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들 구역을 맡은 후 비장한 각오와 함께 참전했다. 모두가 떠나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심호흡을 크게 했다.
“후우….”
내 모든 걸 펼쳐야 하는 순간이었다.
어쩌면 모든 전투 중 지금 이 전투가 가장 중요한 순간일지도 모른다.
나 혼자만의 싸움이 아닌, 지켜야 하는 것들도 많았고 이로 인해 앞으로 달라질 미래도 제각각이었다. 이 전투로 인해 이 세계에서 내 위치가 재정립되겠지.
그동안 갈고 닦은 드라이어드들의 실력도 내 능력도, 포섭하고 관리한 인력들의 한계를 확인할 수 있는 자리였다.
“처음부터 가디언들이 전면으로 나선다.”
내 말에 드라이어드들이 성큼 앞으로 나섰다.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에서 했던 것처럼 너희들의 통솔력이 필요한 순간이야.”
같은 자생 필드의 드라이어드들을 통솔하고 격려하는 가디언의 힘, 모두를 하나로 모으는 힘이 필요했다.
“그때와 달리 다들 주인이 있는 드라이어드이기에 지휘하는 게 어렵겠지만….”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의 드라이어드들은 명확한 주인이 없는 야생 상태였기에 마구 날뛰었지만 한편으론 그만큼 군림하는 것도 수월했다.
하지만 주인이 있는 드라이어드들에겐 최우선적으로 신경 써야 하는 존재가 있기에 어쩌면 가디언의 존재를 쉽게 수용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
“지금 이곳에서 전투 중인 모든 드루이드와 드라이어드들이 우리와 함께해야 해.”
“모두 당신의 뜻대로.”
메스키트가 여유로운 웃음을 지으며 내 손을 들어 손등에 입을 맞췄다.
“오늘의 우리를 만들어 준 당신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바칠게요.”
그녀는 마치 이 전투를 앞두고 내가 무얼 생각하는지 무슨 마음을 먹었는지 전부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수액도 안 마른 녀석에게 항상 그런 역할을 내줄 순 없지.”
목소리는 빈정거리지만 표정은 한없이 온화한 실새삼이 메스키트를 곁눈질로 바라보며 말했다.
“네가 생각하는 대로 이 전투는 큰 기점이 될 것이다. 불과 끊임없이 부딪히는 세계의 미래가 달린 기점. 이 전투에 패배한다면 앞으로 세계는 불에게 결국 이길 수 없음을 절망할 테고, 승리한다면….”
그는 등을 꼿꼿이 세워 우아한 몸짓으로 전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세계는 새로운 가능성을 깨닫고 희망을 가지게 되겠지.”
“어렵게 말하긴. 네 존재야말로 희망이야. 그동안 불이 침입하면 결국 지역이 사라지는 게 정론이었잖아? 하지만 사라진 땅도 새롭게 재생될 수 있다는 걸 넌 보여 줬어. 그거면 된 거야. 네가 있기에 우리 역시 희망을 만들 수 있어.”
포인세티아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옆에서 듣고 있던 데이지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어떤 일이든 해낼게요. 할 수 있어요.”
그녀의 말은 간단하면서도 가장 많은 결의를 담고 있다고 볼 수 있었다.
“좋아. 다들 잘 부탁해. 반드시 93번째 테라리움을 탈환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실새삼이 가장 먼저 성큼 나섰다.
“들어라, 바이오 필드의 규율 협약자들이여.”
실새삼이 손을 뻗자 그를 중심으로 응집되어 있던 기운이 폭발하듯 널리 퍼져 나갔다.
“스노우 필드의 규율 협약자들아, 내 목소리를 들어 줘!”
이에 질세라 포인세티아가 대뜸 그 옆에 서서 양팔을 넓게 펼치고 크게 소리쳤다. 그녀를 힐끔 바라본 실새삼의 표정이 좋지 못했다.
포인세티아는 항상 실새삼을 묘하게 경쟁 상대로 여겼었다.
“갓 자리를 잡은 네 녀석의 목소리가 주인 있는 드라이어드의 영혼을 울릴 수 있겠느냐?”
“그러는 너도 애먹고 있는 것 같은데?”
포인세티아의 말처럼 나 역시 실새삼이 어쩐지 애를 먹고 있다는 걸 느꼈다.
