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59화 (559/604)

“좋아. 데이지 너에게도 새로운 무기를 줄게.”

그 말이 끝나자 데이지는 기다렸다는 듯이 메스키트가 그랬던 것처럼 두 손을 들고 눈을 감았다. 그 모습이 무척이나 경건하게 느껴졌다.

아무런 현상이 없던 것도 아주 잠시, 놀랍게도 데이지 주변에 금방 새까만 빛 무리가 모여들었다.

그녀 역시 기존의 무기를 버리고 새로 얻는 경험은 처음일 텐데도 무척이나 익숙하게 내게 모든 걸 맡겼다.

“제희 님은 항상 제게 새로운 걸 선사하셨어요. 새로운 삶, 새로운 목표, 새로운 가치. 전 이미 제희 님을 만났을 때부터 제 모든 것이 바뀌었다고 생각해요.”

잔잔하면서 밝은 기운을 띤 목소리가 내 마음에 전해졌다.

데이지의 성장 역사는 내 모험의 살아 있는 기록이라 봐도 무관했다.

다른 드라이어드들과 달리 가장 심각한 상황에서 날 만나, 아무것도 모르는 나와 천천히 성장해 나가는 길을 함께 걸었다. 그렇기에 데이지의 성장이 곧 나의 성장이라고 볼 수 있었다.

어린아이의 모습에서 성인의 모습이 되고 처음으로 포레스트를 일구고, 화관이 생기고 날개가 생겨 이젠 어떤 이들은 노멀 등급이라 하등하게 여기는 존재에서 한 필드의 정점이라 불리는 가디언의 자리까지 올라서게 되었다.

나와의 모험은 결코 순탄하다고 볼 수 없었다.

계속되는 어려운 적들과의 만남, 죽음을 목전에 둔 전투, 그 끝에서 간신히 기사회생하는 우리들.

그러나 계속 어려움을 맞닥뜨리는 상황 속에서 데이지는 단 한 번도 불평을 표한 적도, 겁을 낸 적도 없었다. 처음 마주하는 유형의 상대를 만나도, 한눈에 보기에도 훨씬 강한 상대와 맞설 때도 망설임 없이 무기를 들고 뛰어들었다.

전황이 불리해져도 도망가지 않았고 이길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물어뜯는 집념도 있었다.

자신을 깔보는 상대에게 주눅 들지 않고 쓰러지더라도 기어코 다시 일어나 전세를 바꾸는, 데이지는 그런 대단한 꽃이었다.

드라이어드들은 내게 자신들이 굽히지 않는 건 나의 믿음 덕이라고 말하나, 난 반대로 그들에게 믿음에 화답할 수 있는 용기가 있기에 호응이 되는 거라 말하고 싶었다.

“세계수에 의해 태어났지만 절 다시 만든 건 제희 님이에요. 그러니 전 세계수가 아닌 제희 님의 바람으로 살아가고 싶어요. 제게 바라는 제희 님의 모습, 소망은 무엇인가요?”

메스키트에게선 충성스러운 기사처럼 명을 받들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면, 데이지에게선 선물을 기대하는 아이 같은 설렘이 느껴졌다.

“데이지, 너에겐….”

내가 바라는 데이지의 모습. 언제나 지금처럼만.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팀의 용기가 되어 주었으면 해.”

가장 작은 꽃에서 시작된 용기가 세상을 바꿨다.

“너의 앞서 나가는 용기가 어떤 고난 속에서도 희망이 되어 줄 거야.”

데이지의 용기는 그녀의 꽃말인 희망을 만들어 낸다.

그녀가 용기를 내어 달려간다면 그 뒤를 든든한 의지의 메스키트가 받쳐 준다. 가장 이상적인 공격과 방어의 조합이었다.

“제희 님이 원하시는 대로 용기의 꽃이 될게요!”

그렇게 말하는 데이지는 무척이나 기뻐 보였다.

데이지를 감싸는 검은 오라가 천천히 그녀의 양손으로 이동했다. 땅에 버려진 두 개의 단도는 붉은 꽃잎이 되어 바람을 타고 흩어졌고, 데이지의 양손에선 씨앗에서 막 터져 나오는 생명과 같은 넘치는 생명력이 가득 모이기 시작했다.

이윽고 빛 무리는 형태를 띠었고 메스키트의 것에 비하면 크기는 작았으나 바람도 가를 듯한 날카로운 무기가 탄생했다.

두 개의 단검은 칼날부터 손잡이까지 구분 없이 새까맸고 나선형의 검은 오라가 전신을 휘감고 있었다. 다만, 전대 노멀 필드 가디언으로부터 이어받은 페널티인 가시도 아직까지 그대로 감겨 있었다.

새로 데이지가 받게 된 무기는 이전의 무기보다 날렵하고 가볍다는 느낌을 주었다. 더불어 무기라는 동떨어진 이미지보다 마치 데이지와 한 몸인 수족처럼 느껴졌다.

“저는 제희 님의 용기….”

새로 생긴 무기를 바라보는 데이지의 눈이 기분 좋게 휘어졌다. 그녀는 양 볼이 붉어질 정도로 기뻐하며 옅게 흥분하고 있었다.

