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66화 (566/604)

“지금이야말로 베스탈리스들에게 아주 중요한 시기입니다.”

“잠시만요, 에트나 님.”

결국 엠버는 에트나의 말을 멈추게 만들 수밖에 없었다.

“지금 저희에게 불과의 전쟁이 한창인 92번째 테라리움으로 가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네, 현재로선 가장 위험한 지역이지만 저희의 새로운 힘으로 그곳을 지켜 냄으로써….”

“개인적으로 에트나 님을 무척 존경합니다. 대대로 명망 높은 집안이었으니까요. 그래서 에트나 님께서 괜히 그런 이야기를 하시는 게 아니란 걸 잘 알고 있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여태 당신께서 하신 말이 전부 믿기지 않습니다.”

에트나는 그 말을 듣고 역시나 하는 얼굴이 되었다.

“새로운 힘… 그런 게 있었다면 진작 누군가는 발현했어야 하는 게 아닙니까? 베스탈리스 탄압 역사가 이토록 긴데 어째서 이제야 가능하단 겁니까?”

“직접 보여드릴 수 있습니다.”

“아니요. 제 생각엔 시간 낭비일 것 같습니다. 그 힘이 이해되지 않는 데다 만에 하나 정말 존재한다 하더라도 드루이드들도 목숨 내놓고 간다는 92번째 테라리움에 갈 마음은 조금도 들지 않습니다.”

엠버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에트나의 심기를 살폈다. 하지만 에트나는 그저 덤덤히 엠버의 이야기를 듣고 있을 뿐이었다.

“그건 드루이드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그들은 그런 일 하라고 사람들이 떠받들어 준 거 아닙니까? 저희가 굳이 위험을 무릅써야 할 이유는 없다고 봅니다.”

“사람들에게 새로운 인식을 심어 줘야죠. 베스탈리스는 오랫동안 지독한 편견에 희생당했잖습니까? 어지간한 노력으론 이 편견을 벗겨 낼 수 없습니다. 더욱이 평범한 방법으론 벗겨 내는 건 불가능에 가깝고요. 그래서 기회라는 겁니다. 이번 일이 잘된다면 저희를 바라보는 세상 사람들의 시선이 달라져 있을 겁니다.”

에트나의 비장한 목소리에 일순 엠버의 마음이 흔들렸지만 이내 굳건해졌다.

“그건 확실히 보장된 일이 아니잖습니까? 어디까지나 당신의 가정일 뿐이고요. 죄송합니다. 저희는 그저 조용히 살고 싶습니다. 제겐 아이가 있습니다. 제가 잘못된다면 아내 홀로 아이를 키워야 하는데 그랬다간 갓 태어난 아이를 안고 테라리움 밖을 전전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제 힘을 직접 보신다면 생각이 많이 달라지실 겁니다. 당장 밖에서 불을 해치우는….”

“아닙니다. 제 마음은 변하지 않습니다. 곧 아내가 일어날 시간이라 오늘은 이만 돌아가 주셨으면 합니다.”

결국 엠버는 에트나에게 축객령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지금 엠버의 눈엔 에트나가 허황된 말을 늘어놓는 사기꾼이나 다름없어 보였다.

“네, 알겠습니다. 오늘 시간을 내어 주셔서 감사해요. 혹시라도… 마음이 바뀐다면 꼭 연락 주세요.”

자리에서 일어나 문 앞으로 이동하려던 에트나는 문득 자리에서 멈춰 섰다. 그러곤 엠버를 바라보며 제 손바닥 위에 불을 피워 냈다.

그 모습에 엠버는 화들짝 놀라 창문을 살폈다. 다행히 커튼이 쳐져 있는 걸 확인하고 가슴을 쓸었다.

“불을 피우는 모습을 누가 보기라도 한다면….”

“잘 보세요. 이 불이 정말 그동안 베스탈리스들이 사용했던 불과 같아 보이나요?”

엠버는 불편한 마음으로 에트나가 피워 낸 불꽃을 바라봤다. 아름답게 너울대는 불, 그 속엔 조금의 흉포함도 존재하지 않았다. 무척이나 순수한 불이라고 그는 자신도 모르게 생각했다.

“이게 진정한 베스탈리스의 불, 태워서 정화하는 불이에요. 이 불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불을 다루는 베스탈리스라고 말할 수 있어요. 제 기운을 잘 느껴 봐요. 전 불에 잠식당하지 않았어요.”

