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68화 (568/604)

91번째 테라리움에 새로운 가지를 만듦으로써 난 느꼈다.

내가 이 세계에 완전히 동화되어 가고 있는 듯한 기분을.

<테라리움 어드벤처> 세계로 넘어온 후 난 이방인이라는 생각을 항상 느껴왔다. 내겐 내가 태어난 곳이자 본 생활이 있는 돌아갈 세계가 있고, 이 세계는 새로운 곳을 돌아다니는 여행자일 뿐이란 걸 항상 의식해 왔다.

영혼의 고향이 이곳이라 하더라도 살아온 삶을 무시할 순 없으니까.

물론 이곳이 게임 속 세상이라 강하게 믿던 제이 시절에 비하면 덜했지만. 그땐 세계수가 내 의식에 계속 간섭해 왔던 것 같기도 하고.

내 존재는 항상 어딘가 붕 뜬 기분이었다.

평범하지 않은 업적들이 그 기분을 강하게 느끼도록 힘을 실었고, 알면 알수록 새로운 이 세계의 상식들이 지속적으로 내게 넌 다르다고 선언하는 듯했다.

그래서 내가 이 세계의 존재들에게 강한 애정을 느끼는 게, 한편으론 이러한 이질적인 감각을 애써 무시하기 위한 저항력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두 번째 가지에 의해 그동안 무의식의 깊은 곳에 꼭꼭 숨어 있던 생각이 확연하게 떠올랐다.

난 이 세계를 비로소 무척이나 익숙하고 편안한 곳으로, 본래 세계처럼 인식하게 되었다.

“후우우….”

가지가 자리 잡은 땅의 지식을 무한대로 흡수해 내게 전하고 있었다. 하나일 땐 느끼지 못했던 걸 두 개로 늘리자 지식이 넘치다 못해 범람하는 기분이었다. 그건 앞을 보지 못했던 내가 비로소 개안한 듯한 감각과 같았다.

자연 발생한 드라이어드들이 뿌리를 내린 땅으로부터 이치에 대해 배우고 그곳에서 나고 자랐던 선조들의 지식을 흡수한다고 했던가.

어쩌면 지금 내가 겪고 있는 과정이 그 과정과 매우 비슷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지가 관장하는 대지가 느껴진다. 이 좁은 과수원을 벗어나 테라리움 전체로, 테라리움을 넘어 축복이 끼치는 구역까지.

그걸 느꼈을 때, 가지 안에서 웅크리고 있던 넘치는 생명의 기운이 폭발하듯 터지며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그곳에 서 있는 사람들을 거센 바람처럼 훑고 지나 널리 널리 나아갔다.

휘이이이잉.

내 모든 감각이 그 기운에 실려 있는 것처럼 스쳐 지나가는 모든 것들이 머릿속에 들어온다.

기운이 드라이어드와 대치 중인 불과 맞닥뜨리자 단숨에 꺼뜨려 버린다. 더 나아가 호시탐탐 테라리움을 노리는 모든 불을 해일처럼 휩쓸어 버리고 이 지대를 생명이 살아가기에 더없이 안전한 지대로 만든다.

“흐읍….”

난 경이로운 감각에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놀라서 크게 숨을 들이켰다.

가지에 손을 대고 있는 것만으로도 가지가 영향을 끼치는 모든 땅을 한눈에 들여다볼 수 있었다. 마치 그 자리에 서 있는 것과 같은 생생함이 느껴졌다.

내가 아티팩트를 통해 테라리움을 들여다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감각이었다.

지금이라면 세계를 굽어본다는 세계수를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아니, 난 세계수를 이해하고 있었다.

지금의 난 현재를 넘어 과거, 땅이 간직한 기억까지 내다볼 수 있을 정도였다. 어쩌면 이건 땅의 기억을 읽어 내는 소나무 드라이어드와 같은 능력일지도 모르겠다.

아주 자세하고 정확하게 알 수 있는 건 아니더라도 과거 땅이 어떤 기운을 가졌는지 바로 그때 그 자리에 서 있었던 것처럼 느껴진다.

어쩐지 더 엿봐선 안 될 것 같은 경외감이 드는 영역이었다. 두려움에 몸을 떨자 거부감을 알아차린 것처럼 과거의 기운들이 차분히 땅 아래로 가라앉는다. 땅이 마치 내 의사를 존중하는 것처럼 말이다.

