 가장 무서운 점은 그가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다는 점이었다. 은둔자의 정원에서 그가 부리는 모든 줄기가 그의 수족이나 다름없었으나 본체를 찾아 무너뜨리기 전까진 공격을 멈출 수가 없었다.
따로 지원이 붙지 않아도 홀로 싸울 수 있는 데다 어느 전세에나 녹아들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에 가장 위력적인 솔로 플레이어라고 볼 수 있었다.
포인세티아의 장점은 기동성에 있었다. 다만 이 전장에선 분신을 마음껏 사용할 순 없으나 그녀는 겨울눈의 방을 십분 활용했다. 자칫 고립될 수 있는 드루이드들을 외부와 연결해 주며 필요에 따라선 탱커처럼 무적기를 활용해 공격을 대신 받기도 했다.
개인의 전투 능력도 뛰어났기에 본래 그녀의 무기는 크리스탈 오브였으나 상황에 따라 얼음으로 만든 검과 활을 이용해 전장을 종횡무진했다.
데이지는 존재 자체가 이 전장의 커다란 핵심이었다. 존재만으로도 반이 넘는 노멀 필드 드라이어드를 격려해 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공격 특화 드라이어드였기에 마치 나비처럼 날아다니며 수많은 불을 도륙해 나갔다.
적의 수를 줄이는 것은 가장 단순한 방법이지만, 실현한다면 전세에 가장 도움이 되는 방법이기도 했다.
그녀가 전대 노멀 필드 가디언으로부터 새롭게 전승받은 바람을 다루는 능력은, 마치 전장에서 수십 그루의 데이지가 칼질을 하는 것과 같은 위력을 냈다.
그녀가 과하게 힘을 쓰는 모습이 마치 가디언으로서 제대로 된 모습을 보여 줘야 한다는 압박감에 무리를 하는 건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었지만, 무모한 일을 벌이지 않을 거란 믿음이 있었기에 말리진 않았다.
이렇듯 4그루의 가디언은 전장에서 각자의 역할을 해내며 지옥 속에서 한 줄기 빛과 같은 희망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굳이 나를 주축으로 한 팀플레이가 아니더라도 개인이 전투에서 활약하는 모습에서 어렴풋이 그들이 정말 ‘가디언’임을 느꼈다.
그들이 가디언의 길을 걷는다는 건 더 이상 자신의 드루이드를 최우선 순위에 놓지 않아야 함을 뜻했기 때문이다. 예전의 우리라면 이렇게 위험한 전장에서 결코 나를 내버려 두지 않았을 것이다. 날 최우선적으로 보호하며 행동반경을 좁혔겠지.
하지만 우린 변화했다. 가디언이 수호해야 할 건 단지 나뿐만이 아님을.
“아군의 밀집도가 떨어져서 바곳이 활약할 수 있겠어. 저 정도는 혼자 해치울 수 있겠지?”
“네, 그럼요.”
거대한 불을 해치우기 위해 팀 모두가 달려들어야만 했던 과거가 있었는데…. 이젠 드라이어드의 독자적인 전투력만으로도 해치울 수 있을 만큼 강해졌다.
바곳이 거대한 낫과 같은 무기를 꺼내 들며 비숍을 바라봤다. 이 순간에도 비숍은 끊임없이 불씨를 뿜어내며 주변 불을 회복시키고 있었다.
“저 또한 회복형 특성을 가지고 있기에 저게 끔찍하게 느껴져요.”
엘더처럼 극단적인 혐오를 표출하진 않으나 바곳 역시 비숍의 존재를 불쾌하게 느끼고 있었다.
쿵! 바곳이 스태프를 바닥에 찍었다.
그러자 땅에 맞닿은 지점부터 마치 호수 표면처럼 파문이 일며 새까만 빛이 퍼져 나갔다. 부글부글 끓는 독이 무섭도록 빠르게 땅을 좀먹어 가며 그 위를 딛고 선 모든 불에 타격을 입혔다. 불의 색깔이 거무죽죽하게 변하며 그들이 뿜어내는 연기가 거무스름한 거품처럼 변했다.
바곳의 광범위 공격은 언제 봐도 대단했다. 기술의 공격 위력은 공격 특화형인 데이지의 단일 공격 위력에 비교하면 한참 낮았으나, 이 기술의 무서운 점은 디버프에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떨어지는 체력은 아차 하는 순간에 빈사 상태가 되고 만다.
독 공격의 사정 범위 안에 들어간 불 모두 급격하게 크기가 줄어들며 행동이 둔해졌다.
이에 맞춰 비숍이 미친 듯이 불씨를 뿜어내는 것이 보였다. 단순히 토템처럼 제자리에서 불씨만 뿜어내는 게 아닌, 주변 동료들의 상태에 맞춰 기술을 조절할 줄도 아는 것이다.
불씨를 맞은 불은 다시금 회복하면서도 독 중첩을 이겨 내지 못하고 타격 입기를 반복했다.
“흉내 낼 수 없는 게 있군.”
그걸 보면서 알아차렸다. 비숍은 회복시킬 줄은 알지만 디버프를 해제할 능력은 없다는 것을.
분명 이 전장에는 바곳처럼 디버프 능력을 사용하는 드라이어드들도 있었을 터였다. 하지만 비숍이 해제할 능력을 갖추지 않았다는 건, 굳이 사용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것일 수도 있다.
불의 기본 능력엔 디버프가 없기에 구태여 디버프 해제 기능을 가진 회복형 드라이어드들이 많이 활약하지 않았을 테고, 이를 기반으로 불 또한 차용하지 않았을 테니까.
비숍의 크기는 건물만큼 거대했다. 즉, 수많은 회복형 드라이어드들이 한 자리에 모여 일제히 힐링을 사용하는 것과 같았다.
그렇게 압도적으로 힐을 뿌리니 디버프로 깎이는 체력을 굳이 해제하지 않고도 충당할 수 있어서 더 필요성을 못 느꼈던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바곳의 능력을 얕봐선 곤란했다. 우린 이미 아무리 유능한 힐러인 엘더를 데리고 있더라도 파훼할 수 없는 엄청난 벽을 겪어 봤기에 저런 흉내쟁이 비숍만으론 이길 수 없음을 알았다.
바곳의 무서움은 중첩에 있었다. 가만히 놔두면 디버프가 중첩되어 처음엔 초당 100이 닳던 체력이 시간이 지나면 200씩, 300씩 닳는다. 이 중첩은 바곳이 능력을 사용할 때마다 계속 늘어날 것이고 마침내 회복할 틈도 없이 1000이 넘는 수치가 단번에 훌쩍 빠져 버리는 상황이 오게 된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잠식해 오는 죽음, 공들인 죽음, 마치 벨라돈나가 말했던 운명을 관장하는 사신과 어울리는 능력이라고 볼 수 있었다.
바곳이 낫을 들어 허공을 크게 베자 그곳에 마치 공간이 베이듯 길게 상처가 났고, 그 틈에서 청보라빛 나비들이 우수수 쏟아져 나와 전장을 날아다녔다.
바닥엔 독의 늪이 끓고, 하늘엔 독을 품은 나비들이 날아다니며 디버프 중첩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