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64화 (564/604)

“너… 날개가….”

마치 나비와 같은 날개였다. 그동안 날개를 단 드라이어드를 많이 봐 왔지만 바곳처럼 식물을 형상화한 게 아닌 정말 나비를 본뜬 듯한 날개는 처음이었다.

바곳의 꽃잎 색과 같은 선명한 청보라색 바탕에 검은 줄무늬. 어두운 색감의 바크에 비해 날개가 지독히도 화려해서 엄청나게 눈에 띄었다. 멀리서 보면 날개부터 보일 터였다.

이 화려함은 아름다움을 넘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묘하게 섬뜩함을 불러일으키는 게 있었다.

이를테면 독을 품은 생명들이 자신의 위험을 경고하듯 강렬한 색채와 현란한 무늬를 사용하는 것처럼 말이다. 바곳의 지나치게 화려한 날개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얼마나 위험한 드라이어드인지 경고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세상에… 엄청 아름다워.”

팔랑, 내 칭찬에 화답하듯 작게 날갯짓한다. 나만큼 바곳도 자신에게 날개가 생긴 게 신기한지 연신 뒤를 확인했다.

그에게 날개가 생길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드라이어드에게 화관과 날개는 왕의 증표였다. 포레스트를 일구고 그 안에 종속시킨 드라이어드 수가 많을수록 화관을 얻고 날개를 얻는 거다.

오리지널 등급인 바곳에겐 자신 외에 동종이 존재하지 않았다.

각시투구꽃 외에 백부자, 갈풀이 추가로 결합된 인공 개량종이니 자연적으로 태어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더구나 어디선가 같은 인공 개량을 시도하더라도 그 비율에 따라 태어나는 종이 달라질 테니 사실상 바곳은 제 포레스트를 이룰 수 없었다.

왕이 되어야 화관과 날개가 생긴다. 이건 이 세계에 통용되는 법칙과 같아서 어떻게 보면 바곳은 영영 얻지 못할 거라 생각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내 생각이 잘못됐음을 그가 직접 등 뒤에 두 쌍의 날개를 피워 내 증명했다.

오리지널 등급인 바곳은 그 자체로 왕의 그릇이었던 것이다.

그는 언제든 왕의 위엄을 개화할 준비는 충분히 되어 있었고 필요한 건 계기였다.

이제야 알았다. 다른 드라이어드들이 동종을 휘하로 들여 힘을 키울 때, 바곳은 본인의 한계를 넘어 그 힘을 키워야 했음을.

이 한계를 평범한 방법으로 넘는 건 불가능했다. 이건 오직 나만이 가능한…. 나의 바곳이기에 가능한 초월이었다.

어쩐지 바곳에게 날개가 생기자 그 모습이 좀 더 어른스러워진 것처럼 느껴졌다.

“네가 자랑스러워.”

내 말에 바곳이 배시시 웃는다.

날개 때문에 뒤로 밀려났지만, 새로 바뀐 그의 무기도 특별했다. 데이지와 메스키트처럼 새까만 빛을 내는 무기는 위아래가 극명하게 달랐다. 낫과 의술의 지팡이.

기존에 단델리온의 스태프 조각을 매개로 턴 오버가 일어났다면, 이젠 무기를 위아래 바꿔 잡는 것만으로도 가능하게 되었다.

죽음과 생명을 동시에 담고 있는 무기.

그건 양날의 검처럼 쓰임새에 따라 독이 될 수도 약이 될 수도 있는 바곳의 모체 특성과 아주 잘 어울렸다. 더구나 그가 상징하는 ‘리셋’, 엔딩 후 초기화하여 다시 시작하는 그 상징과도 잘 맞았다. 더없이 그에게 걸맞은 무기였다.

어느 하나 예쁘지 않은 곳이 없어 요목조목 따져 가며 칭찬 세례를 퍼붓고 있는데, 바곳이 수줍은 목소리로 물었다.

“제희 님, 그거 아세요?”

“응?”

“제 마음속이 제희 님으로 가득 차 터져 버릴 것 같아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당신의 모든 감정을 알아차릴 수 있을 것만 같아요. 이게 교감의 궁극의 단계인 거죠? 그렇다면… 이제 저도 제희 님과 그래프트를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프트…!”

바곳의 기특함에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그와 여태 그래프트를 사용하지 못한 게 얼마나 신경 쓰였는지 모른다.

