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67화 (567/604)

60번째 테라리움, 파산할 뻔한 테라리움으로 악명이 높았으나 현재는 그 과거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활기가 가득했다.

뒤 번대 테라리움의 새로운 산업 허브가 되어 연일 오고 가는 마차에 입구는 항상 북적거렸다. 집 없이 떠돌던 사람들을 대거 흡수하여 단기간에 몸을 불렸다고 했던가.

온갖 사람들이 한 번에 몰리니 치안이 악화될 법도 한데 모두가 솔선수범하여 룰을 지키고 있었다. 작은 다툼 하나 일어나지 않고 서로가 가진 걸 베풀며 미래를 꿈꾸는 곳. 쓰디쓴 절망을 맛봤던 사람들은 희망을 다시 잃어버릴까 봐 조심 또 조심했다.

“이쪽이에요!”

하늘빛 단발머리를 가진 여성이 손을 흔들며 소리쳤다. 그 외침에 오늘 처음 60번째 테라리움을 찾은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다들 크게 긴장하고 있던 터라 큰 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몸을 떨었다.

모여 있는 사람 중엔 에트나도 있었다. 그녀는 약속한 날짜에 맞춰 모여 준 사람들을 둘러보며 복합적인 감정이 섞인 웃음을 지었다.

‘결국 오지 않는 건가….’

그녀는 아이처럼 신이 나 희망적인 미래를 꿈꾸던 남자를 떠올렸다. 그에게 꼭 오늘 60번째 테라리움에 와 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약속 시간이 지나가도록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결국 미래 대신 현재를 선택했구나. 그렇다고 탓할 마음은 없어.’

그럼에도 아쉬운 건 어쩔 수 없다며 두 손을 문질렀다. 오늘 이 자리에 모인 것만으로도 베스탈리스들은 새로운 시대를 향한 첫걸음을 뗀 것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이곳에 모인 온건파 베스탈리스들의 수는 제3자가 보기에 아주 많아 보였지만, 사실 에트나를 비롯한 동료들이 찾아가 설득한 인원의 반도 채 되지 않았다. 다들 변화를 두려워한 것이다.

“장소를 이동해야 합니다. 마차를 준비해 뒀으니 다들 인솔에 따라 주세요.”

“어디로 가는 마차입니까?”

“91번째 테라리움으로 가는 마차에요.”

“거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잖습니까? 그런데 왜 굳이….”

도착지를 들은 사람들이 불안에 찬 목소리로 웅성거렸다.

“음… 자세한 사항은 도착해서 설명드릴게요. 절대 여러분께서 위험에 처하실 일은 없을 거라 약속드립니다. 저희 가이아 길드가 최선을 다해 여러분들을 보호할 겁니다.”

“마스터를 비롯하여 저희들은 절대 여러분의 행동을 강제할 생각이 없습니다. 혹시라도 내키지 않으신 분은 참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번 일은 전적으로 여러분의 강한 의지가 필요합니다. 저희와 여러분들의 최종 목적지는 불이 득실대는 위험한 전쟁터입니다. 어정쩡한 마음은 부상을 부르게 됩니다. 부디 마음에 확신이 생기셨을 때 움직여 주시기 바랍니다.”

에트나는 사람들을 모을 때 결코 사탕발림하지 않았다. 설득이 통한 이에겐 위험 요소에 대해서도 충분히 경고했다. 그러니 오늘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다들 그만큼 각오를 하고 온 이들이란 뜻이었다.

가이아 길드 소속인 이리스에 이어 제퍼의 이야기가 끝났고, 이를 듣고 마차에 타길 거부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다들 굳은 표정으로 마차에 올랐다.

사람들이 모두 탑승하자 실력이 쟁쟁한 드루이드들이 드라이어드들과 함께 호위를 담당할 마차의 외부 좌석에 올라앉았다.

에트나는 가장 선두에 있는 마차 좌석에 앉으며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하긴, 아직 정화의 힘을 각성하지 못한 베스탈리스들을 곧바로 전투에 투입할 수 없으니… 그래서 일단 준비를 먼저 하려는 걸까? 하지만 왜 하필 91번째 테라리움인 걸까? 그것보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그녀 혼자 정화할 수 있을까?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지는 않을까?’

