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65화 (565/604)

똑똑, 노크 소리에 엠버는 문을 열었다. 이후 찾아온 이를 안으로 들여보낸 후 혹시 누가 이를 지켜보고 있진 않을까 기민하게 주위를 살핀 끝에 황급히 문을 닫았다.

“갑작스러운 요청에도 흔쾌히 받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에트나 님께서 그렇게 나오시는 데엔 다 이유가 있겠지요.”

엠버는 에트나를 집에 들이며 불편한 마음을 티 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요즘 그 가문이 이상하다더라.”

“행동이 너무 눈에 띄어.”

“자기들은 빌붙을 구석이 있겠지만 우리들은….”

“괜히 엮이지 않는 게 좋아. 이제 겨우 살 만하잖아? 이러다 테라리움에 찍히기라도 한다면….”

그도 그럴 것이 눈앞에 있는 이의 평판이 현재 일족들 사이에서 그다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살아가는 것, 엠버를 비롯한 대부분의 베스탈리스들이 가장 바라는 일이었다.

에트나는 최근 몇 달간 여러 테라리움의 소식지에 이름이 거론될 만큼 요란한 행보를 보이고 있었다.

‘본래라면 저 가문도 그다지 앞에 나서는 타입이 아니었는데. 어느 날부터 여행도 활발하게 다니고 있다고 하고….’

에트나는 베스탈리스 중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로 기운이 강한 자로, 많은 이들에게 존경을 받던 자였다. 엠버 역시 그런 점에서 그녀를 존경했다.

하지만 최근 행보엔 응원을 보낼 수 없었다. 그저 자신이 더 이상 엮이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뿐이었다.

‘요즘 온건파들을 찾아다니고 있다고 했는데. 날 찾아온 건 그 때문인가? 그녀는 자신의 행동이 얼마나 남을 불편하게 만드는지 모르는 걸까? 그럴 사람이 아닌데….’

엠버가 이런저런 걱정을 하며 에트나를 안내할 동안, 에트나 역시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집의 크기는 무척 작았다. 의자를 딛고 올라서면 머리가 닿을 듯한 낮은 천장은 위층의 생활 소음이 여실히 전해질 정도로 방음이 좋지 않았다.

‘주민을 최대한 많이 받기 위해 합판을 주재료로 지었다고 했지. 이러면 화재에 취약해서 불이 쳐들어오기라도 한다면 피해가 클 텐데….’

테라리움의 가장 외곽, 그것도 치안이 좋다고 보기 어려운 뒷골목. 이 작은 공간마저도 자가가 아닌 과수원에서 달마다 세를 받고 대여해 주는 방식이었다.

과수원에서 요구하면 당장 집을 비워 줘야 하는 조건이 붙기에 월세가 저렴했다.

하지만 어떤 이들에겐 이 정도도 감지덕지일 터였다. 자리가 나지 않아 가족들과 함께 여관방을 전전하는 자들도 있었고 심하면 테라리움에 낼 세금이 없어 테라리움 밖, 빈민촌에서 흙벽으로 겨우 비바람을 막을 만한 집을 지어 지내는 이들도 있었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자리가 부족해 경쟁이 치열할 정도였다.

베스탈리스들의 삶은 대부분 이러했다. 대대로 쌓은 재산이 많아 중앙 행정부에 대부분 헌납하고도 어느 정도 호화로운 삶을 유지할 수 있는 에트나의 가문이 특별할 뿐이었다.

과거엔 권세가 높은 베스탈리스 가문이 많았다고는 하나 전부 까마득한 옛날 일이었다.

가문이 넵튜누스와 연관이 있지 않은 한, 자식 중에 물의 기운을 가진 아이가 태어나지 않는 한, 하루아침에 증발해도 이상할 게 없는 현실. 그게 바로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베스탈리스들의 현실이었다.

에트나는 무거운 가방을 올려놓기만 해도 무너질 것 같은 얇은 테이블과 대충 조립하여 만들어진 의자를 보고 쓰라린 속을 달랬다.

손님이 오면 대접해야 할 차가 따뜻한 맹물이었다. 흔한 다과도 없었다.

“곧 아이가 태어날 예정이지요?”

하지만 에트나는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은 채 자리에 앉았다.

“네, 두 달 뒤가 예정일입니다.”

엠버의 아내는 이 자리에 없었다. 밤을 지새우며 부업을 하느라 지금은 안방에서 곤히 잠들어 있었다.