“뭔가 다르다는 건 알겠지만 말씀드렸다시피 그뿐입니다. 살펴 가십시오.”

엠버는 에트나의 시선을 피했고 나가는 문을 손짓으로 안내했다. 결국 에트나는 작게 한숨을 쉬며 그의 집을 나왔다.

“어떻게 됐어요? 표정이 좋지 않은 걸 보니 말 안 해도 알 것 같지만요.”

“숨 좀 쉬고 말하렴.”

에트나를 발견한 그녀의 딸 포르낙스가 다급하게 물었다.

“쉽지 않은 일이 될 거라 각오는 했단다.”

“이번이 몇 번째였죠? 다들 저희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욱 비협조적이에요.”

“그들의 마음도 이해가 가. 그들은 어떠한 트러블도 만들고 싶지 않아 평화를 추구할 뿐이기에 온건파라고 보기 어렵지. 따지고 보자면 중립인 거야. 그 어디에도 속하고 싶지 않은 중립.”

“답답해요. 어차피 밑바닥을 기며 살아갈 운명이라면 한 번쯤은 발악해 보는 게 좋지 않나요? 다시 없을지도 모르는 기회인데.”

“그렇게 조급한 마음을 가지면 안 돼. 무엇보다도 사람들이 사는 양상은 다 다르니까 함부로 재단해선 안 되지. 더욱이 저 집은 아이가 곧 태어날 집이야. 그게 더 발악해선 안 될 이유가 되는 거지.”

포르낙스는 젊었을 적 에트나의 성격을 그대로 물려받아 화통한 면이 있었다. 화기가 정화되어 심신에 끼치는 영향력이 사라졌어도 그녀의 성격은 그다지 많이 달라지지 않았다.

“다른 곳에도 찾아가 보자꾸나. 포기하지 않고 한 명이라도 더 설득하는 것. 그게 바로 우리가 일족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야.”

“알겠어요. 여기서 가까운 곳은….”

“…….”

엠버는 문에 귀를 대고 말소리가 멀어지는 것을 기다렸다. 오늘 하루를 점수로 매긴다면 집세를 내야 하는 날과 같은 20점이었다. 그만큼 엠버는 오늘 에트나의 방문을 최악으로 여겼다.

그는 조용히 살짝 열린 문틈 너머로 곤히 자고 있는 아내를 바라보곤 한숨을 쉬었다. 크게 부른 배 때문에 자는 자세가 여간 불편한 게 아닌지 뒤척임이 잦았다.

“변화라니….”

물론 엠버는 지금의 삶이 변화했으면 좋겠다고 수없이 생각했다. 하지만 더 좋은 삶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지, 에트나가 말했던 것과 같은 개척의 변화를 원하는 건 아니었다. 걸어가야 할 길이 가시밭길일지 꽃길일지 확실하지도 않은데 발걸음을 내디뎌야 한다니.

그는 차라리 어디에도 가지 않고 제자리에 멈춰 있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꽃길을 걸을 순 없으나 적어도 가시밭길을 걸을 위험은 없지 않은가?

테이블 위의 찻잔들을 치우는데 문득 에트나가 피워 냈던 무척이나 정순한 불꽃이 떠올랐다.

불은 모든 걸 태울 뿐만 아니라 결국 시전자인 베스탈리스의 영혼도 태워 먹는다. 베스탈리스의 죽음은 한 줌 재로 타오르는 소멸의 여로였다. 엠버는 제 안의 불씨가 게걸스러운 아귀처럼 느껴졌다.

“가셨어?”

설거지 소리에 엠버의 아내, 에스쿠아가 깨어나 방 밖으로 나왔다.

“응, 그냥 안부를 물으러 오셨어. 몸은 좀 괜찮아? 더 자는 게 어때?”

“아냐. 속이 뜨거워서….”

배 속에 불씨를 하나 더 품는 격이니 불덩이 같은 제 배를 만지며 에스쿠아가 힘들어했다.

그런 그녀를 보며 엠버는 더욱더 에트나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했다.

“무슨 이야기 했어? 안부 인사치고는 말소리가 꽤 오래 지속되던데.”

“그냥…. 에트나 님께서 우리 아이를 위해 미미르의 샘물을 구해 주신대.”

“세상에 이렇게 감사할 일이.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그런데 자기는 그렇게 기뻐 보이지가 않네? 무슨 고민이라도 있어? 내 눈을 속이려고 하지 마. 혼자 힘들어하지 말고 내게 털어놓는 건 어때?”

