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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할 때가 되었는데 참골무꽃이 따로 내게 와 의견을 말했다.
처음엔 회수한 씨앗들을 동족들이 있는 곳에 찾아가 심어 줄 생각이었기에 우릴 따라가겠다고 했으나 그 마음이 바뀌었다고 했다.
“이곳에 남으려고 해요. 이제 이곳은 더 이상 위험하지 않잖아요? 선조들이 일궜던 태초의 군락지가 있던 곳이니 다시 시작하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혼이라도 낼까 봐 조마조마한 얼굴로 힘겹게 의견을 피력했다.
“먼저… 참골무꽃 군락지를 이루고… 그리고 가지고 있는 씨앗들도 본래 있던 자리에 심어서….”
테라리움은 물론 그 주변 일대까지 불을 정화하고 내쫓아서 치안이 많이 좋아졌다곤 하나 완전히 위협으로부터 무사한 건 아니었다.
불은 끈질겨서 계속 주변을 서성이며 침입할 때를 노릴 테니 혼자 있는 건 위험할 수도 있었다.
“난 좋은 생각이라고 생각해. 기특하기도 하고. 다시금 태초의 군락지를 일구다니 엄청 멋진 생각이잖아?”
의견에 긍정을 표하자 참골무꽃의 얼굴이 대번에 화사해졌다.
“하지만 무척 힘들 거야. 그만큼 네 각오도 필요하고. 이 주변은 과거에 비하면 엄청 안전해졌지만 아주 작은 불이라도 끊임없이 곳곳에 나타나 괴롭힐 거야. 땅속의 씨앗들은 불을 무찌를 힘이 없잖아? 그러니 네가 씨앗들이 자라 새싹이 되고 꽃을 틔울 때까지 불로부터 지켜 내야 해. 숨거나 도망가지 말고 싸워야 한다는 거야. 할 수 있겠어?”
머뭇거리던 참골무꽃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드라이어드가 해야 할 일임을 여러분께 배웠는걸요. 드라이어드가 그렇게 큰 힘을 낼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어요. 무서워하기만 해선 전 아무것도 아니란 것도요…. 더구나 제 선조들이 자랐던 태초의 군락지에 그런 대단한 힘이 있다니. 제가 숨고 도망치기만 해선 모체에 실린 꽃말과 신화의 위대한 힘을 모욕하는 기분이 들었어요.”
조그마한 자극에도 지레 겁을 먹고 기절하던 꽃이 이만큼 의견을 피력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래서 그녀가 홀로 군락지를 회생시키겠노라 말했을 때 큰 걱정이 들지 않았었다.
굳이 상황을 되짚는 건 그녀의 의지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이 주변에 태초의 군락지가 그렇게 많다는 건 이곳이 본래 아주 살기 좋은 땅이었단 뜻이야. 금방 다시 자연의 원래 모습을 찾아가겠지. 씨앗들을 잘 부탁해.”
우린 길을 떠나야 해서 이제부턴 참골무꽃이 혼자 해내야 했지만 그녀는 그 점을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품에 안은 씨앗들을 바라보는 눈엔 설렘이 가득했다.
민들레를 통해 그토록 기다리던 연락을 받았다.
에트나를 필두로 한 온건파 베스탈리스들이 집결을 완료했다는 내용이었다. 그 수가 상당히 많다고 해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결국 그들은 동료들을 모으는 데 성공한 것이다.
후에 모인 이들은 아직 정화의 힘이 없는 상태이기에 곧바로 전투 중인 90번대 테라리움에 투입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비교적 거리가 가까우면서 제약 없이 머무를 수 있는 60번째 테라리움에서 대기 중이었다.
그들은 18번째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인 키르켄을 비롯하여 나와 연이 있는 곳의 지원을 받아 이동할 준비를 끝마쳤다고 했다. 수많은 이들을 안전하게 이송할 수 있는 마차나 그들이 이용할 식수, 식료품, 의료품 등이 마련됐다는 뜻이다.
난 모인 이들을 91번째 테라리움으로 옮겨 줄 것을 부탁했다. 이에 연락 담당자는 의문을 표했다.