엠버는 굳이 그녀에게 오늘 에트나의 방문에 대해 알리지 않았다. 엠버의 아내 역시 엠버만큼 주위에서 일어나는 변화에 불안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별은 아시나요?”

“…….”

“아들인가 보네요. 그렇게 걱정하고 계시는 건 아이에게서 불의 기운을 느꼈기 때문이겠지요? 미미르의 샘물은 구하셨나요?”

“노력은 하고 있습니다….”

에트나는 안타까운 표정을 숨기려 컵에 입을 댔다.

본래 불씨를 영혼에 품고 태어나는 남자아이는 모두 죽었다. 하지만 미미르의 샘물이 있다면 불씨의 힘을 억눌러 남자아이라도 태어날 수 있었다. 에트나의 아들인 미미르가 그 예였다.

하지만 미미르의 샘물은 아무 때나 쉽게 구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미미르의 샘은 세계 곳곳에 존재하나 흔하지 않았고 넓이와 깊이가 연못만 했다. 미미르의 샘은 베스탈리스들만 알아볼 수 있기에 대중적으로 위치가 표시된 지도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일족들은 직접 세계를 떠돌며 샘을 찾았다.

찾는다고 전부가 아니었다. 샘의 존재는 베스탈리스의 일족 번성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어 엄중하게 관리된다. 가문 대대로 샘 근처에 터를 잡고 집을 세워 보존하는 곳도 존재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십여 년 전부터 인페르노가 전부 탈취해 갔다.

다른 이들에겐 평범한 샘물이지만 베스탈리스들에겐 다이아보다 귀한 자원이었기에 경쟁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으나, 인페르노의 행위는 약탈에 가까웠다. 그들은 일족들 사이에서 잘 알려진 샘은 물론 곳곳에 숨겨진 샘들까지 전부 집착적으로 탈취해갔다.

미미르의 샘엔 특이점이 존재했다. 바로 샘 밑바닥에 존재하는 원천을 제거하면 샘 자체도 효력을 잃는다는 거였다. 원천을 제거하면 평범한 샘이 되었다가 이내 비가 아무리 내려도 샘의 물은 채워지지 않고 점차 말라 사라져 버린다.

이 샘의 원천 역시 베스탈리스의 탄생에 기여한다. 간혹 샘물을 마시는 것만으로는 영혼의 불씨가 진정되지 않는, 아주 강한 기운을 타고나는 남자아이가 있었다. 인페르노의 수장인 애쉬가 대표적인 예였고 에트나의 아들인 미미르 또한 그 예였다.

그럴 때면 샘의 원천을 삼켜야만 아이를 지킬 수 있었다.

에트나의 가문이 긴 세월 지켜 왔던 미미르의 샘은 가문의 귀중한 막내아들을 위해 소멸되었다.

“샘물이면 되나요?”

“네, 다행히. 원천이 필요할 정도의 기운은 아닌 듯합니다.”

“그렇다면 제가 알아보겠습니다. 저희 가문의 샘은 사라진 지 오래지만 아직 보전되는 몇몇 곳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가격이….”

엠버는 너무 비싸다는 말을 차마 하지 못하고 삼켰다.

‘아이의 목숨보다 중요한 게 없는데.’

곧 태어날 소중한 아들의 생명에 값어치를 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절망적이게도 다이아가 아주 많이 드는 건 사실이었다.

사회의 압박에 제대로 된 일자리와 지위를 얻기 힘든 베스탈리스들이 다이아를 버는 방법은 뻔했다. 같은 베스탈리스들에게서 얻어 내는 것이다.

미미르의 샘을 보유한 가문은 샘물을 내어 주는 조건으로 막대한 다이아를 원했다. 샘 관리 비용이라곤 하나 그들이 흔치 않은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한다는 걸 모든 베스탈리스들이 알았다. 그럼에도 그들이 왜 그렇게까지 하는지 알고 있기에 비난할 수 없었다. 아니, 비난하지 않았다.

샘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테라리움의 높은 세금을 견디며 버티는 자들도 더러 있었기 때문이다. 샘의 위치가 아예 불분명한 것보다 차라리 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라도 있는 상태가 낫다, 대부분의 베스탈리스들이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끝내 값을 모을 수 없는 자들은 슬프지만 아이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걱정 마세요. 같은 일족끼리 돕고 살아야 하지 않겠나요? 제가 지불하고 구해 올게요.”

“…감사합니다.”

엠버는 얼굴이 뜨거워지는 걸 들키지 않으려 고개를 푹 숙였다.