실새삼은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에서 연설했을 때의 모습과는 어딘가 많이 달라 보였다. 그때는 바이오 필드의 드라이어드들이 곧바로 그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응답했다. 하지만 지금은 연결이 닿지 않기라도 한 건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오랜 세월 외면했던 규율 수호자의 위치를 단번에 되찾을 수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포인세티아에게서 눈길을 거둔 실새삼은 다시금 전방을 바라보며 정신을 집중했다.
그의 말에 곧바로 파피루스 드라이어드가 떠오른다. 그 드라이어드는 필드의 규율을 완전히 저버린 드라이어드의 대표적인 모습이라고 볼 수 있었다. 오로지 주인만을 위해 이치를 저버릴 줄 아는 존재.
오랜 세월 가디언들이 규율 수호의 의무를 외면했고 그에 따른 여파로 필드의 규율을 잊어버린 드라이어드들이 늘었다면, 가디언의 부름에 단번에 응답하지 않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됐다.
“잊었다면 떠올려라. 우린 군림하는 약탈자. 그 근본을 되새기는 자의 부름을 거부할 권리는 너희들에게 없다.”
“난 포인세티아야. 부디 내 목소리를 외면하지 말아줘. 오랜 시간 동안 책임을 외면해서 미안해.”
실새삼의 목소리는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에서 그랬던 것처럼 권위적이었고 포인세티아의 목소리는 눈산에서 했던 것처럼 다정한 호소에 가까웠다.
두 드라이어드는 각각 다른 자생 필드의 수호자인 만큼 필드의 드라이어드들을 대하는 태도도 달랐다.
“잘되지 않나 보군요.”
이를 지켜보고 있던 메스키트가 드디어 나섰다.
“역시 시작은 제가 해야겠죠?”
따뜻했던 그녀의 목소리가 금방 바뀌었다.
“데저트 필드의 규율 협약자들이여!”
쿵! 지반에 엄청난 위압감이 내려앉자 내 영혼이 단번에 사막의 뜨거운 열기를 느꼈다.
메스키트는 전장을 통솔하는 지휘자처럼 삽시간에 주변의 모든 기운을 사로잡아 평정했다.
그녀가 흑빛 랜스를 뻗자 첨단에서부터 쏘아져 나간 찬란한 빛이 대지를 물들였다. 그 빛에 동조하듯 반짝이는 빛이 그녀가 바라보는 방향에서 곳곳에서 쏘아진 불꽃처럼 터져 나왔다.
나는 곧바로 그것들이 메스키트의 목소리를 들은 데저트 필드 드라이어드들의 응답임을 알아차렸다.
“우리는 강인한 사막의 전사! 어떠한 어려움이 닥쳐도 결코 쓰러지지 않는다!”
번쩍번쩍, 그녀의 목소리를 따라 사방에서 눈부신 빛이 쉴 새 없이 터져 나온다.
“끝까지 싸워라! 우리의 뿌리는 끝내 희망에 도달할 것이다!”
화아아.
필드에 찬란한 햇살이 녹아든 데저트 필드가 나타났다. 전장의 모든 데저트 필드 드라이어드들을 위한 격려가 전달되었다. 메스키트는 가디언의 존재가 진실로 무엇인지 보여주고 있었다. 존재만으로도 모든 규율 협약자들이 힘을 낼 수 있다.
“그 선봉엔 내가 서 있을지니…!”
곧바로 메스키트가 전투에 뛰어들었다. 새로운 무기를 얻은 메스키트의 전력은 이전과 차원이 달랐다. 그래프트의 힘을 스스로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그녀는 등장과 동시에 수많은 목숨을 지켜 냈다.
“쯧….”
불편함이 가득 담긴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결국 실새삼이 원했던 ‘모범’이 되는 모습은 메스키트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어리석은 협약자들이여.”
어쩌면 자존심이 상했는지도 모른다. 햇수로 따지면 메스키트가 가디언으로 집권한 시기는 실새삼에겐 전혀 비할 바가 되지 못했다.
메스키트 역시 수호자로서의 책임을 외면한 기간이 오래되었다고는 하나, 나를 만나며 나와 함께 다시금 그 자리에 대한 의무에 대한 깨달음을 얻은 시기는 훨씬 빨랐다.
