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69화 (569/604)

물의 정령 나이아드라….

세계수의 사도를 식물의 정령 드라이어드라 부르니 어찌 보면 자연스럽게 언급될 수 있는 이름이었지만, 따지고 보면 난쟁이들은 속성상 물의 정령이라기보단 땅의 정령에 가깝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이름도 나름대로 나쁘진 않다고 생각했다.

나처럼 저들도 정령들을 고작 난쟁이라고 부를 순 없는 노릇이니까.

모두에게 설명을 끝낸 에트나는 기대하는 눈으로 날 바라봤다.

“저 대신 잘 설명해 주셔서 감사해요.”

내 말에 그녀는 살풋 웃어 보였다.

“여기까지 오셨다는 건 어느 정도 기본 설명은 들은 거라고 생각하겠습니다. 이를테면 베스탈리스의 새로운 힘이라든가 말이죠.”

모두가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본다.

수가 무척 많아 처음엔 걱정이 컸다. 한 명 한 명 영혼을 정화하기엔 너무 많은 시간이 들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나의 걱정을 알아차리기라도 한듯 가지가 선뜻 해결책을 내놓았다.

물방울 열매 안에서 해맑은 얼굴로 우릴 기다리고 있는 난쟁이들, 내가 일일이 폰을 꺼내 매칭시켜 줄 필요 없이 사람들이 각자 열매를 따서 매칭하면 될 것 같았다.

마치 드루이드가 드라이어드 열매를 얻는 것처럼 말이다.

“오오…!”

모두가 내게 조용히 집중하던 와중에 무리의 뒤쪽에서 분위기를 깨는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 바람에 다들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물이 모여 샘이 생긴 곳에 누군가 무릎을 꿇고 앉아 황홀경에 찬 표정을 짓고 있었다. 둥글게 포개진 두 손이 축축했다. 아무래도 손으로 물을 퍼 올린 듯했다.

사람이 많으면 그중 한 명쯤은 별난 행동을 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뭘 하시는 건가요?”

에트나가 조금은 날이 선 목소리로 물었다.

샘 근처에 있던 남자가 비틀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보니 입가도 촉촉했다.

“물을 마셨어요. 말릴 새도 없이….”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이가 그가 한 행동에 대해 증언했다.

물을 마셨다고?

물방울이 모여 만든 샘은 무척 맑고 깨끗해 보였지만, 잔해 더미 안에 고여 있던 터라 선뜻 손을 대기 어렵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저게 그들이 말하는 미미르의 샘과 같은 기운이 뿜는 물이라 할지라도 미지의 것에 대한 경계가 있을 법도 한데, 대뜸 그걸 마셨다니….

물론 이 행동이 나쁜 건 아니기에 탓할 거리는 없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이 상황에 집중하지 못하고 돌발 행동한 그를 좋게 보지 않고 있었다.

“굉장합니다… 이게 바로….”

에트나가 그에게 뭐라고 한마디 하려던 순간이었다.

“잠시만요.”

난 그녀를 가볍게 제지했다. 물을 마셨다는 이에게서 검은빛의 오라가 퍼지는 걸 발견했기 때문이다.

사아아….

불씨가 남은 장작에 물을 끼얹었을 때와 같이 수증기가 피어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오….”

난 물을 마셨다는 남자의 영혼이 정화되어 가는 걸 느꼈다. 내가 직접 접촉해 영혼을 살필 필요 없이, 불에 의해 만신창이가 됐던 영혼이 물을 마신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치유되고 있었다.

마치 포션을 마신 것처럼 말이다.

“이런 게 가능할 거라곤 생각 못 했는데.”

홀가분한 느낌이 들었다. 내가 안고 있던 베스탈리스에 대한 고민이 대부분 해결됐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본래는 제가 여러분들을 한 분 한 분 찾아뵈어 영혼을 정화하는 작업을 해야만 했는데….”

난쟁이 문제가 해결되더라도 베스탈리스의 상처받은 영혼을 정화하는 건 다른 문제였다. 그건 내 도움이 반드시 필요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가지에서 성수처럼 새어 나온 샘물이 치료제 역할을 해 주는 걸 확인했다.

누군가의 돌발 행동으로 인한 우연에 가까운 발견이었지만 미리 알게 되어 다행이었다.

“어쩌면 이 물을 마시는 걸로 그 과정이 생략될 수 있겠네요.”

