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라리움을 떠나기 전, 세계 지도를 펼쳐 101번째 테라리움의 위치를 확인했다. 주위가 전부 소멸을 뜻하는 X 표시로 가득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지도는 꽤나 오래전 거라 아직 101번째 테라리움엔 X 표시가 없었다.
난 그 위에 펜을 들어 확신의 O 표시를 했다.
최근 만들어진 지도들엔 101번째 테라리움이 멸망으로 표시되어 있겠지만 적어도 내 지도에선 아직까지 살아 있었다. 101번째 테라리움이 회생한 걸 알게 된다면 고향을 떠났던 주민들이 돌아올까?
위험을 피해 눈물을 머금고 고향을 떠난 이들도 많을 것이다.
28번째 테라리움도 101번째 테라리움만큼이나 장시간에 걸쳐 망가졌지만 테라리움이 다시 잘되는 걸 듣게 된 사람들이 고향을 찾아 종종 돌아오는 경우가 있었다. 이미 그들이 살던 집은 사라진 지 오래였으나 그저 테라리움을 다시 걷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는 이들이 많았다.
사람들이 돌아오고 언젠간 생태계도 돌아오겠지. 그리고 오랜 세월이 지나 과거 위용을 되찾고 사라져 버린 태양의 보석도 다시금 가지 끝에 맺힐지도 모르겠다.
이어서 현재 방어전이 진행 중일 92번째와 93번째 테라리움을 짚었다.
시기로 따지면 지금쯤 온건파 베스탈리스들과 스텔라가 사람들을 포섭하여 이곳에 합류했거나 오는 중이어야 했다.
카수스를 잡겠다며 101번째 테라리움에서 많은 시간을 소모하긴 했지만, 결론적으로 보면 90번 대 테라리움에 아무 이득도 없는 건 아니었다. 가장 중요한 건 무너진 축복의 균형을 다시 잡게 되었다는 거다.
90번 대 테라리움이 엄청난 습격을 받는 이유는 방파제 역할을 해 줄 뒷번 대 테라리움이 전부 무너지며 고삐 풀린 불들이 전부 그곳으로 쏠렸기 때문이다.
어쩌면 가지가 생기고 비록 세계수의 축복과 결이 다르긴 하나 불을 견제하는 힘이 퍼져 나가게 되며, 90번 대 테라리움을 습격하는 기세도 한풀 꺾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해야 알 수 있겠지만.
혹시나 내가 없는 사이 101번째 테라리움을 찾아올 사람들을 위해 곳곳에 지뢰의 위치가 표시된 지도를 붙여 두었다. 이후 돌아갈 힘을 비축하기 위해 휴식을 충분히 취했다.
시들링의 드라이어드들이 날 어려워하는 게 느껴졌다. 물론 그들은 원래도 시들링을 대할 때와 날 대할 때 차이를 두긴 했지만 지금은 보이지 않는 벽이 생긴 듯했다.
그들의 입장도 충분히 이해되었다. 그들은 아직 세계수와는 다른 신의 힘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고 있었다.
무턱대고 환영하자니 자신들의 신을 모독하는 행위가 될까 우려가 되고, 거부하자니 본질 자체는 세계수의 힘과 크게 다르지 않아 오히려 세계에 이득이 되는 힘이기에 완전히 거부할 명분이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계수 가지와 마찬가지로 검은 가지는 불로부터 땅을 지켜 주고 있었다. 널리 세계를 이롭게 하라는 세계수의 뜻에 완벽히 맞아떨어졌다.
“이곳을 계속 세계수의 101번째 테라리움이라 부를 것인가?”
드라이어드들이 어려워하는 것과 별개로 시들링은 아무렇지도 않게 곁에 다가와 말을 걸었다. 그는 그다지 많은 것들을 궁금하게 여기지 않았다. 내가 쓰는 힘이 무엇인지, 내 정체가 무엇인지 명쾌하게 설명해 주지 않았기에 궁금할 법도 한데 묻지 않는다.
그의 태도가 신기하긴 했지만 한편으론 날 편하게 만들었다.
마치 알던 것과 다른 면모를 발견했어도 그저 나는 나일 뿐이라고. 드루이드 제희나 신의 권능을 사용하는 제희나 어차피 다 같은 제희라고 대해 주는 듯했기 때문이다. 그래, 난 나다.
난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물었다.
“무슨 소리야?”
“이곳은 이제 세계수의 가지가 사라졌으니 세계수를 상징하는 이름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시들링이 내가 머리를 기댄 어깨에 지나치게 집중하는 게 느껴졌다. 근육이 경직되어 딱딱해졌다. 우리 사이에 손을 잡는 것 정도의 스킨십은 있었지만 갑작스럽게 다정하게 대하는 내 태도에 당황한 듯했다.
우습게도 내가 가지의 힘을 펼칠 땐 이만큼 당황하지 않더니.
온몸이 경직되어 시선도 앞만 본 채 어쩔 줄 몰라 한다. 그 반응이 그다지 재미없지는 않아 내버려두었다.
“그런가? 그럼 어떻게 불러야 할까?”
“네가 만든 가지니… 너의 1번째 테라리움이 맞다고 생각한다.”
테라리움의 모든 명칭은 세계수에 가까운 가지의 순번대로 정해졌다. 그러니 시들링의 말도 어느 정도는 일리가 있었지만.
