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76화 (576/604)

“바이오 필드의 규율 협약자들은 듣거라.”

그는 다시금 필드의 드라이어드들을 향해 말했다.

“우리는 생명이 있는 곳이라면 반드시 피어날 수 있다.”

여전히 권위적인 목소리였지만 전보다 진중한 태도가 느껴졌다.

“죽음만이 가득한 이 필드에는 아직 생명이 존재한다. 그것만으로도 우리가 물러날 이유가 전혀 없음을 뜻한다. 이유가 있는 한 우리는 절대 물러나지 않는다. 적에게 등을 보이는 건 긍지 높은 자들에게 허락되지 않은 일이다.”

메스키트와 포인세티아 때처럼 누군가 듣고 있음을 뜻하는 빛이 보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실새삼 앞에 그의 말을 듣기 위해 수많은 존재가 몰려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내가 오랜 세월 동안 의무를 잊었을지언정 긍지마저 잊진 않았다. 그대들의 긍지를 수호하기 위해 아둔했던 내 과거를 반성하고 다시 돌아왔노라.”

화아아.

다시금 실새삼을 중심으로 응집되어 있던 기운이 훅 하고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이번에도 반응이 없는 걸까?

앞선 두 가디언과 달리 뚜렷한 반응을 보이지 않는 전장에 초조함을 느꼈던 것도 잠시, 강렬한 색채의 붉은 빛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가디언을 닮아 제 자리서 고고하게 반짝이는 빛이었다.

드디어 실새삼의 목소리가 이곳에 있는 바이오 필드의 드라이어드들의 영혼을 울리는 데 성공했다.

“내 존재는 군림하는 약탈자들의 긍지 그 자체. 내가 사라지지 않는 한, 바이오 필드의 위엄은 언제까지나 계속될 것이다. 그리고 나 역시 이를 잊지 않고 다시는 의무를 저버리지 않겠다. 적에게 예절에 대해 똑똑히 알려 주도록.”

반짝반짝, 마치 박수라도 치듯 우아하게 빛이 반짝인다. 동시에 지나치지도 않고 부족하지도 않은 따뜻한 기운이 가볍게 날 감싸는 게 느껴졌다. 주위에 희미하게 반짝이는 아주 작은 붉은 구체가 둥둥 떠올랐는데 그 수가 가볍게 지나가는 이슬비와 같은 밀도를 가지고 있었다.

색채만 다르다면 어두운 밤, 반딧불이들이 호수 근처에 아롱거리는 장면과 다를 바 없었을 거라 생각했다.

“이게 바이오 필드의 영역이구나….”

처음으로 본 가시화된 바이오 필드의 모습이었다.

드루이드가 영역 선포를 할 때는 자생 필드의 모습이 인상적인 특징과 함께 눈앞에 펼쳐지는데, 바이오 필드의 모습은 본 적도 상상해 본 적도 없었다. 바이오 필드는 말 그대로 기생하는 생명이 무대가 되기 때문에 상상하기 애매한 점이 없지 않아 있었다.

가시화된 바이오 필드는 그 자체로 생명을 나타내고 있었다.

피부에 닿는 적당히 따뜻한 온도가, 공기 중에 떠다니는 작은 빛 무리가 어떠한 거대한 생명 안에 있는 느낌을 주기도 하고, 혹은 수많은 생명들 틈이 자연스레 껴 있다는 느낌을 주기도 했다. 환상적인 느낌이었다.

“잘 봐 두어라. 이 필드를 내보일 수 있는 드루이드도 많지 않을 테니.”

확연히 다른 세 필드를 대하는 가디언들의 태도. 그리고 드라이어드들의 화답.

빛을 만족스럽게 바라본 실새삼은 데이지를 돌아보며 말했다.

“가디언으로서 네가 지키고자 하는 규율이 무엇인지, 필드의 드라이어드들이 어떤 협약 아래 모여 있는지 잘 생각해 보도록. 필드의 의지를 찾는 일, 그게 가디언으로서 가장 중요한 일이다.”

“노멀 필드의 의지….”

말을 끝낸 실새삼은 느린 걸음으로 전장으로 향했다. 그가 손을 휘젓자 땅에서 수많은 실새삼 줄기들이 튀어나왔고 갖가지 드라이어드들의 능력들을 완벽하게 모사해 냈다. 간만에 보는 흉내 내기 기술이었다.

은둔자의 정원에서 우리에게 끔찍한 시련을 내렸던 그 힘을 그는 다시 구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비로소 아주 강력했던 실새삼의 본래 모습을 거의 다 되찾은 것처럼 보였다.

“이곳에는 노멀 필드의 드라이어드들이 가장 많겠죠? 그만큼 제가 제대로 그들의 영혼을 울릴 수 있다면 큰 힘이 되어 줄 수 있겠죠.”

데이지는 입매를 굳히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필드에 차등을 둬선 안 되지만 노멀 필드의 비율이 훨씬 높다는 건 사실이었기에 그 수많은 전력들을 격려하는 게 가장 효율적이긴 했다.

노멀 필드는 다른 필드와 달리 인상적인 특징이 없다는 게 바로 특징이었다. 데저트 필드처럼 더운 열기와 모래가 깔린 사막이 있는 것도 스노우 필드처럼 혹독한 한기와 새하얀 눈이 깔려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나 어떤 식물이라도 자랄 수 있는 평범한 땅. 아주 많은 식물들이 존재한다는 점이 필드의 특징이자면 특징이었다.

“내가 응원할게.”

노멀 필드 가디언으로서의 데이지의 첫 데뷔전이나 다름없었다.

