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74화 (574/604)

사실상 93번째 테라리움은 이미 멸망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끔찍했다. 부디 테라리움의 주민들이 미리 대피했기를 바라는 수밖에.

난리 통에서 가장 눈에 띈 건 드루이드의 시체를 처리하고 있는 또 다른 드루이드들이었다.

그들은 죽어 버린 눈으로 동료의 시신들을 옮긴 후 태우거나 드라이어드의 능력으로 없애고 있었는데, 그 수가 너무 많다 보니 먼 거리까지 역한 냄새가 풍길 정도였다.

시신들을 유족들에게 돌려보내진 못할망정 훼손을 저지르는 행위를 그 누구도 비난할 수 없었다.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드루이드와 드라이어드가 불의 먹이가 되지 않도록 예방하고 있었다.

마차에서 내린 우리들을 향해 누군가 다가왔다. 시체를 처리하고 있던 자들 중 한 명이었다.

“돌아가십시오.”

우리를 반기지 않는다는 게 바로 느껴졌다. 그녀의 목소리가 물에 잠긴 것처럼 먹먹했다.

“이곳은 이제 가망이 없습니다. 괜히 시체를 늘려 곤란하게 만들 생각이 아니라면 돌아가십시오. 그리고 의뢰처에 93번째 테라리움과 관련된 의뢰를 내리는 건 무의미하다고 알리십시오.”

“돌아가지도 포기하지도 않을 겁니다.”

참전할 의사를 명백히 밝혔다. 밀려오는 죄책감에 가슴이 쓰렸다.

“당신이 총책임자인가요?”

“그런 직책은 없습니다. 그저 다른 이들보다 더 오래 살아남았을 뿐. 전 렉스입니다.”

“전 제희라고 해요. 현재 상황에 대해 설명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여기서 더 드루이드가 몰려온다고 한들 나아지는 건 없습니다. 갑자기 위험도가 높은 불들이 이곳으로 몰려들어 간신히 유지되던 전세가 완전히 꺾였습니다. 사방에 비명 소리가 가득했고 열기는 불 속에 뛰어든 것처럼 끔찍했습니다. 93번째 테라리움은 곧 멸망할 겁니다.”

역시나 92번째 테라리움에 있던 불들이 죄다 이리로 옮겨 왔음을 알 수 있었다.

“저흰 92번째 테라리움에서 왔습니다. 저희의 공세에 못 이겨 그곳에 있던 불들이 대거 93번째 테라리움으로 이동한 듯합니다.”

내 이야기에 렉스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갑작스러운 괴현상에 이곳으로 오고 있던 드루이드 무리가 전멸한 것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드라이어드의 능력을 사용하는 불이 다량 있는 건 확실하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런 이유라면… 92번째 테라리움은 이제 안전한 겁니까?”

“아마 곧 안전해질 겁니다. 현재 이곳에 몰린 불들은 마지막 발악을 하고 있는 거라고 전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더 이상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지 않습니까?”

전장을 바라보는 눈빛엔 어둠이 가득했다. 렉스는 진심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절망을 느끼고 있었다.

“저희는 곧바로 전투에 참가할 생각입니다. 유의해야 할 불에 대해서 알려 주시겠어요?”

보스급 불들은 단순하게 해치울 수 없는 존재들이었다. 불이 삼킨 드라이어드에 대한 정보가 없다면 큰 피해를 감수해야만 했다. 불의 파괴력과 드라이어드의 신통한 능력의 만남, 그건 재앙이었다.

“93번째 테라리움이 오랫동안 고전을 면치 못했던 이유는 저희들이 킹이라 부르는 터주가 있기 때문입니다.”

“터주요?”

“네, 92번째 테라리움에서 온 불은 아닙니다. 이곳에서 생겨나 필드의 절망을 전부 집어삼키고 무섭도록 성장한 놈입니다.”

속이 먹먹했다. 터주라 부를 정도로 이 일대를 지배한 불이 있다니.

“놈은….”

이를 악문 그가 끔찍하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끊임없이 불을 만들어 냅니다.”

실로 환장할 설명이었다. 불은 본래 동족을 잡아먹어 몸집을 키울 줄이나 알지, 스스로 또 다른 동족을 만들어 내는 건 본 적이 없었다. 킹이라 불리는 불은 이전에 만나 본 적 없는 타입임이 확실했다.

