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61화 (561/604)

불이 모두 사라진 테라리움은 적막했다. 을씨년스러운 적막이 아니라 무척이나 평화로운 적막이었다. 어쩌면 이 테라리움이 여태 바라왔을 휴식의 적막.

“누가 제게 설명 좀 해 주세요.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건가요?”

시들링의 드라이어드들이 가지 밑에 오손도손 모여 관찰 삼매경이었다. 자기들끼리 논의를 해도 답이 나오지 않는지 끝내 칼미아가 바짝 내 옆에 붙어 물었다.

“세계수가 한 일은 아니에요.”

“그럼 드루이드님이 한 일은 맞는다는 건가요?”

“그렇죠… 뭐.”

“말도 안 돼…. 하지만 이렇게 눈으로 확인이 가능하니 말이 안 되는 건 아닌데….”

“설명하자면 좀 길어요.”

정말 길었다. 무엇보다도 처음부터 지금까지 직접 경험해 본 내 드라이어드들과 달리 다른 이들을 이해시키는 과정이 어려울 것 같았다.

“결과만… 놓고 보자면… 좋은 일이니… 그냥 넘어가….”

어떻게든 답을 얻어내고 말겠다는 칼미아를 보며 블루 멜로우가 낙천적으로 말했다.

“이 가지에서도 열매가 열려요? 특이한 드라이어드가 태어나려나?”

“이걸 드라이어드로서 어떤 관점에서 봐야 할지 모르겠네. 일단 세계수의 의지는 아닌 거잖아? 그럼… 안 좋은 건가?”

드라이어드들의 생각은 각기 달랐다. 이미 저들만 하더라도 생각이 갈리는데 사회로 퍼져 나간다면 얼마나 큰 파장이 일어날까?

“애쉬.”

난 그들은 잠시 내버려두고 애쉬를 찾았다.

“이 테라리움을 베스탈리스들에게 줄 거야.”

그 말에 다시금 주변에 정적이 흘렀다.

“테라리움을 통째로 베스탈리스에게 넘긴다고?”

“물론 인페르노에게 넘기겠다는 소리는 아니야. 과격 행동을 멈추고 사회의 일원이 되기로 한 베스탈리스들 한정이야. 너도 알잖아. 베스탈리스는 이제 새 힘을 각성했어. 세계가 원하던 힘을 말이야. 불을 정화할 수 있는 힘이 있다면 머지 않아 베스탈리스는 드루이드와 동등한 대우를 받게 될 거야.”

허튼 소리 말라던 식의 초반에 비하면 지금은 그나마 경청하는 척이라도 했다. 아마도 수없이 많이 일어난 변화의 물결을 몸소 체험한 덕이겠지.

“난 앞으로 이미 멸망한 테라리움에 수없이 많은 새로운 가지를 만들어 낼 거야. 세상의 반이 불에 의해 멸망했다고 해. 그렇다는 건 지금 활성화된 테라리움 만큼의 수가 버려져 있다는 거겠지. 테라리움 하나론 수많은 베스탈리스를 전부 포용할 수 없지만 수가 늘어난다면 충분히 가능할 거야.”

애쉬는 곱지 않은 태도로 과수원 내부를 힐긋 눈짓하고는 말했다.

“다 버려진 걸 넘기겠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이해돼. 여길 사람이 살만한 곳으로 복구하는 데엔 많은 시간과 인력이 소모될 거야. 당장 테라리움 내부에 파다하게 깔린 지뢰를 제거하는 것만으로도 힘이 많이 들 거야.”

완전히 망가져 버린 이 테라리움을 복구하는 데엔 정말 많은 힘이 필요할 것이다. 파괴 정도도 심하지만 무엇보다도 주변 테라리움이 없어 고립된 지역이니 물자를 이송하는 것도 힘들겠지.

“하지만 너희 인페르노가 망가뜨려놨던 28번째 테라리움을 생각해봐. 최근 그곳을 네가 본 적이 있는진 모르겠지만 1년 만에 다른 테라리움 못지않게 발전을 이룩했어.”

수없이 많은 다이아를 투자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이 가지의 장점은 다른 세계수 가지와 다르게 유지 비용이 들지 않는다는 거야. 가지의 품질을 유지하기 위해 매번 주민들에게 세금을 걷을 필요가 없어. 그렇다는 건 아주 많은 가능성이 있다는 걸 뜻하지 않겠어?”