베스탈리스들은 모두 근원이 불이기 때문인지 불과 같은 성격을 가진다. 그만큼 자존심도 굉장히 강했다. 에트나의 행동은 무척이나 고마운 일이나 샘물을 구매할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임신한 아내까지 거들어 부업을 해야만 했던 자신들의 처지와 비교되어 엠버는 견디기 힘들었던 것이다.

“그것보다 오늘 무슨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엠버, 제가 당신께 이런 말 할 처지가 아니란 건 잘 압니다만….”

하필 앞선 주제가 너무 좋지 않았다고 에트나는 생각했다. 그녀는 지금 엠버가 자존심에 큰 상처가 생겨 얼마나 힘들어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베스탈리스의 성격이 불과 같은 한편, 그럼에도 그들이 사회를 이루고 뭉칠 수 있는 이유는 서열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불의 기운이 더 강한 자에게 본능적으로 굽힌다. 아마 샘물의 비용을 대신 치르겠다는 자가 에트나가 아닌, 불의 기운이 그보다 더 약한 다른 이였다면, 엠버는 자기 가족의 일이라며 화내며 거절할 수도 있었다.

“베스탈리스가 지금 보다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고 말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테라리움에 새로운 정책이라도 생겼답니까? 기피 직종에 반드시 베스탈리스를 고용해야 한다는 조항 같은 거 말입니다.”

“겨우 그런 게 아닙니다. 겨우 그 정도론… 저희의 삶은 더 나아질 수 없습니다.”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들은 당장의 미래만 고민한다. 엠버에겐 당장 내일 먹고살 다이아가 더 급했다. 그러니 더럽고 힘든 일이라도 자리만 생긴다면 감지덕지했다.

“엠버, 혹시 제 기운이 변한 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이전과 다르지 않나요? 아니, 당신을 포함한 다른 베스탈리스들과 다르게 느껴지지 않나요?”

“글쎄요….”

엠버는 본론을 말하지 않고 빙 둘러 가는 에트나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짜고짜 기운에 대해 묻는 그녀에게 답답함을 느꼈지만 자신보다 그녀가 훨씬 더 강했기에 티를 낼 순 없었다.

엠버는 찬찬히 에트나의 기운을 살폈다. 뒤늦게 알아차렸지만.

‘그러고 보니 활화산처럼 폭발적인 기운이 아니라… 묘하게 차분하고 잠잠한 느낌인데?’

에트나의 기운은 여태 알고 있는 베스탈리스의 기운과 어딘가 달랐다.

베스탈리스들이 불같은 성격을 지닌 데엔 속에서 터져 나오는 화기가 한몫했다. 온몸을 항상 뜨겁게 데우고 갈무리할 수 없을 만큼 불의 기운이 요동치니 결코 사람이 차분해질 수 없는 것이다.

“다른 것 같기도 합니다.”

그 말에 에트나는 작게 미소 지었다.

“감히 말하건대 머지않아 베스탈리스도 저 밖의 드루이드들과 같은 삶을 살 수 있게 될 겁니다. 저희는 새로운 힘을 얻을 수 있어요.”

에트나의 말에 엠버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곤 맹렬히 머리를 굴렸다.

‘설마 그녀도 인페르노에게 포섭된 건가?’

엠버로서는 그녀가 이상 행동을 보이는 데엔 결국 인페르노가 깊이 관여하고 있었다고 강력하게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베스탈리스가 갈수록 더 힘든 삶을 사는 데엔 세계에서 각종 범죄와 과격 행동을 벌이는 인페르노들이 많은 몫을 했기 때문이다. 조용히 살고 싶은 온건파들로서는 결코 이해하기 힘든.

“절 이상하게 보겠지요. 이해해요. 저도 직접 경험하기 전까진 믿지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엠버, 우린 앞으로 태어날 아이들에게 더 나은 삶을 전달해 줄 수 있어요. 우리가 좀 더 용기를 낸다면요.”

에트나는 어렵게 어렵게 그간 자신이 겪었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이야기의 주된 내용은 이랬다. 베스탈리스도 드루이드와 드라이어드처럼 불을 해치울 수 있는 힘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엠버는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닌가 오해했다.

‘내가 아니면 저 여자가 미쳐 버린 거겠지….’

그리고 에트나와 함께 있는 자리가 무척이나 불편해졌다.

에트나가 걱정했던 대로 엠버는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 중 단 한 가지도 믿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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