한 꺼풀 덮자 다시 현재가 떠오른다.

현재 흐르는 지맥이 보이고 막혀 있는 곳이 보이고 화기로 탄 곳이 보이고….

게임으로 치자면 관리자 모드를 실행하여 맵의 모든 것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것과 같았다.

불에 그을려 뜨겁게 타오른 땅이 내게 무언가를 원하고 있었다. 그래서 차갑게 식혀 줄 수만 있다면 식혀 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 순간….

투둑… 투둑… 툭.

지면을 두드리는 빗방울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점차 거세져 어느새 테라리움 주변에 한바탕 소나기가 쏟아졌다.

60번째 테라리움을 손에 넣고 사용할 수 있게 된 가드닝 능력은 날씨 조절이었다. 그때 능력을 사용했을 때와 지금의 느낌은 완전히 달랐다.

정말… 마음먹은 대로 다룰 수 있었다. 아니, 마음을 먹자마자 곧바로 반응했다. 이건 가드닝 스킬을 훨씬 웃도는 신의 권능을 손에 넣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걸 좋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오히려 너무 전능한 힘에 두려움이 일었다.

난 대체 무슨 힘을 일깨운 거지? 이제 난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거지?

내가 아닌 세계수와 같이 세계의 일부가 되어 가는 기분이 강하게 들었다.

“엄청나….”

“이건 대체….”

“이곳에선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가요?”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천천히 감각이 현실로 돌아온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너무 많은 신기한 경험과 맞닥뜨려서 어느 포인트에서 더 크게 놀라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했다.

세계수의 가지를 닮았으나 다른 가지가 생겨나고 그것이 불을 몰아내고 종래엔 기다렸다는 듯이 시원한 비가 내리는 광경.

뚝. 뚝. 뚝.

가지의 매끄러운 표면을 타고 푸른 기운이 담긴 물방울이 흘러내렸다. 물방울은 가지 바로 아래에 모여 삽시간에 웅덩이를 이뤘다.

웅덩이는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얼굴이 비칠 정도로 거울처럼 맑았다.

꺄르르….

천진난만한 웃음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아주 익숙한 웃음소리에 나는 웅덩이를 보던 걸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맺히기 무섭게 떨어지던 물방울들이 떨어지는 걸 멈추고 잔가지 끝에 꽃눈처럼 맺혔다.

작은 물방울들이 합쳐져 그 크기가 구슬만 해지고 탁구공만 해지고 이윽고 주먹만 해졌다. 무게가 무거워 떨어질 법한데도 끈덕지게 붙어 있었다.

물로 이루어진 투명한 공이 무엇을 닮았는지 깨닫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잔가지 끝에 모인 둥근 물방울은 드라이어드 열매를 닮아 있었다.

내가 만든 까만 가지에 세계수 가지에 열매가 맺히듯 물방울 열매가 열려 있었다. 크리스마스 트리의 오너먼트처럼 장식된 게 아니라 정말 열매가 열려 있는 것처럼 예쁘게 맺혀 있었다.

수없이 많은 가지에 걸린 투명한 물방울이 빛을 받은 보석처럼 반짝반짝 빛을 냈다.

“와….”

“세상에….”

“이건….”

모두가 가지의 아름다운 광경에 탄성을 내뱉었다. 모든 의문을 잊게 만들 정도로 강렬한 아름다움이었다. 나 역시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로 놀랐다.

꺄르르….

다시금 난쟁이들의 즐거움에 가득 찬 웃음소리가 공간 가득 울려 퍼진다.

눈을 감았다 뗄 때마다 물방울로 만들어진 열매의 모습이 바뀐다.

작은 난쟁이들이 뛰노는 모습이, 곡괭이질을 하는 모습이, 웃고 떠드는 모습이, 저마다 모여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물방울 안에 담겨 있었다.

무한 다이아에서만 볼 수 있었던 난쟁이들의 생활상이 물방울 열매를 통해 모두에게 생중계되고 있었다.

“저 작은 생명체는 대체 뭘까요?”

난쟁이들의 모습은 나뿐만 아니라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볼 수 있었다. 갑작스레 나타난 작은 생명체에 많은 이들이 궁금해했다.

