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71화 (571/604)

의뢰를 모아 놓은 게시판은 아침부터 북적거렸다. 나처럼 소속된 길드가 없는 자들은 이렇게 일일이 의뢰 게시판을 찾아다녀야만 했다.

의뢰의 질로 등급을 매기자면 다음과 같았다.

과수원에서 배포하는 의뢰는 배포 직후 순식간에 동이 날 만큼 인기가 좋았다. 의뢰주의 신원 보장이 확실하고 난이도가 적절하며 보상이 아주 좋았기 때문이다.

의뢰를 성공적으로 완수하면 테라리움에 안면을 익혀 두기 좋고 가드너 등급도 오를 수 있으니, 어떻게 보자면 우리와 같은 무소속자들이 출세할 수 있는 유일한 경로라 볼 수 있었다.

다음은 대형 길드에서 배포하는 의뢰였다. 난이도는 높은 편이나 많은 경험을 쌓을 수 있고 무엇보다도 대형 길드로의 스카우트 길이 열려 있어, 특정 길드의 가입을 희망하는 사람들이 집착적으로 구는 경우가 많았다.

중소형 길드에서 배포하는 의뢰는 솔직히 말하자면 게으름 피우다 쓸 만한 의뢰를 모두 놓친 이들이 울며 겨자 먹기로 선택하는 것이었다. 자신의 길드만으론 해결할 능력이 떨어져 주로 머릿수 채우기용 의뢰를 많이 배포하는데 난이도는 장난 아니게 어려우면서 보수도 짰다.

더구나 제대로 된 위험 수당도 쳐주지 않고 의뢰비를 받아도 병원비나 수리비로 다 나가는 바람에 오히려 손해를 보는 경우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간이 엄청난 보상금이 걸리는 경우가 있어 복권 긁는 심정으로 의뢰 게시판을 들여다보곤 한다.

그 외에도 테라리움 주민들이 자체적으로 발행하는 의뢰나 드루이드 양성소에서 배포하는 의뢰가 있었는데 난이도가 무척 낮고 보수는 적거나 자원봉사를 요구하는 경우가 많았다.

주민들이 배포하는 의뢰는 잡일에 가까워 드루이드가 아니라도 수행하는 게 어렵지 않았고, 양성소에서 배포하는 의뢰는 주로 이제 막 모험을 시작하는 초보 드루이드의 멘토가 되어 주는 의뢰였다.

전투로 인해 큰 부상을 입어 재기가 불가능하거나 나이가 들어 이제 모험은 힘든 드루이드들이 주 수요자들이었다.

간혹 당첨된 복권 급의 보상을 내건 의뢰가 나오는데 의뢰주가 도망가는 경우도 심심찮게 발생해서 난 그쪽은 쳐다도 보지 않은 지 오래됐다.

“의뢰가 다 거기서 거기네.”

옆에서 나처럼 의뢰 게시판을 훑던 드루이드가 말했다. 그 말엔 나도 동의했다.

며칠 전부터 과수원은 물론 중소형 길드까지 내건 의뢰가 대부분 내용이 비슷했기 때문이다.

결국 지도상에서 사라진 마지막 세 자릿수 테라리움, 그건 드루이드들 사이에서 아주 핫한 이슈였다. 세계의 지도가 절반이 된 건 안타까운 일이지만 어차피 막을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 같은 개개인에겐 이로 인해 의뢰의 판도가 달라지는 게 더 중요했다.

“얀마, 진짜 거길 가려고?”

게시판을 가득 채운 의뢰서 중 하나를 집는데 어깨에 묵직한 팔이 걸쳐졌다. 어느새 다가온 친구 놈이 경악한 목소리로 물었다.

“거기 가면 목숨 내놓아야 해.”

“어쩔 수 없어. 병원비를 충당할 수 있는 의뢰가 이런 것밖에 없는걸.”

난 뜯어낸 의뢰서를 죽은 눈으로 바라봤다.

92번째 테라리움 사수 의뢰.

존경하는 드루이드 여러분. 하루가 멀다 하고 밀려 들어오는 불에 의해 92번째 테라리움 주민들의 생계가 위협받고 있습니다. 세계수의 축복을 받은 자로서 도의적으로 방어전에 참여해 주세요.

과수원은 참여하신 모든 분들께 마땅한 보상을 지불할 예정입니다.

- 참여 시 유언장이 필수로 요구되는 스페셜 등급의 난이도 의뢰입니다.

- 가정을 책임지는 분은 참여를 숙고해 주세요.

유언장이 필요한 의뢰, 그건 살아 돌아갈 확률이 아주 낮은 의뢰란 걸 뜻했다.

“보통 이런 의뢰는 참여 제한 조건에 드루이드의 능력이 걸리는데, 요즘은 그런 게 없네. 어지간히 인력이 없나 봐?”

내가 들고 있는 의뢰서를 뒤에서 함께 본 친구가 말했다.

“참여율이 떨어지니 제한을 자꾸 내리는 거지, 뭐. 요즘 90번대 테라리움 말고도 80번대 테라리움들도 뒷일을 고려해 기를 쓰고 드루이드들을 모으고 있으니까….”

“정말 세계가 망하려는 걸까?”

“망할 땐 망하더라도 난 병원비를 내야 해.”

의뢰서에 적힌 보상금은 어중간한 의뢰 네다섯 개를 해치운 것보다 많았다. 이번 의뢰를 성공하면 한 달 치 병원비를 마련할 수 있을 터였다.

