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가지의 첨단부터 가루가 되어 떨어져 내렸다. 새하얀 가루는 소금처럼 보이기도 했다.
무너지며 가지의 속이 드러났는데 안은 텅 비어 있었다. 마치 지금 눈앞에 보이는 게 단순한 껍질이나 다름없다는 것처럼.
바스락 바스락, 처음엔 바람에 풍화되듯 무너져 가는 게 느렸지만 점점 속도가 빨라져 이내 잔가지를 넘어 본가지까지 무너져 내렸다.
세계수의 가지를 소멸시키는 광경은 누군가에겐 신성 모독으로 다가올 수 있었다. 역할을 다했더라도 신의 부속품이기에 존재 자체가 갖는 의의가 대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자리의 누구도 이를 지적하는 자가 없었다.
본체는 모두 박살 나 사라지더라도 그 주위에 피어올랐던 검은빛의 아지랑이가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꼭 가지의 그림자만 남은 모양새였다.
껍질을 버리고 새로운 알맹이를 채우기 위해선 재료가 필요했다.
메스키트가 의지를, 데이지는 용기를 뼈대 삼아 형체를 만들어 냈던 것처럼, 101번째 가지가 있던 곳에 새로 무언가가 자리 잡기 위해선 그 중심이 되어 줄 게 있어야만 했다.
세계수의 가지를 빌려 쓰는 게 아닌 나만의 가지를 만들어 내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드라이어드에게 새로운 무기를 만들어 주었던 것처럼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무척 생소한 일.
난 형체가 반쯤 사라진 가지를 바라보다 눈을 감았다.
“심장이 너무 두근거려서 숨이 막힐 지경이야….”
어쩌면 앞으로의 내 행보에 큰 파란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시작점이 되는 순간일지도 모른다.
지금 나만의 가지를 피워 내는 걸 성공한다면 앞으로는 더 많은 가지를 만들어 낼 수 있겠지. 이미 세계수의 가지가 자리를 떠난, 죽음만이 가득한 대지가, 그 아무 희망도 남지 않는 대지가 내겐 본 무대나 다름없었다.
앞으로 땅을 일구고 생명을 틔울 개척의 땅이 세계의 절반이나 되었다.
본체가 나무인 세계수가 널리 가지를 뻗는 것 정도는 쉬운 일일 터지만, 난 내 영혼은 묘목이라 해도 몸은 아직 인간이었다. 세계수처럼 가지를 뻗는다는 건 어느 정도 내 존재의 의의에 대해 재정립이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거였다.
나 자체가 이 행위가 이질적임을 느낀다면 가지를 만들어 내는 건 더욱 더뎌질 수밖에 없었다.
“내가 나무가 되어….”
처음 그래프트를 펼칠 때도 그랬다.
드라이어드의 영혼을 내게 접붙인다는 개념은 막 설명을 들었을 때만 해도 도저히 그 그림이 상상이 되지 않았었지.
하지만 그래프트는 어렵게 여겼던 것이 무색하게 물 흐르듯 진행되었다. 모든 건 이미 예정되어 있는 일처럼. 당연히 할 수 있는 일처럼.
그러니 가지를 피우는 일 또한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내가 당연히 할 수 있었던, 해야 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다.
아티팩트를 만들고 드라이어드 열매를 개화하고 영혼의 연결을 맺었던 모든 일들이 이 세계에 처음 넘어온 내게 생소했던 일이지만 지금은 당연한 게 된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한결 편해지며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용기가 샘솟는다.
“이곳에 피워 낼 나의 첫 번째 가지는….”
첫 시작, 기념비적인 순간, 그 처음을 장식할 것은….
수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축복의 힘이 약해져 불의 침입에 황폐화된 뒤번대 테라리움들, 번호만으로 차등이 생기는 세계, 사라져 간 수많은 생태계, 세계의 시작부터 함께했으나 이젠 흔적도 찾아보기 힘든 태초의 군락지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들어 애쉬를 바라봤다.
아직까지 많은 테라리움이 있으나 어느 곳에도 마음 편히 발붙일 곳이 없는 베스탈리스들.
나와 눈이 마주한 애쉬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 순간 왜 자신을 바라보는지 의문이 생긴 거겠지.