그는 나름대로 이 파티의 초기 멤버였다. 28번째 테라리움을 손에 넣은 직후 합류했으니 이미 그래프트를 한참 전에 사용할 줄 알았어야만 했다.

물론 훨씬 초기 멤버인 데이지와의 그래프트 사용도 많이 늦은 편이었지만.

“정말?”

“네. 교감도가 충분하다는 말, 이젠 이해할 수 있어요. 다음에 기회가 됐을 때 꼭 함께 사용해 보고 싶어요.”

목소리가 약간 떨렸다. 설렘과 흥분이 가득 묻어 있었다.

“얼마나 이 순간을 고대해 왔는지 몰라….”

정말로.

내 드라이어드들과의 그래프트는 엘더를 제외하면 많이 늦은 편이었다. 오래 함께 지냈음에도 그래프트를 사용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얼마나 조바심이 났는지 모른다. 물론 이후 그래프트를 사용하며 그 성취감과 만족감에 조바심이 씻은 듯이 사라졌지만.

우리 사이의 교감이 충분한 게 분명한데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내게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하는 불안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그게 나의 초기 멤버들이라면.

“너의 성장이 내게 얼마나 큰 선물인지 몰라.”

막고 있던 둑이 단숨에 무너져 급류가 터져 나온 것처럼, 바곳은 단번에 많은 걸 이뤄 냈다.

본래 자리로 돌아가 다른 드라이어드들에게 바곳의 성장을 아낌없이 자랑했다. 새로운 무기와 날개, 그리고 그래프트 사용 가능 여부까지.

“나비 날개네? 이런 날개는 처음 봐.”

마찬가지로 날개를 보유한 칼미아와 데이지가 나와 같이 독특한 날개의 형태에 큰 관심을 보였다.

“바곳의 종족 특성 때문에 다른 걸까요? 아무래도 다른 드라이어드들과는 다르잖아요?”

바곳의 특이점에 대해선 내 드라이어드들만 알고 있었다. 그래서 메스키트는 이 점을 들어 슬쩍 내게 물었다. 그녀 역시 나비 형태의 날개는 처음 보는 듯했다.

“무기만 봐도 턴 오버 형인 걸 알겠네. 어떤 면에선 너무 드러내는 꼴이라 좋지 않은 거 아냐?”

드라이어드의 특성은 상대에게 숨기면 숨길수록 강해지기에 포인세티아의 의견엔 어느 정도 동의가 되었다.

“이런 날개보다 내 날개가 배는 더 아름다울 거야.”

엘더의 반응은 내가 예상했던 것 그대로였다.

그는 바곳에게 날개가 생긴 것 외에 그마저 무기를 교체한 것에 대해 미약한 질투까지 느끼고 있었다. 자기애가 무척이나 강한 그에 대해 잘 알고 있기에 은근히 그가 걱정되기도 했다.

첫 번째도 두 번째도 빼앗기고 이젠 세 번째 자리까지 빼앗겼으니… 부디 그가 스트레스를 받지 않기를.

애쉬와는 90번대 테라리움에 진입할 때쯤 헤어졌다. 놓아줬다기보단 속이 후련하다는 얼굴을 한 그가 제멋대로 이탈했다고 보는 게 맞았다.

헤어지기 전 자신의 상태를 최대한으로 만들 작정인지 아주 오래오래 영혼 케어 서비스를 받고 떠났다. 그는 결국 난쟁이들의 선택을 받지 못했다.

“그냥 나와 함께 가는 게 어때? 잘 대접해 준다니까?”

“꺼져.”

어차피 본래 목적은 달성했기에 그가 떠나가는 걸 내버려 뒀다. 멀리 그를 마중 온 자들의 기척이 느껴졌다.

난 곧바로 91번째 테라리움으로 향했다.

수없이 많은 이들이 망해 버린 테라리움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게 느껴졌다.

내 부탁으로 28번째 테라리움에서 파견된 길드원들이 불의 공격으로부터 이들을 지키고 있었다.

“오셨다!”

날 발견한 이리스가 멀리서 손을 흔들었다.

잠깐 못 봤을 뿐인데 그들이 무척이나 반가웠다.

“세상에! 꼴이 그게 다 뭐예요? 엄청 고생하셨나 봐요.”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으니 중간에 여관을 방문할 틈도 없었다. 시들링이나 나나 재와 흙먼지에 뒤덮여 꼴이 말이 아닐 터였다. 그래도 청결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을 많이 하긴 했는데….