세계수는 각지에 퍼뜨린 가지를 통해 다이아를 흡수하며 사라져가는 힘을 유지했다. 하지만 난 그럴 필요가 없었다.

“세금을 낼 필요가 없고, 무엇보다도 불의 위협으로부터 안전하게 지낼 수 있다는 점에서 삶의 터전의 기본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다고 봐. 물론 난 만들어 놓고 손을 떼겠다는 소린 아니야. 가지를 틔운 테라리움은 제대로 자리를 잡아갈 때까지 내가 지원할 거고.”

내 말을 천천히 듣고 있던 애쉬가 불쑥 내게 물었다.

“넌 도대체 뭐야?”

‘뭐 하는 사람이야?’가 아닌 ‘뭐야?’라니. 마치 사람으로도 안 보인다는 그 질문에 살짝 헛웃음이 나왔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려는 것뿐이야. 빈말로라도 평범한 드루이드라곤 못 말하겠네.”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그래서 네가 얻는 이득이 뭔데? 그렇게 긁어모은 베스탈리스들을 지배하려는 건가?”

내가 인페르노의 수장 자리를 노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아니면 베스탈리스들의 위에 군림하는 걸 노리고 있다고?

“너라면 그렇게 생각할 거라 예상은 했어. 넌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녀석이니까. 그 수단에 생명이 쓰인다 하더라도 넌 신경도 쓰지 않지. 하지만 난 목적이 생명인 사람이야.”

궁극적으론 이 세계에 평화가 오길 바라고 있다. 이 세계는 정말 매력적인 곳이었다. 아직 가보지 못한 곳도 많고 모르는 이야기도 많고 만나보고 싶은 존재들도 많았으며 하고 싶은 일도 많았다.

그런 세계가 이제 반만 남았다는 게 얼마나 슬픈 일인가.

“일단 난 어떤 결과로 인해 얻어지는 모든 금전적 이득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이야.”

가장 단적인 이득의 예시인 금전에서 내가 완전히 자유롭다는 점에서 남들과 다르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믿기 어렵겠지만 난 지금 이 공간을 전부 다이아로 채우고도, 아니 몇십, 몇백 개를 채우고도 남는 사람이 나야.”

듣고 있던 엘더가 어깨를 움찔 떨었다.

“이 세계에 더 이상 다이아를 화폐로 사용하지 않는 날이 온다면 달라지겠지만, 적어도 그때까진 내게 다이아는 그다지 가치가 없어.”

“하, 네 말을 어떻게 믿지?”

“당장 내가 운영하는 28번째와 60번째 테라리움엔 세금이 없다는 사실이면 되려나? 16번째 테라리움은 기존에 운영해 오던 방침이 있으니 곧바로 세금을 없애는 건 무리였지만 낮추는 수준으로 합의를 보긴 했고… 그것보다 나 혼자 테라리움 3개를 가지고 있는 걸 보면 답은 나온 거 아니야?”

테라리움은 다이아 먹는 괴물이라 어지간한 사람이 아니라면 행정 관리원을 맡을 수 없었다.

“난 베스탈리스들 위에 군림하길 원하는 게 아니야. 그들에게 무언가를 착취할 생각이 전혀 없다고. 하루 빨리 그들에 대한 세상의 인식이 달라져서 사회의 일원이 되었으면 해. 그럼 불을 퇴치하는 속력은 더 올라갈 테고 세계가 망가지는 속도도 줄어들겠지. 궁극적으론 세계의 모든 불이 사라지길 원하지만 베스탈리스들이 전력으로 포함되었다고 하더라도 그건 쉽지 않을 테지.”

언젠가는 모두 힘을 합쳐 불을 몰아내는 순간이 올까?

“내가 가진 능력은 베스탈리스들에게 극대화되어 큰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난 그들에게 집중한 거야. 이미 드루이드들에겐 세계수라는 신이 있잖아?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힘이 신에 가깝다고 볼 수 있어.”

난 신의 힘을 가지고 있다. 그 말에 오히려 시들링의 드라이어드들이 더 놀랐다.

