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70화 (570/604)

새로운 힘을 오랜 시간을 들여 연습할 필요는 없었다.

드라이어드와 합을 맞춰 보고 그 능력을 공부해야 하는 드루이드와 달리 베스탈리스는 태어날 때부터 다룰 줄 알았던 불을 늘 해 왔던 대로 사용하면 됐기 때문이다.

92번째 테라리움으로 향하는 마차의 행렬이 길게 이어졌고 이는 필연적으로 불의 어그로를 끌었다. 하지만 이전과 달리 드루이드의 전적인 호위를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불과 전투가 벌어지자 모든 마차에서 베스탈리스들이 뛰어나와 서로 힘을 시험해 보기 위해 아우성이었다.

“내가 먼저야!”

“저놈은 내가 찜했어!”

“그냥 다 때려 부수면 되는 거 맞죠? 그럼 이득인 거죠?”

“어어… 내가 먼저 잡으려고 했는데!”

베스탈리스라고 모두 불의 힘이 똑같은 건 아니었고 그중 특출난 능력을 보이는 이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작정하고 힘을 사용하면 가히 스페셜 등급 드라이어드 급의 파괴력을 보여 줬다.

“전투 소강 시간이 굉장히 빨라졌어….”

이를 지켜보고 있던 이리스가 감탄하며 말했다. 그들의 엄청난 열정에 감히 드루이드가 낄 틈은 보이지 않았다.

“마스터, 이 정도 화력이면… 90번대 테라리움을 구조하는 건 완전 쉬운 일이겠는걸요.”

“제 생각도 그래요. 개개인의 전투력이 뛰어나서 고립의 위험도 없겠어요. 드루이드의 전투는 기본적으로 드루이드의 안전이 최우선시되는데 이들은 그럴 필요성이 낮잖아요? 여기서 협동 플레이만 잘 다듬어진다면….”

베스탈리스들이 처음 불의 전투를 맞닥뜨렸던 순간이 떠올랐다.

처음이다 보니 스스로의 힘에 자신감이 많이 없었기에 불과 마주하기를 겁냈다. 기존엔 보호받는 게 당연했기 때문에 틀을 깨고 나서는 데엔 많은 용기가 필요할 터였다.

그런데 보란 듯이 뛰쳐나와 불을 휩쓸고 다니는 에트나를 비롯한 선발대들을 보고 그들은 용기를 얻었고, 마침내 하나둘 불안한 얼굴로 마차에서 내려 능력을 시전해 보았다.

시험 삼아 써 본 능력이었겠지만 불을 상대로 엄청난 효과를 내자 다들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불로 불을 잡는 게 정말 가능한 일일 줄은 몰랐다는 듯이.

한 번만 더 시도해 보자, 내가 잘못 본 게 아닐까. 그런 식으로 몇 번 더 불을 상대해 본 이들이 종래엔 흐름을 타서 지금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우리들은 베스탈리스가 능력 사용에 익숙하지 않아 쩔쩔매는 것 외에 불을 직접 마주했을 때 두려움과 부담감에 시달릴 것을 걱정했었다.

초보 드루이드도 드라이어드와 함께 첫 전투를 나설 때 크게 긴장한다. 모든 전투가 성공적인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첫 전투가 곧 마지막 전투가 되는 경우도 허다했다.

공부와 훈련을 통해 배웠던 것과 실전은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초보 드루이드들끼리 모여 파티를 이뤄 모험을 떠나는 경우가 보편적이었다.

하지만 베스탈리스들은 이 시작 단계의 적응이 무척이나 빨랐다. 오히려 물 만난 물고기처럼 전투를 즐기고 있었다.

초보 드루이드를 억누르는 부담감이 불을 해치울 수 있는 건 드라이어드뿐이라는 사명감으로부터 오는 무게라면, 베스탈리스들에겐 그런 사명감이 없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베스탈리스에게 불과의 전투는 곧 새로운 기회이자 해방의 수단이었기에 그저 즐겁고 기쁠 따름이었다.

우리는 빠른 전투를 반복하며 거침없이 92번째 테라리움을 향해 나아갔다.