불이 침입하기 전엔, 세계수와의 거리와 상관없이 모든 테라리움이 평등하지 않았을까?
번호가 세 자릿수에 달하는 이 101번째 테라리움에도 대단한 역사가 숨어 있었고 과거엔 화려하게 번창했다고 했었다.
사아아.
마침내 과수원에 자리한 모든 가지가 가루가 되어 사라져 버렸다.
모든 마음의 준비를 끝낸 나의 어깨 위로 묵직하면서도 다정한 손이 내려앉았다. 고개를 드니 언제나처럼 나의 의지가 되어주는 메스키트가 인자한 얼굴로 날 바라봤다. 무엇을 하든 넌 할 수 있을 거란 마음이 내게 전해졌다.
본래 자리하고 있던 의미 없는 가지를 치워 내고 막을 내림으로써 이곳은 이제 ‘셧다운’되었다.
이곳을 재부팅할 시간이었다.
사박, 사박.
하얀 백옥 가루 위를 사뿐히 즈려밟고 가지가 사라진 곳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바곳이 눈에 들어왔다. 모두가 새로운 무기에 대해 한마디씩 거들 때에도 그는 자신의 스태프를 바라보며 한없이 고민에 빠졌었다.
텅 빈 공간을 보며 잠시 사색에 잠겼던 바곳이 이내 무언가 결심한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어쩌면 지금 일이 마무리되었을 때, 바곳이 새로운 무기를 받을 세 번째 드라이어드라는 직감이 들었다.
이곳은 이제 멸망했던 과거를 잊고 다시 시작할 준비가 되었다. ‘리셋’, 모든 걸 지워 버린다는 의미에서 파괴적인 뜻을 지니고 있으나 한번 끝을 봐야 시작할 수 있고 초기로 돌려 다시 시작한다는 점에서 창조적인 뜻도 지니고 있었다.
먹통이 된 기계를 처리할 땐 리셋만 한 게 없었다.
“여긴 제희 님에 의해 다시 태어날 거예요.”
데이지가 기대가 가득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이미 가지가 사라져 버려 텅 빈 곳을 바라보는 데이지의 눈에는 조금의 아쉬움도 없었다. 그녀는 오히려 아무것도 없는 그곳에서 새로운 희망이라도 발견한 듯 콧노래를 부를 것 같은 얼굴을 했다.
아무것도 없었던 곳에 세계수의 가지가 뻗어 나오며 문명이 싹튼 것처럼 이곳도 다시 찬란한 문명을 만들어 낼 준비가 되어 있었다. ‘리플레이’, 다시 해낼 수 있었다.
“망설일 필요 없다. 네 마음만 준비되어 있다면 세계는 변화를 받아들일 거다.”
실새삼이 내 손을 잡아 가지가 있던 곳으로 이끌며 말했다. 그래, 모든 준비는 끝났다.
이젠 변화의 힘에 오롯이 나를 던질 차례였다. 이 모든 공간이 나와 하나로 연결된다. ‘로그인’, 이곳은 이제 나로부터, 나의 힘으로 다시 태어난다.
첫 기념비적인 장소에 가장 어울리는 건 애초부터 이미 정해져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건 희망, 모든 생명들이 앞을 향해 걸어 나갈 수 있도록 만드는 원동력.
이곳은 앞으로 사라져 간 테라리움들의 희망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마음먹자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던 검은 빛무리들이 해일처럼 요동치기 시작했다.
가지를 이룰 뼈대는 희망, 무슨 일이 있더라도 마지막까지 쓰러지지 않을 나의 첫 가지.
재앙의 씨앗이 새싹을 틔웠던 곳이었으나 이젠 희망이 드리울 곳으로 변화하리라.
연결된 공간이 이에 화답하듯 가볍게 진동하는 게 느껴졌다. 땅이 흔들리고 군데군데 금이 가더니 이윽고 쪼개져 삐죽 새까만 무언가 머리를 내밀었다. 마치 드라이어드 열매를 개화했을 때 껍질을 뚫고 봉긋 솟은 새싹을 처음 마주했을 때처럼 강한 설렘이 가슴속을 가득 채웠다. 어쩐지 반가움에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안녕? 그렇게 인사를 해 주고 싶었다.