내 머릿속에 벌써 이곳이 완전한 과수원의 모습을 갖췄을 때의 구조가 떠올랐다. 물론 일반적으로 알려진 과수원과는 다른 형태를 취해야 할 것이다.

베스탈리스라면 쉽게 가지와 샘물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할 테니.

“물을 마시면 된다는 건가요?”

“네. 거기 그분. 어떠신가요? 몸은 괜찮으신가요?”

“시원한 기운이 몸 안에 감돌며 날뛰던 화기를 모두 잠재우는 기분이었습니다. 몸이 놀랄 만큼 개운하고 활력이 넘치는군요!”

돌발 행동에 대한 부끄러움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자신에게 시선이 집중되든 말든 오로지 제 몸에 일어난 변화만 신경 쓸 뿐이었다.

“그럼 다들 저 샘의 물을 마시도록 해요.”

“하지만 미미르의 샘은 아이를 낳기 전에 마시는 물이 아닌가요?”

누군가 손을 들어 질문했다. 베스탈리스들이 알고 있는 미미르의 샘의 기능은 그러할 테니 주저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더구나 전에 듣기론 미미르의 샘은 가문들이 숨기고 특별히 관리할 만큼 엄청난 보물 취급을 받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 면에서 접근을 겁내는 부분도 느껴졌다.

“샘과 같은 기운을 가지고 있으나 보편적으로 알려진 기능과 다른 기능을 갖고 있는 게 분명해요.”

에트나는 전적으로 날 믿고 있었다. 내가 뭘 하든 전부 믿겠다는 의지가 느껴져 조금은 당황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론 무척 고마웠다.

이미 정화를 끝냈기에 굳이 물을 마실 필요 없는 에트나가 먼저 물을 한 모금 삼켰다.

“그때와 같은 기분이군요. 이 물은 완벽히 당신이 할 일을 대신해 주고 있어요.”

에트나가 확인하며 샘의 효능이 확실시되었다.

몇몇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 용기를 내어 샘에 다가가자 뒤늦게 다른 이들도 그 뒤를 따랐다. 많은 이들이 저마다 컵과 손으로 물을 떠다 마시는데도 샘의 물은 줄어들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새 모든 베스탈리스들이 검은빛의 오라에 휩싸이게 되었다. 다들 무척이나 황홀한 표정을 지으며 제 몸 곳곳을 살폈다. 제 손에 불을 피워 내고 멍하니 이를 관찰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 자리에 있는 수많은 베스탈리스들이 순식간에 영혼 정화의 과정을 거쳤다. 그렇다는 건, 내가 없어도 앞으로 이곳에 찾아올 베스탈리스들이 스스로 정화 과정을 진행할 수 있다는 걸 뜻했다.

수많은 테라리움의 과수원처럼 말이다.

“이건…?”

변화는 더 있었다.

사람들의 손목에 드루이드의 테라리움 아티팩트와 같은 팔찌가 생겨났다. 앞으로 난쟁이들이 거주할 반구형 아티팩트였다.

“다들 준비가 되었군요.”

미리 나와 함께 난쟁이를 받아들인 이들이 그 모습을 보며 크게 기뻐했다.

아티팩트까지 생겼으니 다음에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바로 난쟁이들과의 매칭이었다.

“이런 건 드루이드들이나 하는 줄 알았는데….”

누군가 아직도 이 상황이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것처럼 이야기했다. 그러면서도 하나같이 가지에 매달린 물방울 열매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난쟁이들은 간택받기 위해 물방울 안에서 열심히 자신을 어필하고 있었다. 난쟁이들의 즐거움에 가득 찬 웃음소리는 나에게만 들렸고, 다른 이들은 그 안에서 열심히 발버둥 치는 모습만 볼 수 있었다.

열매를 개화하기 전까진 어떤 드라이어드가 나올지 알 수 없는 드라이어드 열매와 달리, 물방울 열매는 어떤 난쟁이를 뽑을 수 있을지 대략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음, 저 나이아드가 좀 더 활발해 보이는데.”

“생긴 게 똘똘하군.”

“귀여워라…. 꼭 하나만 골라야 하는 건가요? 다 데리고 가고 싶다.”

“어머, 저 나이아드 좀 봐. 곡괭이를 돌리며 묘기를 부리고 있어.”

다들 마음이 가는 난쟁이가 있는지 물방울 열매 아래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제희 님, 전 아직도 이 상황을 이해하기 힘드네요.”

베스탈리스들이 열매 구경에 한창인 와중에 이리스가 내게 다가와 말했다.