“나만이 할 수 있는, 내가 해야 할 일이라 생각해서 베스탈리스들을 돕는 거야. 아, 생각해 보니 이득을 완전 노리지 않는 건 아니네. 난 인페르노는 사라졌으면 좋겠거든. 강경파 베스탈리스들의 파괴적인 행동은 여러모로 내게 피해를 많이 줘.”

내 모험의 최악의 빌런은 불이 아니라 인페르노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지. 물론 지금은 카수스가 빠르게 그 순위를 차고 올라왔지만.

“그런데 완전히 탄압해서 없애는 것보다 그 원인을 제거해서 더 이상 그런 행동을 못 하게 하는 방식으로 접근하는 거라고 생각해 줘.”

어차피 지금 이렇게 말해봤자 애쉬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을 거란 걸 안다.

“네 눈으로 봤잖아. 내가 할 수 있어. 베스탈리스들에게 새 힘을 주고 살 곳을 마련해 주고. 드루이들에게 세계수가 있듯 내가 베스탈리스들와 함께 할 수 있어. 다른 삶을 만들어갈 수 있는데 아직까지 인페르노를 고집할 거야? 그러는 넌 대체 왜 인페르노의 수장을 하는 건데?”

그들이 갖는 불만의 대부분을 해소해줄 수 있는데 굳이 악질적인 행동을 일삼는 이유는?

내 질문에 애쉬는 인상을 찌푸리며 입을 다물었다.

“네게도 언젠가 내 난쟁이들을 보내주고 싶어. 난쟁이들이 있다면 넌 더 이상 내 도움 없이도 힘을 마음껏 사용할 수 있을 거야. 어쩌면 아직까지 내가 널 거부하고 나를 따라 난쟁이들까지 널 거부하는 이유는… 그 힘을 올바르게 사용할 거란 확신이 없어서겠지. 차라리 모든 걸 파괴해가며 강제로 지배하려 들지 말고… 내게 도움을 요청해. 내가 도와줄게.”

그의 눈을 끈질기게 마주하며 말을 이었다.

“그전엔 도움을 요청해도 답해줄 이가 없었다면 이젠 아니야. 내가 도와줄게. 그러니까 원하는 게 있다면 차라리 내게 말을 해. 그렇게 악행을 일삼아 봤자 세상은 더욱 더 베스탈리스들에게 벽을 칠 거야. 네가 하는 행동이 정말 베스탈리스를 대신하는 게 맞아? 수장이잖아. 수장으로서 네 독단적인 행동이 그 밑의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지 진지하게 고민해 보란 말이야.”

애쉬는 바뀔 수 있을까? 언젠가 우리가 화합을 도모하는 순간이 오게 될까?

우리의 대화는 소득 없이 끝났다.

가지는 자라났고 이로 인해 발생할 수많은 사건은 아직 대기 중이었다.

이야기를 끝낸 후 난 천천히 내 몸을 살피며 생각했다. 테라리움을 소유하며 세계수 가지를 내 영혼에 품을 땐 어느 정도 벅찬 느낌이 있었다.

하지만 나만의 가지를 틔운 이후엔 아직 그런 악영향은 없었다. 그렇다면 제한 없이 마구잡이로 가지를 만들어 내도 되는 걸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나의 모든 행동엔 영혼의 제약이 있었고 그 여파를 몸소 경험했기에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영혼이 감당할 수 없어 피를 토하고 쓰러지고. 뭐든 과한 행동은 독이 되어 내게 다가왔다.

새로운 가지를 만들어내는 일은 어떨까? 이 또한 영혼의 제약을 받게 될까? 아니면 아무런 상관이 없을까? 혹은 만들어 내면 낼수록 내게 이득일까?

세계수는 자신과 연관된 행동에 간간히 핸드폰을 통해 알림을 보내며 힌트를 준다. 하지만 나만의 가지를 만들어 내는 일은 세계수와 관련이 없기에 어디서도 힌트를 얻을 수 없다. 오롯이 나 혼자 스스로 알아내야 하는 거다.

“아직까지 괜찮다면… 가지를 하나 더 늘리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101번째 테라리움이 갖는 가장 큰 문제점은 바로 고립이었다.

그렇다면 이를 이어 줄 수 있는 경로를 만들어 준다면….

“90번대에 가지를 하나 더 만들어 낸다면….”

내 중얼거림을 들은 시들링의 드라이어드들은 이제 숫제 별종을 보는 표정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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