목적지가 전쟁 중인 92, 93번째 테라리움이 아니라 멸망해 사라진 91번째 테라리움이니 궁금해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위험하기는 세 개의 테라리움 모두 매한가지였지만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을 91번째 테라리움은 대기와 어울리지 않는 장소이기도 했다.
“현재 101번째 테라리움에서 출발해서 거리상으론 91번째 테라리움이 가깝기도 하고… 뒷일은 제게 맡기세요.”
난 91번째 테라리움에 가지를 만들어 101번째 테라리움과 연결되는 경로를 만들 생각이었다.
참골무꽃의 배웅을 받으며 다시금 여행길에 올랐다.
하나의 테라리움이 정상화된 것만으로도 불의 위협이 놀랍도록 줄어들었다.
이전엔 가는 내내 쉴 새 없이 전투를 치러야 했다면, 지금은 적어도 숨을 돌릴 시간은 있었다. 더구나 불의 크기와 위력도 많이 줄어들어 전투가 좀 더 수월하기도 했다.
한마디로 불들의 레벨이 강제로 다운그레이드된 것이었다.
91번째 테라리움으로 향하며 하나의 의문이 끊임없이 내 머릿속을 떠다녔다. 하나의 가지를 더 만들어도 내 몸에 이상이 없을까? 정말 괜찮을까?
가지를 늘릴 때마다 작은 공간에 몸을 욱여넣는 듯한 불편한 느낌이 날 지배했던 게 떠올라 쉽사리 안심할 수 없었다.
“그건 네가 세계수의 힘을 빌리는 입장이기 때문에 불편한 거야. 오롯이 네 힘을 사용하는 게 불편할 리가 있겠어?”
내 영혼의 상태에 대해 주치의만큼이나 잘 알고 있는 실새삼에게 고민을 털어놓았을 때, 그는 그렇게 답했다. 본래 내 것이 아니니 답답할 수밖에 없다고.
내 것이 아닌 건 언제든지 놓아줄 각오를 해야 한다는 것과 같았다. 그러니 영혼은 이를 이질적이게 받아들여 이로운 것임에도 짐처럼 여긴다는 거다.
“네가 힘들어한다면 우리 드라이어드들이 가장 먼저 알아차리니까 걱정하지 마. 너의 가지를 만들어 냈을 때 우리가 느끼기에 너에게 조금도 해가 되는 점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럼 다행이고.”
실새삼의 조언에 의해 불안이 가시니 이젠 빨리 가지를 더 만들고 싶다는 두근거림이 내 마음을 채웠다.
“아직인가….”
온건파 베스탈리스 쪽에서 사람을 모으는 건 성공했다. 아직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지만 연락 담당자가 표현하길 아주 많은 수가 모였다고 했으니 기대해도 되겠지.
하지만 인페르노를 설득하러 간 스텔라에겐 아직 연락이 없었다. 베스탈리스들 중에서도 공략하는데 아주 난이도가 높은 자들일 거다. 그들은 분노와 과격의 집합체로 온건파들보단 협조할 마음이 많이 떨어질 것이다.
더구나 아직 그들의 수장인 애쉬가 건재하다는 게 문제였다. 애쉬는 스텔라에게 배운 대로 공포 정치를 펼치는 걸로 알고 있었다. 또한 같은 종족임에도 온건파들을 배신자라 부르는 데 서슴없었다.
스텔라와 에트나가 한자리에 모였을 때 흘렀던 불편한 기류를 기억한다. 세상에 공개적으로 모습을 드러내야 한다는 벽을 넘어도, 그들이 배신자라 칭하던 온건파와 협동해야 한다는 산이 남아 있으니 설득이 무척 힘들겠지.
부디 내가 애쉬의 발을 묶고 있던 게 스텔라에게 큰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머지않아 그녀에게 연락이 도착할 거라고 굳게 믿었다.
“어떤 느낌이에요?”
“저와 한 몸 같아요! 막 손에 쥐었을 때는….”
바곳은 새로운 무기에 대해 부쩍 늘어난 관심을 맘껏 표출했다. 아마 그가 내게서 무기를 얻을 세 번째 드라이어드라고 예상했는데 틀리지 않을 것 같았다.