그런데 잘 가던 마차가 속도를 줄이더니 도중 멈춰 섰다. 막 활개 치고 다니던 불들을 정리했기에 곧바로 습격이 올 확률이 낮았기에 의아했다.

똑똑, 누군가 마차 문을 두드렸다.

“잠시만요, 마스터님. 보고 드릴 게 있습니다.”

가장 후방에 있던 내 마차에 찾아온 건 선두 마차에 있던 길드원이었다. 베스탈리스 호위를 위해 28번째 테라리움의 교습소에서 차출된 이였다.

“91번째 테라리움으로 향하는 마차와 마주하게 되어 보고 드립니다.”

“91번째로 간다고요?”

에트나가 모은 베스탈리스는 모두 이 마차 행렬 안에 있었다. 그런데 이제서야 가는 마차라니?

“설마 스텔라가 데려오는 무리일까?”

난 마차에서 내려 선두로 향했다.

“어?”

역행하는 마차를 호위하는 드루이드들의 얼굴이 익숙했다. 우리 길드원들이었다.

“안녕하세요, 마스터. 이 마차는 후발대입니다. 너무 늦었을까요?”

“어머….”

마차가 멈춘 것이 의아해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상황을 살피던 에트나가 탄성을 내뱉었다. 그러곤 황급히 마차에서 내려 내 곁으로 왔다.

“더 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 결국 와 줬네요.”

그녀는 마차 안에 있는 이들의 얼굴을 확인하곤 감동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는 건… 아마도 에트나가 포섭하러 다녔던 온건파 베스탈리스들이란 뜻일 터다.

“많은 고민이 필요했겠지요. 그러다 결국 참여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기에 뒤늦게라도 와 준 거예요.”

비록 약속 시간에 맞춰 모이지는 못했지만 결국 늦게라도 와 준 이들이었다.

“어떻게 할까요?”

후발대를 호위하고 있던 길드원이 물었다.

“안내를 해 줄 인력을 따로 나눠야 할 것 같아요. 저흰 91번째 테라리움에서의 볼일을 끝내고 전투를 위해 가고 있던 중이라 모두가 돌아가기엔 비효율적이에요.”

“포르낙스를 데려가세요.”

에트나가 말했다.

“저들을 위해 설명해 줄 사람이 필요할 거예요.”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베스탈리스들에게 새로운 가지와 가지 밑에 고인 샘, 물방울 열매에 대해 설명해 줄 이가 필요했다. 이 모든 이들을 지휘해야 할 내가 가는 건 맞지 않았기에 대신할 베스탈리스를 보내는 게 맞았다.

“91번째 테라리움에 도착해서 해야 할 일이 있어요. 그 일들을 설명해 줄 사람을 차출해서 함께 보낼게요. 포르낙스 혼자 보내는 것보단 좀 더 같이 보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언니, 나도 갈게!”

멀리서 이를 지켜보고 있던 로웰라가 손을 흔들며 말했다.

그렇게 가장 후방에 있는 마차의 머리를 돌려 안내를 위한 인원을 추려 태운 후 후발대가 탄 마차와 함께 보냈다. 인원 배치가 바뀌다 보니 난 에트나의 마차에 함께 타게 되었다.

그녀는 아직도 뒤늦게라도 와 준 베스탈리스들에게 받은 감동의 여운이 가시지 않는지 촉촉해진 눈으로 날 바라봤다.

“모두가 저희와 같이 새로운 미래에 대해 수긍했던 건 아니랍니다. 어떤 이들에겐 현실을 집중하는 게 가장 최선일 테니까요. 변화를 겁내는 이들이 많았어요. 세상의 관심을 사는 걸 원치 않는 이들이 대부분이었죠.”

그녀는 여기 모인 베스탈리스들이 자신이 설득하러 찾아갔던 인원의 반도 되지 않는다는 놀라운 말을 했다.

“오지 않겠다는 이들을 탓할 마음은 전혀 없었습니다. 세상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으니 어쩌겠어요. 그래서 모여준 이들만으로 그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결과를 보여 줘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이렇게 늦게나마 와 줬네요.”

“정말 수고 많으셨어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모아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아뇨, 당연히 해야 했던 일인걸요. 오히려 제가 더 당신에게 감사하고 있어요.”

에트나에게선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강한 신뢰가 느껴졌다.