난 심한 화상을 입고 입원한 동생을 떠올렸다. 동생도 나와 같이 드루이드였다. 태어날 때부터 능력을 보였던 나와 달리 평범하게 생활하다 뒤늦게 능력을 깨우친 후천성 드루이드. 형제가 전부 드루이드라는 걸 알게 되고 부모님들이 얼마나 기뻐했던가.

이 세계는 드루이드라는 이유만으로 먹고살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존재였다.

노력한다고 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고 오로지 운에 의해 결정되는 데다 수도 적어, 우릴 보고 부모님을 포함한 주변 사람들은 축복받은 존재라고 했다. 앞으로 축복받은 삶을 살게 될 거라고. 세계수의 축복을 받았으니 그 말이 맞긴 하지.

하지만 난 드루이드의 삶이 축복받은 삶이라는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드루이드가 된 동생은 처음부터 무척 의욕적으로 굴었다. 난 모아 둔 다이아를 털어 동생을 드루이드 양성소에 입소시켰고 하루빨리 졸업해 나와 함께 모험을 떠나는 나날들을 꿈꿨었다.

드디어 자신만의 드라이어드를 만나고 좋은 성적으로 졸업까지 한 동생은 우리 가족의 미래였다. 이미 어중간한 나의 실력에 한계를 느꼈던 탓에 동생은 대단한 인물이 될 수 있도록 열심히 서포트했다.

그래서 어렵게 입수한 대형 길드에서 발행한 의뢰를 동생에게 넘겼다. 그 일로 인해 우리 가족은 망가져 버렸다. 과거로 돌아간다면 그 의뢰를 차라리 내가 수행할 걸 하면서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거대한 불을 토벌하러 가는 의뢰였다. 토벌 전투에 직접적으로 가담하는 건 대형 길드의 전력들이고 동생은 서포트로 들어갔다. 지원 물자를 나르고 부상 입은 자들을 돕고, 주변에 몰려드는 조무래기 불을 처리하는 수준의 어찌 보면 적당한 난이도의 의뢰였다.

하지만 생각보다 토벌하려던 불의 전투력이 너무 높았다. 이전에 근처를 지나던 드루이드 파티를 통째로 전멸시켜 상당히 많은 드라이어드를 집어삼켰다는 최신 정보가 업데이트되지 않았었다.

그러잖아도 몸집이 거대해 까다로운데 드라이어드의 수많은 특수 능력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데다 전투 도중 끊임없이 생태계 최강자를 모방하는 습성으로 진화까지 하니, 아무리 대형 길드라 하더라도 피해가 커졌다.

결국 그들은 후퇴를 감행했는데 좋지 않은 대처와 후방 부대로의 느린 소식 전달로 인해 2차 피해가 발생했다. 동생은 그곳에서 불의 피해를 받아 드라이어드를 잃었을 뿐만 아니라 전신에 큰 화상을 입어 다시는 모험을 할 수 없는 몸이 되었다.

이 세계는 끊임없이 불의 위협을 받고 있기 때문에 화상 치료 시설이 매우 잘되어 있지만, 동생이 입은 화상은 겨우 목숨만 붙들어 놓은 수준이라 오랜 병원 신세를 지내야만 했다. 더 좋은 치료를 받기 위해선 연금탑이 함께 운영하는 병원으로 옮겨야 하는데, 당장 한 자릿수 테라리움의 병원비를 감당하는 것도 힘들었다.

동생을 살리기 위해 그동안 내가 의뢰로 모아 뒀던 다이아를 모두 털어야만 했고, 원래 몸담고 있던 길드에서 여러 번 빌린 다이아를 갚지 못해 제명까지 되었다. 연로하신 부모님들마저 다시 일터에 뛰어드셨다가 결국 생활고를 이겨 내지 못하고 이혼하신 후 형제만 남겨둔 채 고향으로 떠나셨다.

우릴 보고 축복받은 존재라고 하셨지만 이젠 축복은커녕 짐덩이라고 여기신 거겠지.

그렇게 동생의 병원비는 나 혼자 감당하게 되었다. 온갖 궂은 의뢰는 가리지 않고 뛰었다. 생명 수당을 높게 주는 의뢰라면 망설이지 않고 수락했다. 유언장은 하도 많이 써서 내용을 외우고 있을 정도였다.

그러니 지금 내가 많은 다이아를 주는 92번째 테라리움의 의뢰를 수락하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거기 갔다가 도망쳐 온 드루이드들이 많대. 전투가 끝이 없다고 했어. 중간에 도망치면 보상도 제대로 주지 않는다고 하고.”

내가 들고 있는 의뢰서를 알아본 다른 드루이드가 슬쩍 끼어든다.

“이봐요. 거길 가시려고요? 거긴 지옥이나 다름없다던데. 대형 길드도 자기 길드원들을 파견하지 않고 의뢰 대행을 쓰는 걸 보면 뻔하지 않겠어요? 우리 같은 드루이드는 갔다가 재만 된다고요.”

92번째 테라리움으로 향하는 의뢰는 많은 드루이드들의 기피 의뢰였다. 물론 아쉬울 것 없는 평범한 드루이드들에겐 말이다. 결국 나와 같은 절박한 드루이드들은 이 의뢰에 혹할 수밖에 없었다.

“진짜 가게?”

“말했잖아. 난 가릴 처지가 아니라고.”

어차피 계속 여기 머물러 있어봤자 좋은 소리는 못 듣는다. 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의뢰서를 들고 접수처로 향했다. 이미 유언장은 여러 장 만들어 들고 다니고 있기 때문에 접수가 빨랐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