그는 전투를 할 때면 메스키트와 데이지의 무기를 부럽다는 눈으로 바라봤고, 틈만 나면 그들에게 무기에 대해 물었다. 저렇게 안달이 나면 자기도 얻으면 될 텐데, 이따금 자신의 스태프를 바라보며 묘한 표정을 짓는 걸 보면 마음을 먹는 게 좀처럼 쉽지 않은가 보다.
91번째 테라리움에 거의 다다랐을 때였다.
바곳은 내게 독대를 요청했다. 단둘이서만 이야기하고 싶다는 그의 말에 올 것이 왔구나 싶었다.
마차 없이 오로지 두 다리로만 이동하다 보니 시간은 어느새 밤이었다. 멀리 불들이 풍등처럼 지평선 위를 둥둥 떠다니는 어두운 밤에 바곳이 이끄는 대로 조용하고 한적한 장소로 향했다.
그렇다고 너무 멀리 떨어지면 위험하기에 멀리 시들링과 애쉬가 보이는 지점에서 멈춰 섰다. 내가 없을 시 둘 사이에서 일어날 수 있는 분쟁을 방지하기 위해 위급 시 무기로 조화를 다스릴 수 있는 메스키트가 남았다.
솔직히 돌아가는 길엔 우리 셋의 관계가 이전처럼 삐그덕거리진 않았다. 분쟁의 불씨인 애쉬가 예상외로 자중했기 때문이다. 그는 쉴 새 없이 트러블을 발생시키던 전과 다르게 꽤나 조용히 지냈는데, 전투를 하다가도 멍하니 생각에 잠기거나 휴식 땐 이따금 혼자 멀리 떨어져 눈을 감고 있기도 했다.
뭔가 그에게 심적 변화가 일어난 거 같기도 했다. 어쨌든 싸울 일이 줄어 다소 평안해지긴 했다.
“그래, 할 말이 뭐야?”
난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바곳에게 물어봤다. 물론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그가 드디어 본래의 무기를 버리고 내게 새로운 무기를 받기로 결심했음은 알 수 있었다.
“제가 잘 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예상외로 그의 첫말이 이러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메스키트 님께서 무기를 버리는 건 쉽지 않을 거라고 하셨던 말이 제겐 조금 다르게 와닿았어요.”
바곳은 자신의 스태프를 바라보았다. 사신의 낫과 같은 형태, 그보다도 그곳에 박힌 민들레 꽃씨를.
“이 무기는 많은 일을 해 주고 있어요. 제가 변화할 수 있게 도울 뿐만 아니라….”
바곳은 다른 드라이어드들에게선 거의 찾아볼 수 없는 턴 오버 형태의 드라이어드였다. 경우에 따라 공격형과 지원, 회복형을 넘나들 수 있는 드라이어드.
그 시작은 단델리온이 전한 신의 계시란 뜻을 담은 스태프 조각, 꽃씨에 의해서였다.
개량종으로 태어난 바곳이 본래 턴 오버 성질을 지녔다곤 볼 수 없었다. 왜냐하면 종자 보관소에서 만났던 다른 바곳은 그 힘을 일깨우지 못했고 그로 인해 결국 패했기 때문이다.
“제희 님의 새 운명으로의 출발을 기원할 수 있었잖아요.”
그의 말에 따라 스태프에서 옅은 금빛이 넘실거리다 사라졌다.
바곳이 모체 신화를 밑거름 삼아 새로 신화를 만들었을 때, 그 무기의 형태가 거대한 사신의 낫 형태로 변화했었다. 그의 신화는 본래 운명의 실을 끊어 내는 자였으므로 내게 주어진 운명과 다름없는 제이를 끊어 낼 수 있었다.
그리고 현재 제이는 바곳이 붙들고 있는 상태였다. 그가 강제적으로 끊어 내긴 했으나 본래 하나로 합쳐지려는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내가 조금이라도 제이의 본래 행보와 가까워지려고 하면 득달같이 하나가 되기 위해 달려들었다.
그걸 최대한 수문장처럼 막고 있는 게 바곳의 스태프, 아니 데스사이드의 역할이었다.