“불을 생성해 낸다는 건….”

“보통 불이 아닙니다. 생성되는 놈들이 하나같이 전부 괴물입니다.”

이전엔 죽음의 대지에서부터 앞 번대 테라리움을 향해 밀려오는 불이 문제였다면, 이젠 내부에서 자체적으로 생산해 내는 불까지 경계해야 했다.

“킹을 잡는 게 가장 중요하겠군요.”

“그 역시 쉽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가 힘을 합쳐 킹부터 잡는 계획을 생각하고 있는데 렉스가 회의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킹을 지키는 녀석들도 있습니다.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건, 이 필드에 있는 불들은 우리가 기존에 만나 왔던 불들과는 완전히 다른 존재들이란 것입니다.”

“불이… 협동 공격을 한단 말인가요?”

“네, 킹에서 분화된 놈들입니다.”

불은 협력하지 않는다. 협력하는 것처럼 보여도 같은 먹이를 노리고 같은 적을 두고 행동하다 보니 어쩌다 보니 그렇게 보이는 것일 뿐.

협력이란 기본적으로 이지(理智)가 있는 존재들이 득실을 따지며 하는 행동이었다. 그렇기에 눈앞에 살아 움직이는 것들을 잡아먹는 데 급급한, 근본이 게걸스럽고 탐욕스러운 녀석들이 협력을 할 리 만무했다. 동족을 잡아먹어 제 몸집을 키우는 점도 그러했다.

녀석들에겐 이지가 아닌 본능만이 존재했다. 생태계 최강자를 모방하고 삼킨 드라이어드의 능력을 사용하고, 강자를 만나면 도망도 칠 줄 아는 모습들이 모두 생존 본능에 충실한 모습들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 모습이 평소보다 영리하게 보이면 이지를 갖춘 것처럼 보일 뿐이었다.

“확실한가요? 오해가 아니라 정말로 ‘협동’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건가요?”

“네, 심지어 행동도 꽤나 체계적입니다.”

수없이 많은 불을 상대해 온 베테랑들이 그런 판단을 쉽사리 내릴 리 없었다. 아마 불이 협력한다는 정보는 사실일 것이다.

“비숍이라 불리는 녀석들이 있습니다. 그 녀석들은 불을 소생시킵니다.”

“네? 설마….”

“녀석들은 회복형 드라이어드의 능력을 사용할 줄 아는 놈들입니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이 역시 그동안 만나 본 적 없는 타입이었다. 협력하는 걸 모자라 동족을 회복시키는 놈이 있다니.

“어쩐지 킹과 비숍 외에도 더 있는 것처럼 들리는데요?”

“네, 룩이라 부르는 놈들도 있습니다. 그놈들은 다른 불을 서포트합니다. 지원형 드라이어드의 기술을 사용할 줄 안다는 겁니다.”

렉스의 설명을 듣는데 문득 기시감을 느꼈다.

“나이트도 존재합니다. 그 녀석들은 마치 방어형 드라이어드들처럼 적의 시선을 분산시키거나 비숍을 지키기 위해 대신 공격을 맞기도 합니다. 그리고 폰, 저흰 강력한 공격력을 가진 불은 계급에 차등을 두어 폰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체스의 말을 부르는 것 같네요….”

“처음부터 그걸 인용했던 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특정 불에 의해 사상자가 많이 발생하자 후발대에게 설명해 주기 위해 단어를 차용해야만 했습니다.”

렉스가 해 준 설명을 곱씹다가 드디어 들으면서 느꼈던 위화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불이 지나치게 전문적이네요? 회복, 지원, 방어, 공격 역할을 따로 세분화해서 맡는 걸로 들리는데. 그건 꼭… 드라이어드 같잖아요? 설마 오랜 전투로 인해 우리들의 모습을 학습했다고 보는 건가요?”

“그럴 수도 있지만 저희는 모든 원인이 킹에게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킹이 불을 생성해 내는 건 자신의 몸에서 조각을 떼어 내는 출아의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불이 생성되는 게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일부를 떼어 내는 방식이었다니.