“어? 저거 그거 아니야? 엄마, 그렇지?”

“그러게. 샘의 정령들이네.”

작은 생명체의 정체에 대해 알고 있는 이들도 있었다. 에트나와 포르낙스를 포함한 그들은 나에게 이미 난쟁이들을 분양받은 베스탈리스들이었다.

어째서 난쟁이들의 모습이 저곳에 나타났는지 알 수 없었다.

다들 놀라운 광경에 넋을 놓고 구경하던 와중에 저마다 자기 할 일을 하느라 바빴던 난쟁이들이 모두를 향해 인사하듯 손을 흔들며 해맑게 웃었다.

내가 핸드폰의 화면을 통해 그들을 바라보고 그들 역시 나를 바라봤던 것처럼, 물방울 열매 너머에 존재하는 사람들을 인식하고 그들에게 인사를 보내고 있었다.

“이게 전부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참으로 오래 참았던 질문이었다. 연이어 벌어진 놀라운 사건들로 인해 혼란스러워하다가 겨우 정신을 차린 것이었다.

에트나는 베스탈리스들을 대표해 내게 질문했다. 나 역시 기적처럼 벌어진 모든 일들을 명쾌하게 설명할 순 없었다. 말 그대로 기적이었기 때문이다.

“이 가지는… 세계수의 가지를 닮은 가지는….”

입을 열자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이 내게 집중한다. 한마디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제가 만든 가지로, 여러분들을 위한 가지이기도 해요. 세계수 가지처럼 축복 아래 모두가 안전하게 살 수 있도록 만들어 줄 거예요.”

“이게 세계수 가지와 같은 거라고요? 아니… 그것보다 당신이 그런 걸 만들어 냈다고요?”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짓는 에트나와 달리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네, 이 가지로 인해 멸망했던 테라리움은 다시 사람들이 살 수 있는 공간이 되었어요. 이곳은 지도상에서도 사라진, 사람들에게 잊힌 땅이에요. 여러분들이 다른 이들의 눈치를 볼 필요 없이 편안히 살아갈 수 있는 땅이기도 해요.”

내가 하는 말이 혹시나 베스탈리스들의 상처를 건들지 않을까, 말을 하면서도 여러 번 생각 후 천천히 내뱉었다.

내 말을 들은 사람들의 표정은 오묘하게 변했다. 이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렇다면 저 투명한… 공들은 뭔가요?”

물방울 열매는 나조차 예상 못 했던 것이기에 설명할 말을 고르는 게 오래 걸렸다.

오히려 내가 난쟁이들에게 묻고 싶었다.

왜 너희들이 드라이어드 열매처럼 생긴 물방울 열매 안에서 선택을 기다리는 드라이어드처럼 담겨 있냐고.

“저는 저것들이 우리를 도와줄 거라 굳게 믿고 있어요. 다들 느껴 봐요. 이건 낯선 기운이 아니지 않나요?”

내가 망설이는 사이 에트나가 먼저 나서서 말했다. 그녀는 물방울 열매들과 가지 아래 고인 푸른 샘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렇게 말하셔도….”

“어려워할 필요 없어요. 그냥 느끼면 돼요.”

“…….”

“우린 이미 답을 알고 있어요.”

에트나의 말에 따라 베스탈리스들은 기운을 느끼기 위해 집중했다. 눈을 감은 이가 있었고 기도하듯 두 손을 모은 이도 있었다.

“아….”

무언가를 알아차렸다는 듯 탄성을 내뱉은 사람을 필두로 하나둘 두 눈에 빛을 담고 가지를 바라봤다.

“미미르의 샘의… 기운이군요.”

“어떻게 이걸 바로 알아보지 못했던 걸까요?”

“그래요. 이 샘에서도 저 투명한 열매와 같은 공들에서도 우리의 불씨를 잠재울 수 있도록 도왔던 미미르의 샘의 기운이 느껴지고 있어요.”

미미르의 샘과 같은 기운이라….

“그렇다면 저 작은 생명체들은?”

“샘의 정령들이에요. 드루이드에게 드라이어드가 있듯 앞으로 저들이 우리에게 그런 존재가 되어 줄 거예요.”

“샘의 정령이라니… 전설 속의 물의 정령 ‘나이아드’가 저들이었군요.”

에트나가 나를 대신해 모두를 이해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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