아이가 무사히 태어날 수 있게 되었음에도 엠버의 얼굴에 진 그늘을 기민하게 발견한 에스쿠아가 물었다.

“사실은….”

결국 엠버는 에스쿠아에게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잘 결정했어. 우리 그냥 조용히 지내자. 그런 건 결국 여유가 있는 에트나 님만 할 수 있는 일이야. 우리 같은 사람은 그저 내일을 걱정하는 것만으로도 벅차서 그런 일에 어울리지 않아. 아이가 있잖아. 그럴 때일수록 더 조심, 조심해야지.”

에스쿠아는 엠버의 결정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어떠한 것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있는 것. 그게 최선이라며.

하지만 에스쿠아에게 좀 전의 일을 설명할 때까지만 해도 의견을 굽히지 않았던 엠버의 마음속에 미미한 변화가 일어났다.

“아이….”

“그래, 우리 아이를 위해서.”

아이란 말에 엠버의 마음이 돌멩이가 던져진 호수의 표면처럼 파문이 일어난다.

‘태어난 아이도 우리처럼 살아가야겠지? 미래가 아닌 당장 내일을 걱정하며. 집세를 낼 시기가 다가오면 모든 하루가 최악으로 치닫고, 베스탈리스임을 들킬까 봐 수시로 창밖을 살피는 삶을 우리 아이도 살아가겠지….’

“자기, 아까 일 때문에 아직도 그러는 거야? 그냥 잊어 버려.”

‘학교에 가지도 못하고 변변찮은 일자리도 구하지 못하고 우리가 당했던 모든 것들을 아이도 겪게 되겠지. 그리고 아이 역시 생각하겠지. 그저 조용히 살아갈 수만 있다면 행복한 일이라고.’

파문은 점점 커져 이내 파도처럼 요동치는 물결이 된다.

“좀 더 쉬고 있어. 잠깐 할 일이 생각나서 나갔다 올게. 금방 돌아올 거야”

엠버는 결심했다. 적어도 에트나가 자신에게 보여 주려고 했던 힘의 정체를 확인하긴 해야겠다고. 그저 확인만 하는 정도면 어려운 일도 아니지 않으냐고 생각했다.

‘보기만 하는 거야.’

아직까지 개척에 가담할 의향은 없었다. 하지만 꽃길이 어떻게 생겼을지 상상 정도는 해 볼 수 있는 일 아닌가?

엠버는 황급히 집을 나와 에트나를 찾기 위해 뛰었다. 다행히 오래 지나지 않아 걸어가고 있는 익숙한 두 모녀를 발견했다.

“에트나 님!”

“어머.”

에트나와 포르낙스는 다급하게 뛰어오는 엠버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

“다름이 아니라 보여 주겠다던 그 힘 말입니다. 그냥 보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을 듯해서 말입니다.”

옆에서 듣고 있던 포르낙스가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엠버를 바라보며 어쩌면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잘 결정하셨습니다. 일단 불이 돌아다니는 교외로 갈까요?”

“그런데 정말… 그게 가능합니까?”

“네, 수없이 해 왔는걸요.”

셋은 빠른 걸음으로 테라리움 밖으로 나섰다. 본래라면 불을 상대할 전투 능력이 없는 베스탈리스가 호위 없이 테라리움 밖을 나가는 건 어리석은 일이었지만, 지금의 에트나와 포르낙스에겐 거리낄 게 없었다.

“저기, 저 불을 대상으로 보여드릴게요.”

엠버는 에트나가 가리키는 불을 바라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정말 사기라면 지금쯤 그만둘 텐데.’

그는 반신반의했다. 에트나의 당당한 모습에 그녀가 정말 불을 해치울 수도 있겠다는 믿음 반, 아직까지 그녀가 뛰어난 연기를 하고 있다는 의심 반.

“잘 보세요. 이게 바로 베스탈리스의 새로운 힘이에요.”

에트나는 가뿐히 제 손에서 화염을 피워 냈다. 그러곤 불을 향해 뿜어냈다.

아무런 타격이 없을 거란 엠버의 예상을 뚫고 에트나의 화염을 뒤집어쓴 몬스터 불은 괴로워하며 몸부림쳤고, 이내 삽시간에 흔적도 남기지 않은 채 사라졌다.

“아, 내가 해치우고 싶었는데.”

경악한 엠버가 아무 말도 못 한 채 제 눈을 의심하고 있을 때, 포르낙스는 에트나가 여유롭게 새빨간 보석을 챙기는 걸 보며 투정을 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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