“겉모습만 보면… 우리들이 과수원에 있을 때와 다를 바 없어 보여요.”

이리스가 아련한 눈으로 그들을 지켜보며 약하게 미소 지었다.

“정말 베스탈리스들과의 거리감이 많이 줄어든 기분이에요. 정말 신기하네요.”

“전 마스터가 우리와 같은 사람이 정말 맞는지 궁금합니다.”

제퍼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떤 것 같아요?”

“뭐가 됐든 마스터가 가이아 길드의 마스터라는 건 변하지 않습니다. 헤헤.”

아부성이 짙은 멘트로 맞추는 제퍼. 한편 헤르마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슬쩍 시선을 피했고 노토스는 어딘가 거리감이 느껴졌다.

“언니, 나도 하나 가져도 돼? 드루이드도 나이아드를 얻을 수 있어? 잘 보살펴 줄 수 있는데!”

마치 갖고 싶은 장난감을 눈앞에 둔 아이처럼 로웰라가 해맑게 물었다.

“글쎄. 그건 생각해 본 적 없는데.”

“하나만. 응? 딱 하나만.”

“네가 가진 아티팩트는… 안 될 것 같긴 한데. 그럼 하나 따 봐.”

“오예!”

사실 궁금하기도 했다. 베스탈리스가 아닌 드루이드가 물방울 열매를 따면 어떻게 될지, 난쟁이들이 드루이드에게도 반응해 줄지 궁금해졌다.

허락이 떨어지자 로웰라는 가지를 향해 깡충깡충 뛰어갔다. 그러곤 미리 봐 둔 열매가 있는지 주저 없이 손을 뻗었고….

팡!

“앗…!”

로웰라가 딴 열매는 비눗방울처럼 터져 버렸다.

베스탈리스 중에는 손 빠르게 이미 열매를 손에 넣은 자들도 있었는데, 그들 손안에 있는 물방울 열매는 가지와 떨어져도 제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로웰라의 손에 닿자 터져 버린 열매를 보고 다들 당황한 얼굴을 했다.

“드루이드는 안 되는구나….”

“으아… 아쉬워.”

로웰라는 축축해진 손을 털며 울상을 지었다.

물방울이 터졌어도 걱정은 되지 않는다. 난쟁이들이 물방울 안에 있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물방울은 단순히 무한 다이아를 투영해 주는 매개체에 지나지 않았다.

로웰라가 열매를 땄던 자리에 다시 새로운 물방울 열매가 맺히는 걸 봤다.

“이 가지는 수확제를 기다릴 필요가 따로 없겠네.”

매년 열매가 맺히는 시기가 존재하는 세계수 가지와 달리, 이 가지엔 사시사철 물방울 열매가 가득 맺혀 있을 터였다.

“저 열매를 땄는데 이제 어떻게 하면 되나요?”

고민을 끝낸 사람들이 속속들이 열매를 하나씩 손에 들고 날 바라봤다.

“한번 교감을 해 보시겠어요?”

나 역시 모든 과정이 처음이었기에 명쾌한 해답을 줄 순 없었다. 하지만 이 열매가 드라이어드 열매와 같이 서로를 연결해 주는 역할을 한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교감이었다.

“교감이란 건 어떻게 하나요?”

“먼저 인사를 건네는 거죠. 겁내지 않도록. 세상 밖으로 나오는 걸 환영해 주는 거예요.”

난 드라이어드 열매를 개화시킬 때를 떠올리며 그 순간에 대해 사람들에게 설명했다.

내 말에 따라 다들 물방울 열매를 두 손으로 조심히 감싸고 눈을 감았다.

아주 약간의 시간이 지나자 반응이 나타났다.

“와아!”

“나를 뽑아 줘서 고마워요!”

“제가 선택될 줄 알았어요!”

물방울 열매에서 난쟁이들이 뿅 하고 튀어 올랐다. 마치 내 폰 화면을 뚫고 튀어나오듯 말이다.

곧이어 난쟁이들이 와글와글 떠드는 소리가 공간을 가득 채웠다.

베스탈리스들은 자신이 뽑은 난쟁이들에게 무척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애정이 가득한 시선으로 작은 생명체들이 제 손에서 뛰어노는 모습을 지켜봤다.

“이제 베스탈리스의 새로운 힘을 선보일 준비가 모두 끝난 것 같네요.”

드디어 불이 습격한 90번대 테라리움을 사수하러 떠날 때였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