“킹은 전투에서 패한 수많은 드라이어드들을 흡수했습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특성대로 분류하여 역할이 치중된 불을 떼어 내 동료로 부린 것입니다. 전투를 학습했다면 아마 이 부분에 적용했을 것입니다. 홀로 잡다한 능력을 가지고 맞서는 것보다 저희 드루이드의 방식처럼 특성에 맞는 드라이어드들이 협력하는 포메이션을 노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비숍은 회복형 드라이어드 능력을 모아 분리한 불이고, 룩은 지원형을, 나이트는 방어형을, 폰은 공격형을 모아 분리했다고 볼 수 있다는 거네요?”

“네, 그렇습니다.”

듣고 있던 다른 이들도 불의 충격적인 행보에 놀라 수군거렸다.

“그런 식으로 나온다면… 93번째 테라리움의 전투가 어려운 건 어쩔 수 없겠네요. 불의 파괴력까지 가진 드라이어드 군대를 상대하는 것과 마찬가지잖아요?”

“놈들은 굉장히 체계적이고 영리합니다. 돌아가실 생각이 없다면 주의해야 할 겁니다. 어차피 당신들이 추가로 참전해 봤자 나아질 건 없겠지만….”

렉스는 전혀 기대감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드라이어드가 죽게 된다면 반드시 불에게 먹히기 전 그 시체를 직접 거두시고, 본인이 죽을 것 같다면 최대한 시체를 남기지 않는 방향으로 행동하시기 바랍니다. 본인의 드라이어드에게 부탁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겠죠. 이 이상 전력이 늘어난다면… 어쨌든 93번째 테라리움이 무너진다면 80번대 테라리움의 습격은 아주 빠르게 이뤄질 겁니다.”

이야기를 끝낸 렉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다시 시체를 처리하러 떠났다. 그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은 그것뿐이라는 것처럼.

기존의 전장에선 렉스와 같은 행동을 하는 자들을 볼 수 없었다. 그만큼 상황이 급변하고 있다는 거겠지.

“저자의 말대로라면 저희들이 투입된다고 상황이 크게 나아질 거라고 보이진 않습니다.”

제퍼가 비관적으로 사태를 판단했다.

“큰 반향을 일으킬 만한 전력이 못 된다고 봅니다.”

다른 드루이드의 판단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손 놓고 볼 수만은 없는 노릇이잖아요? 추가 전력은 꼭 올 거예요.”

스텔라를 떠올리며 말했다. 그녀는 반드시 베스탈리스들을 끌고 와 줄 것이다.

“저희는 최선을 다하면 돼요. 먼저 하던 대로 하죠. 드라이어드 전투 방식대로. 최우선은 역시 회복형을 노려야겠죠.”

수많은 불들이 킹을 지키고 있다면 일단 주변 전력을 해치울 필요가 있었다. 특히나 힐러를 먼저 쓰러뜨리는 건 어느 전투에서나 기본이었다.

“따로 이름을 붙일 정도로 강력한 녀석들이란 걸 잊지 마세요. 드라이어드를 상대하듯 싸워야 할 거예요.”

“방어 역할을 하는 녀석들도 있다고 했으니 팀을 나눠서….”

사람들은 빠르게 계획을 세워 나갔다. 당장 전투에 뛰어들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으나 92번째 테라리움에서 하듯 각개 전투를 하면 안 될 거란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온건파 베스탈리스들의 첫 전장이 이곳이 아니어서 다행이었는지도 모른다.

“아, 마스터. 이리스가 이걸 가져가라고 했습니다.”

제퍼가 내게 건넨 건 어떤 리스트였다.

“92번째 테라리움에 참가했다가 사망하거나 실종된 용병들의 이름과 보유 드라이어드들 정보입니다. 그쪽에서 이쪽으로 불들이 이동했다면 드라이어드를 삼킨 녀석들임이 분명하니 파악해두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해서요.”

“역시….”

그녀의 준비성에 고마워서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여기에도 임시 처소가 있을 거예요. 그들에게 같은 정보를 받아 오도록 하죠. 우리가 맞서 싸워야 할 불이 어떤 드라이어드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파악할 수만 있다면 상대하는 데 수월할 테니까요.”

물론 정확히 알 수는 없겠지만 드라이어드 목록을 외워 둔다면 참고할 수는 있으리라.

“우리가 그들을 전부 해치울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진 않아요. 우리의 주목표는 추가 전력이 올 때까지 시간 끌기입니다. 이대로 더 나빠지는 것만 막아 보기로 해요.”

다들 지옥 같은 풍경을 바라보며 단호히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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