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72화 (572/604)

사망 시 보상 수급 대상자

문득 서류 맨 마지막에 있는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내게 남은 가족은 동생뿐이라 그곳엔 동생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내가 없다면 누가 동생을….

“아냐, 약해지지 말자. 어차피 병원비를 마련하지 못해도 동생이 위험한 건 변하지 않아.”

참여 요청을 끝내며 동생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병원으로 향했다. 중증 화상 환자들만 모아 둔 병동은 절망만이 가득했다. 방문할 때마다 구슬프게 우는 울음소리가 매번 어디선가 들려왔다.

“다녀올게. 꼭 살아서 돌아올게.”

죽은 듯이 자고 있는 동생에게 답이 돌아오지 않는 인사를 건넨 후 92번째 테라리움으로 향했다.

마차에 합승한 드루이드들의 표정은 제각각이었지만 공통적으로 모두 어두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저 중엔 나처럼 울며 겨자 먹기로 가는 이들도 분명히 있겠지.

92번째 테라리움에 가까워지자 그동안 겪어 봤던 열기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엄청난 열기가 마차를 덮친다.

“정말 테라리움에 아직까지 살아 있는 사람이 남아 있긴 할까?”

누군가 두려움이 가득한 목소리로 창밖을 보며 말했다.

“드루이드님들, 여기서 내린 후 걸어가셔야 합니다. 마차는 더 들어갈 수 없습니다.”

열기를 느낀 마부가 황급히 드루이드들을 내려 주며 말했다. 우린 다들 오늘 처음 만난 사이였지만 살아서 보자는 인사를 한 후 뿔뿔이 흩어졌다.

의뢰서에 적힌 장소로 가니 간이 막사가 차려져 있었다.

“3일간 버티시고 내용 갱신하셔야 합니다. 맡으실 곳은 테라리움의 서쪽입니다. 무리는 하지 마세요. 목숨이 먼저입니다.”

의뢰서를 보여 주니 기계적인 목소리로 사무원이 의뢰의 본 내용을 안내해 줬다.

“지원이 오는 경우가 많습니까?”

“드루이드님처럼 개인적으로 참가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1번째 테라리움에서 행정 관리원들을 대상으로 의무 지원 정책을 발표했다고 하니, 어쩌면 테라리움 측에서 지원을 보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막 수립된 정책이라 허점이 많을 테니 큰 기대는 하시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어떤 테라리움이 위험을 무릅쓰고 첫 타자로 지원을 보내겠나요?”

그 말에 난 큰 기대를 접었다. 그저 3일만 버티자는 마음으로 테라리움의 서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딱 3일째 되는 날….

난 불에 둘러싸여 죽음만을 앞두게 되었다. 주변에서 전투 중이던 드루이드들이 부상당하거나 도망가서 균형이 무너진 바람에 삽시간에 내 곁으로 불이 몰려들었다.

“이대로 죽는구나….”

“드루이드님! 제가 끝까지 지키겠습니다.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내 드라이어드들이 안간힘을 쓰며 날 지키고 있었지만 그들도 이미 알고 있을 터였다. 이젠 끝이라는 걸.

간신히 버티던 이들이 한 그루 두 그루 쓰러진다. 병원에 남겨 둔 동생을 떠올리며 눈을 감으려던 그때였다.

“가이아 길드원분들은 베스탈리스분들과 팀을 맺어 주세요!”

어디선가 구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구출을 최우선으로!”

나 역시 지체 없이 드라이어드들과 함께 전투에 뛰어들었다.

궁지에 몰린 사람들에게 도망갈 길을 열어 주고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들을 부축해 옮겼다.

초기엔 용병들만으로도 방어전을 그럭저럭 잘 버텼을 것이다. 하지만 끝이 없는 전투에 두 손 두 발 다 들고 후퇴하는 자들이 늘어 상황은 갈수록 악화되었으리라.

멸망 수순을 밟았던 모든 테라리움들이 이런 아비규환을 목도했겠지.

끔찍한 건 이게 그나마 나아진 상황이었다는 거다. 그 전엔 얼마나 심각했을까?

세계의 위기는 갈수록 커진다.

게임으로 치자면 전체 난이도가 시간이 지날수록 상승하는 격이었다.

초보 드루이드들이 쉬운 난이도에서부터 차근차근 실력을 쌓아 올라가야 하는데, 세계는 기다려 줄 수 없었다.

초반에 이탈하는 드루이드들의 숫자가 매년, 아니 매달 늘어나고 있다는 소릴 들었다. 모험 의지가 꺾여 버린 자부터 시작해서 큰 부상과 죽음으로 다음 기회를 노릴 수 없게 된 자들까지.

어려워지면 어려워질수록 그만큼 실력이 좋은 드루이드가 많이 투입되어야 하는데 오히려 수는 줄어든다.

세계수는 드루이드들만으론 이 세계를 지킬 수 없었다.

“근방에 안전지대를 확보해 주세요. 대피소를 만들어야겠어요!”

부상자들을 안전히 테라리움 안으로 들여보내는 건 어려웠다. 실시간으로 공격을 받고 있는 테라리움에 더 이상 부담을 늘리는 건 좋지 않았다.