그녀는 착실히 자신의 본분을 다해 왔다. 어쩌면 가장 먼저 한계를 깨닫고 자신의 수족과 같은 무기를 단번에 내던졌던 행동 역시 이와 같은 빠른 수긍과 반성하는 태도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난 포인세티아야. 스노우 필드를 사랑해서 가디언이 되었어. 난 하얀 눈뿐만 아니라 그곳에서 살아가는 너희 모두를 사랑해. 내가 사랑하는 모든 걸 지킬 수 있도록 너희들이 도와줬으면 좋겠어.”
포인세티아는 마치 친구에게 이야기하듯 전방을 향해 호소했다.
그때였다. 코 끝에 차가운 기운 톡, 닿는 것이 느껴졌다. 그건 아주 작은 눈송이였다.
“인정하기 싫을지도 몰라. 때론 변화하지 않는 게 가장 최선일 수도 있다는 걸 아는 너희들이니까. 그런데 너흰 변화할 필요가 없어. 나는 결코 변화를 일으키고자 너희를 부른 게 아니야. 너흰 늘 그랬던 것처럼 그 자리에서 눈을 기다리면 돼. 내가 하얀 눈이 되어 줄게. 언제나처럼 너희에게 내리는 익숙한 눈과 같은, 그런 친구 같은 존재로 날 받아들여 줘!”
휘잉. 사막의 열기 속에서 온몸을 식히는 극한의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다.
얼굴에 닿는 작고 차가운 감각도 점차 수를 늘려 갔다. 불이 가득한 공간 속에서 이질적으로 새하얀 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 순간, 마침내 발휘되기만을 기다렸던 힘이 포인세티아를 중심으로 훅 퍼져 나갔다. 그녀의 기운은 위압적인 메스키트의 기운과 완전히 달랐다.
다정하면서도 발랄하고 새로우면서도 무척이나 익숙하게 느껴지는 그런 기운이었다.
포인세티아가 자신의 크리스탈 오브를 두 손으로 기도하듯 쥐자 고운 빛이 밤하늘의 은하수처럼 맑게 빛을 냈다. 그러자 사방에서 하얀 눈과 같은 소담한 빛이 응답하듯 반짝였다.
마침내 포인세티아의 부름도 전장에 있을 스노우 필드의 드라이어드들에게 닿은 것이다.
그 수는 데저트 필드에 비하면 턱없이 작았으나 새하얗게 반짝이는 빛의 존재감은 결코 작지 않았다. 마치 눈 속에서도 꽃은 피어난다는 걸 알리는 그들의 존재처럼, 묻히지 않고 반짝반짝 빛을 냈다.
“고마워, 내 목소리를 들어 줬구나.”
감동한 그녀의 목소리는 물기에 젖어 있었다.
“우리는 비밀스러우면서도 고독한 동토의 은둔자. 우리는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항상 최선을 다해 왔어. 난 그걸 알아. 그러니 너희가 포기하지 않도록 내가 힘이 되어 줄게.”
노랫가락과 같은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경쾌하게 퍼지자 화답하듯 리듬에 맞춰 빛도 반짝거렸다.
“다녀올게!”
내게 명랑하게 인사한 포인세티아가 얼음으로 만들어 낸 칼을 쥐고 전장에 뛰어들었다.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보는 실새삼의 표정이 몹시 좋지 않았다. 포인세티아에게마저 밀렸다는 사실이 꽤 자존심을 건드리는 듯했다.
“저도 할 수 있을까요…?”
성공적으로 협약자들을 격려해 낸 데저트 필드와 스노우 필드의 가디언들을 바라보며 데이지가 물었다.
“응. 네 역할이 가장 중요하기도 해. 노멀 필드의 드라이어드 수는 둘을 합친 것보다 훨씬 많을 테니까. 넌 할 수 있을 거야.”
내 말에 데이지가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지금 실새삼보다 데이지가 목소리를 내지 못할 확률이 더 클지도 모른다. 그녀는 완벽한 수호자라기보단 견습에 가까웠으니까.
하지만 할 수 없어도 해내야 하는 순간이 바로 지금이었다.
“못 볼 꼴을 보였군.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모범을 보여 주마.”
실새삼의 말투가 조금 느슨해졌다. 그는 데이지를 향해 조언하듯 말하며 달라진 눈빛으로 앞을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