온건파 베스탈리스들을 모아 60번째 테라리움에 데리고 오는 것까지가 그녀가 알고 있는 계획의 전부였다.

이후는 오롯이 이 일을 주도한 자에게 전부 달려 있었다.

“빠진 사람 없죠? 혹시나 뒤늦게라도 도착할 분을 위해 여분 마차는 준비되어 있으니 걱정 마세요. 그럼 출발할게요!”

수많은 베스탈리스들을 태운 마차가 60번째 테라리움을 떠나 91번째 테라리움으로 향했다. 미리 테라리움을 넘어온 인공 개량 드라이어드들이 범위가 닿는 곳까지 마차가 지나갈 길을 닦아 놨기에 이동은 순조로웠다.

그렇게 그들은 이 모든 일의 주동자인 제희가 도착하는 때에 맞춰 91번째 테라리움에 모일 수 있었다.

“많이 고생하셨나 보네요.”

에트나는 마침내 재회한 제희의 얼굴을 보자 심장이 터질 것처럼 두근거리는 걸 느꼈다. 그녀의 얼굴을 보자 비로소 시작되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간만에 마주한 제희의 모습이 빈말로라도 괜찮다고 말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대체 무슨 일을 겪고 온 건지 겉모습이 만신창이였다.

“먼저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여러분들을 오래 기다리게 만들었네요. 정말 죄송합니다.”

걱정이 무색하게 목소리는 무척 밝았다. 그래서 에트나는 안심할 수 있었다.

“아니에요. 저희들이 모두 모인 건 그다지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그것보다 어째서 장소를 이곳으로 결정한 건가요?”

91번째 테라리움은 요충지로 쓰기에 걸맞은 곳이 아니었다. 후퇴를 대비한 대피소로 쓸 예정이라면 좀 더 안전한 곳이 나았기 때문이다. 멀쩡한 건물이 하나 없고 위생도 좋지 않아 부상자들을 케어할 수 없었고, 방벽으로 쓸만한 것도 남아 있지 않아 심할 경우 퇴군을 쫓아온 불에 의해 일망타진을 당할 수도 있었다.

“여러분들을 이곳으로 모신 건 특별한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제희의 목소리에는 묘하게 사람들을 집중시키는 마력이 존재한다고 에트나는 생각했다. 그렇잖아도 91번째 테라리움의 참혹한 몰골을 마주한 베스탈리스들은 크게 불안해하고 있었다.

다들 불안을 공유하며 어수선한 상황 속에서 좌중을 압도하는 목소리가 들리자 모두가 단번에 집중했다.

“당장은 경계를 비집고 들어오려는 불이 많아 두려우시겠지만….”

91번째 테라리움까지 마차를 호위한 드루이드들은 전부 포메이션을 구축하여 침입하려는 불을 막고 있었다. 어차피 사람들이 모여 있는 장소만 집중해서 지키면 되기 때문에 크게 어려운 일은 없었다.

“곧 안전하게 만들어드리겠습니다. 일단 과수원으로 가실까요?”

그렇게 말한 제희는 곧바로 앞장서서 테라리움 중심에 있는 과수원 건물로 향했다.

과수원이라고 해도 상태가 멀쩡한 건 아니었다. 무너진 잔해 속에서 죽은 세계수 가지가 듬성듬성 모습을 드러냈다.

이미 불이 뜯어먹어 성한 부분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이곳에 진득하게 내려앉은 죽음의 기운에 에트나는 속이 울렁거림을 느꼈다.

“절 믿고 여러분께서 모여 주신 만큼 전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할 거예요.”

그렇게 말한 제희가 숨을 크게 내쉰 후 죽은 가지의 일부분에 손을 대었다. 손을 대는 것만으로도 움푹 파일 정도로 수북이 재가 쌓여 있었고, 작은 충격에도 버티지 못해 그나마 형체를 유지하던 가지가 우수수 무너져 내렸다.

어떤 이들은 가지의 최후를 보고 몸을 떨었다.

“…….”

다들 머릿속을 잠식하려는 부정적인 생각을 애써 떨쳐 내며 제희가 하는 행동을 지켜봤다. 무엇을 하려는지 조금이라도 예상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아주 오랫동안 정적이 흘렀다. 많은 이들의 궁금증이 한계에 치달았을 때였다.

솨아아아.