“난 그것보다 101번째 테라리움까지 갔다가 무사히 돌아온 게 더 놀라운디….”

“마스터, 어떻게 연락 한 번 안 주실 수 있습니까!”

“엄청 바빴어요. 진짜… 잠도 못 자고 불과 전투하고….”

그간 겪은 고생은 말로 하기 어려웠다.

“언니, 나중에 꼭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 이야기해 줘야 해!”

로웰라는 여행을 떠나도 무리 없을 만큼 회복한 지 오래였다. 그동안 병원 생활을 지낸 게 엄청 괴로웠는지 퇴원 후 미친 듯이 날뛰었다.

그녀는 두 눈을 빛내며 내게 묻고 싶은 게 한가득인데 겨우 참는다는 얼굴을 했다.

아마 101번째 테라리움에서 겪은 이야기를 적당히 각색해서 전하면 엄청 좋아할 터였다.

“그래서… 카수스는 어떻게 되었나요? 설마…?”

그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안건은 바로 이것이었다.

“아쉽게도… 놓쳤어요. 도망쳤거든요. 한계까지 몰아붙였다고 생각했는데 막판에 도주로를 숨겨 놨을 줄은 꿈에도 몰랐거든요.”

난 그와 마주쳤을 때 둘 중 하나는 죽을 거라 생각했었다.

“도망쳤다고요? 뭔가 세상에 재앙을 불러왔던 드루이드치고는….”

“저희가 함께 갔다면 끝장을 봤을 텐데 말입니다!”

“음… 솔직히 여러분들을 데려가지 않은 것에 대해 상당히 많이 후회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전력 면에선 큰 도움이 되겠지만 애쉬와의 트러블을 견뎌 내지 못했으리라.

“어쨌든 못다 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도록 해요. 지금은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으니까.”

난 모여 있는 베스탈리스들에게로 향했다.

“그 꽃은 어떻게 됐어?”

“어떤 꽃이요?”

“그 왜… 하얀 꽃 있잖아. 마거리트.”

“아….”

등 뒤로 데이지에게 이리스가 조용히 질문을 건네는 소리가 들려왔다. 본래라면 듣지 못했을 크기였으나 어쩐지 이젠 그 정도는 무리 없이 감지해 낼 수 있을 정도로 내 오감이 상승된 느낌이었다.

“이렇게 모여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여러분께 도움을 요청한 제이입니다.”

가까이 다가가며 인사하자 안면을 튼 베스탈리스들이 앞으로 나온다. 에트나를 비롯해 영혼 정화를 받기 위해 일전에 테라리움을 찾아왔던 몇몇 베스탈리스들.

이런 밑 작업이 꾸준히 있었기에 그들을 설득하는 데 도움이 됐겠지.

“많이 고생하셨나 보네요.”

“먼저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여러분들을 오래 기다리게 만들었네요. 정말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저희들이 모두 모인 건 그다지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그것보다 어째서 장소를 이곳으로 결정한 건가요?”

충분히 궁금할 만했다. 수많은 베스탈리스들이 의문이 가득한 눈빛으로 날 보고 있었다. 저들 중엔 아직 이 상황을 의심하고 불안해하는 자들도 많을 터였다.

91번째 테라리움이 망한 건 알고 있었지만 막상 와서 보니 쓸만한 건물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반파된 건물 잔해가 위태롭게 널브러진 곳은 어딜 봐도 봐줄 만한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오면서 민들레를 통해 전해 듣기론 해안을 끼고 있는 테라리움 치곤 망하는 속도가 빨랐다고 했지. 어업에 종사하던 주민들이 바다가 말라 버려 생계가 어려워지자마자 급하게 떠났다고 했던가.

태양의 보석이 생산된다는 특이점이 없는 데다 다른 사업 개발에 투자하지 않고 바다 의존도가 너무 높아서 쉽게 무너졌다고 했다.

육로로 이동할 때보다 해로를 이용하면 빠르게 이동할 수 있을뿐더러 무엇보다도 불의 습격을 피할 수 있으니 사람이 빠지는 속도도 참 빨랐다고 했지.

“여러분을 이곳으로 모신 건 특별한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당장은 경계를 비집고 들어오려는 불이 많이 두려우시겠지만…. 곧 안전하게 만들어드리겠습니다. 일단 과수원으로 가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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