멈췄던 마차가 다시 출발했다. 오래지 않아 강한 열기와 전투의 소란스러움이 느껴졌다.

비로소 전장에 도달했다.

갑작스러운 마차 행렬의 등장에 그곳에 있던 모든 이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전투 중이던 드루이드와 드라이어드도, 먹잇감을 찾기 위해 어슬렁거리던 불도.

이전에 지나쳐 오며 살폈던 92번째 테라리움의 모습과는 조금 다른 점이 있었다.

불의 기세가 많이 사그라져 있었다.

101번째와 91번째 테라리움에 새로운 축복의 균형이 생기며 92번째 테라리움의 안전도가 급격히 상승한 덕이었다.

마차가 멈추자마자 사람들이 뛰쳐나가며 곧바로 전투에 투입했다. 그들에게 망설임은 존재하지 않았다.

“먼저 내릴게요!”

이리스가 황급히 마차에서 내리며 소리쳤다.

“드라이어드와의 전투 경험이 있는 불이에요! 경험없이 맞서기엔 어려움이 따를 테니 저희의 지시를 따라 주세요!”

“가이아 길드원분들은 베스탈리스분들과 팀을 맺어 주세요!”

길드원들이 임시로 베스탈리스들을 갈라 팀을 이루곤 가장 수세가 열악한 부분을 공략하러 나섰다. 그들은 투입되자마자 불에 둘러싸여 위급했던 드루이드를 구해 냈다.

“사상자가 발생했을 수도 있습니다. 드라이어드를 삼킨 불이 있을 수 있으니 전투에 주의해 주세요!”

“드루이드가 보유한 방어형 드라이어드를 먼저 파악하세요! 위급한 순간, 가장 먼저 대피처로 찾아야 할 곳이 바로 방어형 드라이어드의 뒤입니다!”

이리스 파티를 제외하면 모든 길드원들은 드루이드 교습소 출신이었다. 초보 드루이드를 가르쳤던 자들이기에 경험으로만 따지면 그와 같은 수준인 베스탈리스들을 이끄는 데 아주 적합할 터였다.

이리스가 빠르게 행동한 건 아주 잘한 일이었다.

이전까지 마차의 이동을 방해하던 불은 비교적 단순한 공격을 하기 때문에 경험 쌓기용으로 좋았으나, 드라이어드와 전투 경험이 있는 불은 달랐다.

불은 생태계 최강자의 모습을 흉내낸다. 더구나 드라이어드를 삼킨 불이 있을 경우 그 드라이어드의 특수 능력까지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대단히 위험했다.

여태 불을 제대로 상대해 본 적 없는 베스탈리스들에겐 이를 대처할 능력이 전혀 없는 거나 다름없었다.

불을 상대로 불을 사용하는 베스탈리스들의 등장에 앞서 92번째 테라리움의 방어전을 치르고 있던 사람들이 경악했다.

베스탈리스를 적이라고 생각했는지 도망가는 이도 있었고 경계하는 이도 있었다.

인페르노에 의해 불을 다루는 자에 대한 악명이 높아졌기 때문에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이해가 갔다.

하지만 길드원들과 협심하여 위기에 빠진 이들을 구하고 전장을 종횡무진하며 일당백을 하고 있으니 그 평가가 급속도로 달라지는 게 보였다.

적의 적은 아군, 마침내 베스탈리스들이 지원군임을 깨달은 드루이드들의 사기가 엄청나게 올라갔다.

테라리움의 상황은 결코 좋다고 볼 수 없었다. 101번째 테라리움이 무너지자마자 우르르 몰려든 불에 의해 외벽은 진작 손상을 입어 제구실을 못하고 있었다.

사명감이 가득한 드루이드라도 제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테라리움을 지킬 이유는 없기 때문에, 상황이 심각해지면 쉽게 후퇴했다. 그러니 최전방이 제대로 유지될 리 만무했다.

승리라 부를 수 없는 전투가 계속되고 지쳐 있던 와중에 갑자기 불의 기세가 누그러지며 지원군이 도착했다. 그러니 모두가 얼마나 이를 기쁘게 받아들이겠는가.

드디어 달라진 베스탈리스의 첫 데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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