나무가 가득한 숲에 찾아온 바람의 함성 같은 소리가 울려 퍼진다. 이곳에서 들릴 리 없는 맑고 청량한 소리에 다들 크게 당황하며 주위를 살폈다.

“어엇?”

누군가 손가락질을 하며 소리치자 그곳을 향해 일제히 시선이 집중되었다.

모든 걸 집어삼킬 것 같은 새까만 빛이 거대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죽은 가지가 매몰되어 있는 잔해들이 통째로 빛에 삼켜져 형체를 감췄고, 빛의 근원지인 제희는 모든 변화에도 덤덤히 손을 댄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처음 검은빛을 마주한 베스탈리스들의 감정은 미지의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놀랍도록 빠르게 온몸이 안정되어 가는 걸 느꼈다.

분명 처음 보는 것인데 그들에겐 무척이나 익숙한 기운으로 다가왔다. 자신도 모르게 취하게 되는 행동을 본능이라 일컫듯, 그들이 기운을 익숙하게 받아들이는 건 마치 본능과 같다고 볼 수 있었다.

살면서 단 한 번도 마주하지 않았던 기운이지만, 오래전부터 이 땅에 살아온 선조들로부터 이어져 내려와 지금의 영혼에 새겨진 본능.

바라만 봐도 마음에 평화가 찾아오고 심신을 잠식한 화기가 억눌러지는 감각에 베스탈리스들은 단숨에 모든 불안을 떨쳐 냈다. 그들은 생각했다. 이곳에 오길 잘한 것 같다고.

으드득. 투둑.

돌덩이들이 부딪히고 으깨지는 소리가 까만 빛 속에서 들려왔다.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이 뚫고 솟구치는 생명의 태동을 느꼈다.

어느 순간 비를 맞고 잦아드는 연기처럼 빛무리가 점차 줄었고, 그 안에서 빼꼼 고개를 내민 무언가의 첨단이 모두의 시야에 담겼다. 시간을 빨리 돌린 것처럼 첨단은 위로 쑥쑥 솟아올라 나뭇가지의 형태를 취했다.

사람들은 일제히 무언가를 떠올렸다. 어떤 이들은 직접 봤고 어떤 이들은 그림으로만, 어떤 이들은 이야기로만 전해 들었던, 이 세계를 지탱하는 원초적인 축복의 산물.

위용 넘치게 자라난 무언가가 세계수의 가지를 닮았다고 모두가 공통적으로 생각했다.

숨 쉬듯 세계수의 축복을 느낄 수 있는 드루이드와 다르게 베스탈리스들은 세계수로부터 어떠한 것도 느낄 수 없었다. 그들에게 축복이란 경험의 산물이었을 뿐이다. 축복이 있기에 불로부터 안전한 삶을 영유할 수 있다, 그것이 그들에겐 전부였다.

하지만 눈앞의 새까만 가지를 보자 그들은 축복을 온몸으로 느꼈다.

눈물을 흘리는 이도 있었고 할 말을 잃은 채 멍하니 가지만 바라보는 이도 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치밀어 오는 전율에 가쁜 숨을 내뱉는 자도 있었고 온몸에 힘이 빠져 주저앉은 자도 있었다.

101번째 테라리움에서 제희가 가지를 만들어 냈을 때와 91번째 테라리움에서, 그것도 베스탈리스들 앞에서 가지를 만들어 냈을 때는 확연히 달랐다.

드루이드가 받아들이는 새로운 가지에 대한 느낌과 베스탈리스들이 받아들이는 새로운 가지에 대한 느낌은 명백히 차이가 있었다.

베스탈리스들은 단번에 가지에서 거룩한 신성을 느꼈다. 유전자에 각인된 본능이 가지에 공명하여 해방을 부르짖는 걸 느꼈다.

에트나는 두 손을 기도하듯 맞잡고 고개를 숙였다. 온몸이 날아갈 듯 기뻤다. 소리치고 싶은 걸 꾹 참으며 영혼 곳곳에 가뭄의 단비처럼 내려앉는 활력을 만끽했다.

“이게 축복이 아니라면 무얼 축복이라 부를 수 있을까요?”

에트나는 베스탈리스의 신이 되겠다 말했던 제희를 애정이 가득한 눈으로 바라봤다. 그녀는 정말 약속을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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