멀리 떨어진 곳에 임시 막사가 존재했지만 당장 움직일 수 없는 자들도 많았다. 이런 자들은 불행히도 불의 먹잇감이 될 확률이 높았다.

내 테라리움에 연락해 장소를 마련해 뒀으니 의료 지원을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그나마 가까운 60번째 테라리움에서부터 멀리 16번째 테라리움까지, 의료 전력을 최대한 차출하여 의료품과 함께 보냈다는 연락을 받았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드디어 살았다…!”

오도 가도 못 한 채 절망적인 표정을 짓던 사람들의 얼굴이 환해졌다.

이런 말을 해선 안 되지만 결코 이곳에 와선 안 되는 수준의 드루이드도 보였다. 도와주려는 마음은 대단했지만 저렙이 고렙 사냥터에 와서 뭘 할 수 있겠는가?

결국 실력이 떨어지는 드루이드까지 전쟁터에 내보내야 할 정도로 상황이 극에 치달았다는 거겠지.

하지만 여기서 전력들을 많이 잃게 된다면 앞으로는 어떻게 버티려고?

본래 1번째 테라리움이 이런 일들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의뢰 조건 규제를 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다. 행정 관리원들을 소집했던 그날, 모인 사람들에겐 의무 지원 정책에 대해서만 말했지만 그에 가려진 수많은 부가 정책들이 있었던 거겠지.

아마 내가 급하게 101번째 테라리움으로 향하지 않았다면 자리에 앉아 그 소식들을 접했을 것이다.

1번째 테라리움의 정책들은 세계가 반만 남은 시점부터 너무 급진적으로 변하고 있었다.

나는 어쩐지 우뚝 선 거대한 성의 보이지 않는 곳부터 작은 균열이 일어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믿기 어렵겠지만 상황이 나아지고 있어요. 다들 92번째 테라리움을 포기하는 방향으로 마음을 먹었는데….”

활발히 필드를 돌아다니고 돌아온 이리스가 내게 말했다.

“정말이에요. 이대로만 가면 테라리움을 안전히 보호할 수 있을 거예요. 지도상에서 92번째 테라리움이 사라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거죠.”

그녀는 한 구역의 전투에 집중하기보단 테라리움 주변의 상황을 두루 둘러보며 상황을 파악하는 데 집중했다. 내가 해야 할 일을 대신해 준 격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리스는 말을 고르려는 듯 잠시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

“축복의 균형이 돌아와서 방파제가 생긴 거라 볼 수 있어요. 그게 아니었다면 이만큼 전력이 투입되었어도 깨진 그릇에 계속 물을 붓는 격이었겠죠. 끝나지 않는 싸움에 모두 지쳐 갔을 거예요.”

“베스탈리스들은 잘 해내고 있나요?”

“적응력이 굉장히 빨라요. 태어날 때부터 전사 길을 걸었던 사람들이나 다름없어요. 의외로 체술이 뛰어난 분들도 많고.”

“베스탈리스의 능력을 본 사람들의 반응은요?”

“다들 처음엔 겁냈지만… 지금은 오랜 전투를 함께해 온 전우처럼 등을 맞대고 싸우고 있어요. 이게 믿어지시나요? 불을 다루는 자들과 드루이드가 하나가 되어 싸우고 있다고요!”

끝내 벅차오른 감정을 주체 못 한 이리스의 톤이 높아졌다.

“저 역시 적으로 만난 베스탈리스를 상대해 봤기에 편견이 있었던 건 사실이에요. 92번째 테라리움에 도착하기 전까지 끝까지 모든 의심을 지울 수 없었어요….”

물론 인페르노에서 파견한 적들과 싸울 때 나 역시 그 자리에 있었다. 전투를 겪게 된다면 적을 쉽게 원망하고 마니 편견이 생길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간과하고 있었어요. 드루이드들이 모두 착하지 않듯 베스탈리스들도 악인이 존재할 수 있는 건데. 중요한 건 본질을 봐야 한다는 거였죠. 우리 모두 삶을 지키고 싶다는 마음은 같다는 걸. 능력의 종류가 사람의 선악을 판별할 순 없는 건데….”

“세상은 바뀔 거예요. 변화를 따라갈 수 없다면 도태되는 수밖에. 베스탈리스의 새로운 진가를 사람들은 결국 받아들이게 될 거예요.”

그러기 위해선 이 90번대 테라리움 방어전이 아주 중요했다.

방어전에 성공해 베스탈리스의 새로운 능력을 널리 알려야 했다. 이 광경을 지켜본 모든 이들이 널리 널리 퍼뜨려야만 했다.

“곧바로 바뀌진 않겠지만 적어도 이번 일을 계기로 베스탈리스들을 위한 새로운 편이 생기겠죠.”

그동안 외면하고 손가락질하던 이들 중 조금이라도 생각을 바꾼다면.

작은 변화가 곧 시작이었다. 어떤 변화는 무언가를 무너뜨릴 거고, 어떤 변화는 무언가를 창조해 낼 것이다.

“다들 힘내 주길….”

부디 베스탈리스들이 끝까지 싸울 수 있기를 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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