강력한 적들이 도사리고 있는 어려운 전투, 그곳에 있는 수많은 노멀 필드 드라이어드들을 격려해 사기를 증진시키고 전투력을 강화시켜야 했다.

모두와 함께 헤쳐 나가야 하는 이 전투에서 어쩌면 전력의 반이나 차지하고 있을 노멀 필드의 역할이 아주 중요할 테다.

데이지는 심호흡을 크게 한 번 한 후 앞으로 걸어 나갔다. 평소보다 그녀의 걸음이 무척이나 무거워 보였다. 전투가 한창인 지역과 안전한 지역의 그 아슬아슬한 경계선에 도달한 데이지는 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안녕하세요, 노멀 필드의 규율 협약자 여러분. 전 새롭게 노멀 필드 가디언을 맡게 된 레드 데이지입니다.”

조금은 생소하면서도 별난 시작이었다. 메스키트처럼 전장을 지휘하는 장군처럼, 포인세티아처럼 다정한 친구처럼, 실새삼처럼 고귀한 귀족처럼 노멀 필드의 영혼들을 부르지 않았다. 데이지의 첫 말은 어찌 보면 무척이나 평범하면서도 당연한 인사였다.

“한 필드를 대표하고 규율의 수호하는 위대한 존재에 제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느끼실 수도 있겠지만, 전 모든 걸 감내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자신에 대해 피력하는 건 실새삼의 모습에서 배운 걸까?

데이지는 떨지 않고 차분하게 말을 이어 갔다. 처음 하는 일임에도 주저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모체의 역사가 짧은 데다 이제 막 신화를 써 나가는 꽃이기에 다른 필드의 가디언들보다 믿음이 부족할 순 있지만….”

그녀를 믿지 못하는 건 아니었으나 조금은 걱정이 되었다. 말을 하다 불현듯 자신감을 잃는 경우도 종종 봐 왔기 때문이다. 그녀가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다 용기가 떨어지게 될까 봐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봤다.

“그런 제가 가디언이 될 수 있었던 이유도 모두 노멀 필드였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려했던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그녀의 용기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꺾이지 않았다. 내가 그녀에게 팀의 용기가 되어 주길 바랐던 것처럼, 그녀는 변함없이 우뚝 서 있었다.

“가장 많은 꽃이 피어나는 땅이기에 그만큼 수많은 다양한 꽃들이 노멀 필드에 모여 있어요. 모체의 역사가 오래된 꽃이라도 갓 태어난 꽃이라도, 신화가 대단한 꽃이라도 그렇지 않은 꽃이라도. 자연종일지라도 개량종일지라도. 모든 것을 아우를 수 있는 필드이기에 모든 것을 해낼 수 있는 필드라고 생각해요.”

아직 그녀가 다른 가디언들처럼 필드에 기운을 뿌리는 징조는 보이지 않았다.

말을 잠깐 멈춘 데이지는 싱긋 웃어 보였다.

“노멀 필드의 규율 협약자님들. 우리의 전 가디언은 오랜 세월 규율 수호를 하지 않은 데다 이젠 사라져 버려서 과거의 규율이 어떠했는지 전 잘 모릅니다. 더구나 전 역사가 짧은 꽃이라 먼 과거로부터 이를 이어받지도 못했지요. 하지만 과거의 규율을 모르더라도 그것이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르르….

데이지를 중심으로, 봄바람처럼 약하지만 살랑거리는 기운이 가볍게 흘러나왔다. 멀리 있는 자들은 알아차리지 못할 약한 기운이었지만, 그녀가 마침내 어떠한 가닥을 잡았음을 알 수 있는 징조였다.

“가장 넓은 땅으로,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나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땅도 아우를 수 있는 땅. 보이지 않는 곳이라도 소외되었다고 생각하는 곳이라도 그곳에도 땅은 존재합니다.”

오랜 세월 동안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아 온 레드 데이지는 봄이 오면 가장 먼저 산과 들을 가득 메웠다.

궂은 지형에서도 잊지 않고 봄을 알리기 위해 얼굴을 내밀었기에 세상을 등지고 은거한 자라도 꽃을 볼 수 있었다. 그 어떤 신분을 가진 사람이라도 나이를 불문하고 어디서든 꽃을 볼 수 있었다.

“노멀 필드는 특별할 것 없이 평범하지만 그렇기에 기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어떤 신분을 가진 사람이라도 나이를 불문하고 어디서든 꽃을 볼 수 있었다.

“치우침 없이 중심을 잡을 수 있는 땅. 저희는 그곳에서 태어나 모두의 중심이 되는 보통의, 평균적인 존재가 되는 겁니다.”

흔하디흔하기에 특별한 날에 특별하게 준비되는 꽃이 될 수 없었고 약속과 맹세의 의미로 주고받는 꽃도 될 수 없었다. 뿌리를 내린 땅에서 뽑혀 나가는 꽃이 되었고 감흥과 흥취를 줄 수 없어 단조로운 꽃이 되었다.

“평범하다고 약한 것도 별 볼 일 없는 것도 아닙니다. 평범하기에 언제든지 누군가에겐 어렵지 않게 특별해질 수 있는 꽃, 그 누군가는 이 땅에 살아가는 어떤 존재라도 가능합니다. 우리는 세계의 넓은 땅, 어느 곳에서나 자리하며 도움이 필요한 누구에게나 손을 내밀 수 있는 존재. 기본을 해낼 수 있는 꽃들.”

특별한 이의 믿음에 보답하는 것으로 존재의 가치를 깨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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