“내 첫 번째 테라리움은 이곳이 아닌걸. 더구나… 이전에 세계수를 기준으로 테라리움의 이름을 짓는 건 내게 맞지 않다고 생각해. 왜냐하면….”
세계수는 기본적으로 제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니 가지별로 거리 측정이 가능했다. 하지만 난 쉴 새 없이 모험을 하며 이곳저곳을 움직인다. 물론 첫 번째로 내가 만들어 낸 가지이기에 의미를 다르게 한다면 이곳이 1번째 테라리움이라 불리는 것도 맞긴 했다.
그런데 어쩐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번호 법은 수많은 차별을 낳았다. 과거 불이 침범하지 않은 세계에선 모든 번호가 동등하지 않았을까? 물론 세계수와 지나치게 가까운 한 자릿수 테라리움의 사정은 달랐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처럼 지나치게 뒷번 대 테라리움을 무시하는 경향은 거의 없었을 거라 생각한다.
이곳이 나의 첫 기념비적인 장소란 점에서 애틋하긴 하나 다른 이들도 그렇게 여기진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곳을 유달리 사랑하기에 첫 번째 가지를 틔운 게 아니었다.
시기와 상황이 맞아떨어지고 어쩌다 보니 101번째가 첫 번째가 된 것뿐이었다.
“있잖아. 사실 내가 살던 세계는 이곳이 아니야.”
조용조용, 아무도 듣지 않는 틈을 타 시들링에게 내 비밀을 털어놓았다. 드라이어드들만 알 뿐 나와 가장 가까운 길드원들도, 보좌관들도 자세히는 모르는 비밀.
왜 갑자기 이걸 털어놓게 되었냐고 묻는다면…. 내가 신의 힘을 펼쳐도 조금도 변하지 않는 그의 태도 때문이다. 그래서 그라면 큰 반향 없이 내 상황을 받아들여 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가.”
“이상하지 않아?”
“난 보통 사람들과 달리 드라이어드에게 길러져 드라이어드처럼 자라 왔다. 너 역시 내가 이상하다고 말한 적이 없지 않은가?”
“그렇구나.”
시들링이 내게 아무것도 묻지 않은 이유가, 날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인 이유가 이 때문이었나 보다. 내가 먼저 그를 아무렇지 않게 대했기 때문에 그 역시 나를 오롯이 나로 바라보는 거다.
“그래도 신기하긴 해. 의문을 가질 법도 하잖아.”
“어차피 다음 이야기를 더 말해 줄 게 아닌가?”
“그건 맞아. 어쨌든 난 이 세계에서 태어난 사람이 아니야. 이곳과 전혀 다른 세계에서, 세계수도 드라이어드도 없는 세계에서 태어났고 자랐어. 그러다 이 세계에 온 계기는… 그런 말을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운명이었대. 언젠간 이곳으로 돌아와야 할 운명.”
세계수의 묘목으로써 세계수가 있는 곳으로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돌아가야 할 운명. 어쩌면 영혼이 태어난 존재 의의나 다름없기에 이것만큼은 운명을 무시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내가 살던 세계에도 수많은 도시와 마을이 있어. 그런데 이곳처럼 몇 번째 테라리움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아. 그래서 말인데… 내 가지로 회생시킨 테라리움에 더 이상 번호가 붙지 않았으면 좋겠어.”
테라리움의 위력을 번호로 차별하는 게 얼마나 부질없는지 몸소 증명해 보인 것이나 다름없었다.
28번째 테라리움은 한 자릿수 테라리움에 비견해도 될 정도로 축복의 힘이 강하다. 더불어 후발대로 영입한 60번째 테라리움도 나날이 그 위력이 상승하고 있었다. 결국 다이아를 많이 먹이면 장땡이었다.
테라리움의 번호별로 차이가 있다면 겨우 축복의 위력 크기 정도인데, 편견이 심해지며 앞번 대는 사람들이 많이 몰려가 갈수록 세가 커질 수밖에 없었고 뒷번 대는 이주민이 늘어 쇠퇴되어 갈 수밖에 없었다.
그로 인해 한 자릿수 테라리움을 비롯하여 1번째 테라리움은 지나치게 많은 권력을 가지게 되었다.
중앙 행정 관리부? 최근 행정 관리원들에게 소집령을 내리기 전까지 모든 테라리움의 행정은 독자적으로 굴러갔다. 어느 테라리움이 망해 가도 구제해 주지 않고 그렇다고 잘 나간다고 뭘 떼먹지도 않고.
문제가 생겨도 앞서 나서지 않으니 과거 28번째 테라리움이 내가 갈 때까지 그 꼴이 되어 있었겠지.
그러니 그간 느낀 바론 하는 일에 비해 너무 많은 권력이 몰려 있다는 생각을 받았다.
언젠가 많은 세월이 흘러 내게 많은 가지가 생기고 그곳 테라리움들의 생활이 전반적으로 안정화가 된다면, 나의 첫 번째 테라리움이라 불리는 곳이 지금의 1번째 테라리움과 같은 전철을 밟지 않을 거라 확신할 수 있을까?
“네 말처럼 이젠 세계수의 101번째 테라리움이라고 부르지 않는 게 맞겠다. 그러니 이름을 새로 지어 줘야겠지. 번호가 붙지 않는 새로운 이름.”
이곳의 가지엔 희망을 담았다. 그러니 테라리움의 이름에도 희망이 붙으면 좋을 것 같다. 이름 따라간다는 말도 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