그가 무엇을 고민하는지 알 것 같았다. 바곳에게 변화가 생긴다면 다른 드라이어드들보다도 더 무기에 변화가 먼저 생겼다. 내 드라이어드들 중 가장 많이 무기의 형태가 바뀐 꽃이기도 했다.
무기는 바곳의 성장 역사를 고스란히 나타낼 뿐만 아니라 그가 이룬 업적이기도 했다.
“무기를 버린다는 게….”
그러니 그에겐 함께한 시간을 모두 내던지는 걸로 다가왔을지도 모르겠다.
“넌 버릴 필요가 없어.”
성장하며 많이 어른스러워졌지만 그 안엔 여전히 울보 바곳이 숨어 있었다. 그 모습을 꼭 버려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겁이 많은 모습은 한편으론 그가 그만큼 신중한 행동을 이끌어 낼 수 있도록 도왔으니까. 과거가 있기에 지금의 바곳이 될 수 있었다.
“넌 애초에 나의 드라이어드였잖아?”
내가 만들어 낸 열매로 재탄생한 드라이어드. 그 이름조차도 제이가 붙어 있는 유일한 오리지날 드라이어드였다.
“네 무기는 네가 스스로 만들어 냈기에 전적으로 세계수에게서 얻었다고 볼 수 없어.”
그가 막 태어났을 때부터 사용하던 꽃무리의 스태프는 세계수가 주었을지는 몰라도, 스스로 신화를 재창조해 내며 변모시킨 스태프는 이전과 같은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므로 세계수가 준 소망이라 보기 어려웠다.
“이미 네 무기는 너와 내가 만든 거야. 중요한 건 받아들이는 마음가짐이겠지.”
내 말에 바곳은 맑게 웃으며 눈을 감았다. 그러자 그의 주위로 검은빛의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앞서 데이지와 메스키트에게 세계수의 소망이 아닌 내 소망을 전했어. 그러니 네가 완전히 마음을 잡을 수 있도록 너에게도 내 소망을 전할게.”
운명을 리셋시키는 바곳의 힘. 그의 힘은 다시 나아가게 만드는 힘이었다. 실패해도 주저해선 안 된다. 언제나 제 자리에만 머물러 있다면 도태될 수밖에 없었다. 고여 버린 시간이 어떠한 결과를 야기하는지 인삼 군락지에서 충분히 확인했었다.
그가 언제나 우리 팀에서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존재가 되기를. 그리고 그 변화에 겁내지 않고 도전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질 수 있기를.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실패한다고 모든 게 끝나는 게 아니었다. 항상 새로운 미래의 가능성을 열어 둬야 멈추지 않을 수 있었다.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며 실패 요인을 피하면 된다.
중요한 건 도전하는 마음을 잃지 않는 것이었다. 모든 것이 새로운 내게 가장 필요한 건 도전하는 걸 겁내지 않는 마음이었다. 약속된 길을 걷는 제이와 다른 내가 개척해 나가는 길.
바곳의 스태프에 박혀 있던 단델리온의 스태프 조각이 마침내 떨어져 나갔다.
사신의 낫으로 외형이 달라졌을 때처럼 다시금 무기 주위를 새까만 빛이 아롱아롱 감싸기 시작했다. 봉의 길이가 길어지고 땅에 닿는 아래쪽이 펼쳐진 한 쌍의 날개와 두 마리의 뱀이 휘감는 모양으로 바뀌었다. 어디선가 많이 본 모양새였다.
하나의 봉 양 끝에 낫과 의술을 상징하는 형태가 공존했다. 턴 오버 형질을 지닌 그에게 더없이 걸맞은 무기의 형태였다.
내게서 도전의 마음을 받아 무기의 형태가 새롭게 변화하는 걸로 끝나지 않았다. 바곳은 여전히 검은 빛에 감싸여 있었다. 그 빛이 안개처럼 흩어졌을 땐, 마침내 바곳의 등 뒤에 생겨난 두 쌍의 날개를 확인할 수 있었다.
무기가 바뀌며 그 역시 한계를 넘어 새로이 각성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