모든 이들이 죽음의 땅을 뚫고 뻗어난 새로운 생명의 태동에 집중했다.
처음은 성장이 더뎠던 그것이 순식간에 긴 몸체를 자랑했고 이윽고 천장에 닿을 정도로 자라났다. 세계수 가지만큼이나 잔가지가 풍성하고 위용이 대단한 거대한 몸체가 마침내 모두 앞에 드러났다.
세계수 가지가 백옥 같은 아름다움이라면 내 가지는 흑요석 같은 영롱함을 지니고 있었다.
흑요석, 어떤 태양의 가호도 담을 수 있다는 신비의 보석. 이처럼 이 가지는 그 아래 모든 걸 품을 수 있는 포용의 가지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 누구나 희망을 가질 수 있고 그 누구나 가지 아래 평등하게 축복을 누릴 수 있기를.
가지를 처음 봤을 때부터 우린 아주 질긴 유대감으로 엮여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마치 그래프트를 펼칠 때 접붙인 드라이어드의 영혼이 나와 한 몸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처럼, 이 가지 또한 나의 몸 일부라는 느낌이 들었다.
가지에선 엄청난 생명력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세계수 가지를 손에 대었을 때 아무것도 몰랐던 시절의 내가 축복의 힘을 느낄 수 있었던 것처럼, 가지는 굳이 손을 대지 않아도 살결에 따스한 기운이 와닿을 만큼 엄청난 생명의 기운을 뿜어냈다.
우우웅-.
가지를 중심으로 거대한 힘이 한껏 움츠리는 태동이 느껴졌다. 이윽고….
화아아-.
가지에서부터 일제히 웅크리고 있던 힘이 폭발하듯 널리 퍼져 나갔다. 그 여파에 반사적으로 모두들 움찔 눈을 가리고 물러날 정도였다.
우리를 스쳐 간 힘은 잔해들을 뚫고 넘어 밖에 도사리고 있던 불들에게 닿았다.
그 예전, 28번째 테라리움에서 가지를 살려 내 축복을 재시동 걸었던 것처럼 지금 막 새로 태어난 가지가 영역을 주장하듯 힘을 흩뿌린 것이다. 영역 내 부정한 것들을 몰아내는 힘은 그때와 비할 바가 못 됐고 거대한 해일에 휩쓸려 주변의 모든 것들이 청소되어 가는 것과 같았다. 활보하던 불이 쪼개지고 크기가 작아지는 걸 반복하다가 이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단순히 밀어내는 게 대부분이었던 28번째 테라리움과 달랐다. 가지는 101번째 테라리움 내의 모든 불을 정화해 버렸다.
파동을 따라 밖을 내다봤던 나를 비롯한 모두가 이 광경을 놀란 눈으로 바라봤다.
내 힘…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대단할지도….
“대체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죠? 저 검은 가지는 대체 뭐예요?”
시들링의 드라이어드들이 호들갑을 떨며 방방 뛰었다.
마음이 연결되어 모든 상황의 흐름을 알고 있는 내 드라이어드들과 달리 다른 이들의 눈엔 알 수 없는 일의 연속이었을 거다.
“설마 세계수의 가지인가요? 그렇기엔 느낌이 다른데…. 가지가 뿜어내는 힘도, 이곳에 휘몰아치는 힘도 전부 생경한 것들이에요. 무엇보다도….”
이를 말하는 칼미아의 목소리엔 기대와 설렘이 가득했지만 한편으론 미지에 대한 두려움과 경외가 담겨 있었다.
“이 공간을 가득 채운 기운이 드루이드님의 것과 동일하게 느껴져요.”
“그럴 수밖에. 이건 제희가 만들어 낸 가지니까.”
엘더가 옆에서 으스대며 말했다.
“드루이드님이… 만들어 낸 가지라고요?”
일순 주변이 조용해졌다. 나를 바라보는 각기 다른 시선이 느껴진다.
그러거나 말거나 난 결국 내가 성공했다는 성취감에 자아도취 되어 황홀하게 밖을 바라보았다.
새로운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