시험 삼아 허공을 향해 단검을 휘두르는데 마치 공간을 벨 것처럼 위협적인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내친김에 단검을 휘두르며 일종의 묘기를 부리는 데이지의 모습은 귀여운 모습과는 다르게 살벌한 암살자처럼 보였다.

까득, 어금니를 힘껏 짓씹는 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라 바라보니 눈이 마주친 엘더가 휙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걸 보고 한눈에 그의 감정을 읽어 낼 수 있었다.

삐졌다.

“굉장히 잘 어울리는 무기군요.”

“막 받은 건데도 전혀 어색하지 않아요!”

데이지는 당장이라도 새로운 무기를 시험해 보고 싶은지 몸을 들썩거렸다.

“엘더, 네게도 곧 나만의 무기를 줄 테니 너무 속상해하지 마. 봤지? 마음만 먹는다면 금방 만들어 줄 수 있잖아. 네가 준비된다면 언제든지 줄게.”

“그런 게… 아니야.”

그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힘겹게 말을 내뱉었다.

그가 안타깝긴 해도 스스로 무기를 땅에 내다 버리지 않는 한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정말 신기한 광경이군. 오래 산 나조차도 드루이드가….”

이 모든 걸 지켜보고 있던 실새삼이 데이지와 메스키트를 번갈아 바라보며 말했다.

“드라이어드의 무기를 직접 만들어 준다는 건 본 적도 들어 본 적도 없지. 넌 정말… 달라졌구나.”

그가 말하는 달라졌다는 의미는 평범한 인간과 달라졌다는 뜻으로 들렸다.

“넌 갖고 싶지 않아?”

“남들보다 오래 산 만큼 옛것을 버리는 게 더욱 어려운 걸지도 모르겠지.”

그는 속상해하는 엘더와 달리 데이지와 메스키트의 새 무기를 보고도 딱히 감정의 동요를 일으키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메스키트의 말이 옳다. 한계를 인정한다는 건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는 건데, 나는 부족함을 찾을 수 없을 만큼 완벽하거든. 물론 저런 애송이와 달리 정말로.”

스스로를 평가하는 건지 엘더를 약 올리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어쨌든 변화의 물결이 찾아왔으나 이에 곧바로 모든 드라이어드가 몸을 던질 수 없다는 건 알았다. 종이 다르고 특성이 다르고 가치가 다른 만큼 변화를 맞이하는 마음도 다를 수 있겠지. 하지만 이를 맞이하는 시기가 저마다 다를 뿐 언젠간 내 드라이어드 모두에게 내가 만든 나만의 무기를 선사하게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데이지에게도 새로운 무기를 줄 수 있게 된 건 무척이나 기뻤지만 한편으로 또 다른 감정이 날 지배했다. 그건 메스키트에 이어 데이지가 내게 선사해 준 의지와 용기였다.

그들에게 주었으나 나 역시 이를 확신하고 돌려받게 되었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힘. 두 개의 마음이 내 안에서 요동치며 내게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그리고 난 데이지와 교감할 때부터 눈길을 끌던 죽은 세계수 가지를 향해 눈을 돌렸다.

분명 그 안에선 어떠한 생명력도 느껴지지 않았으나 무언가가 계속 나를 부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건 쉴 새 없이 내 마음을 두근거리게 했고, 무기를 막 얻은 데이지처럼 뭐라도 하고 싶어 안달 난 마음이 들게 했다.

메스키트가 내게 말한 날 위한 무기를 가지라는 말을 드디어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드라이어드들이 세계수의 힘만으론 이겨 낼 수 없을 거란 한계를 느낀 만큼, 나 역시 그 한계를 깨달았다. 내가 얻은 세계수의 힘을 카수스는 더 많이 가지고 있었다.

본질을 꿰뚫어 보는 그의 금안부터 세계수의 권능을 부릴 수 있는 스태프까지.

따지고 보자면 난 카수스의 프로토타입이나 다름없었다. 그만큼 내가 세계수의 힘과 나만의 힘 사이의 어딘가에서 어중간한 위치에 존재해 이도 저도 아닌 거나 마찬가지란 뜻이었다.

계속해서 내 안의 세계수를 지워 내지 못하는 한, 나 홀로 카수스를 이겨 내는 건 무리였다. 메스키트는 내가 놀랄 만큼 성장했다고 말했지만 사실 변화하지 않는 건 나였다.

드루이드의 본질은 세계수가 선사한 축복으로부터 시작된다. 신이 되겠다고 했지만 그 이후 내가 해낸 건 베스탈리스의 영혼을 정화한 게 전부였다.

물론 대단한 행보는 맞았다. 하지만 세계수가 이 땅에서 펼치고 있는 영향에 비하면 더없이 미미하다는 걸 인정해야만 했다.

“나… 나만의 무기를 가지라는 말,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나 역시도 내겐 새로운 힘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죽은 세계수 가지를 보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세계수의 가지. 그건 이 세상을 지탱하는, 없어서는 안 될 요소였다. 세상의 인간들 대부분이 가지 아래 모여 살고 있다는 점에서 가장 중요한 생태계를 제공하고 있었다.

가지가 주는 축복, 적으로부터 생명을 지키고 아늑한 환경을 제공하는 힘.

하지만 그 힘이 약해지며 생명들의 입지는 더욱 좁아지고 있었다. 사람들뿐만 아니라 수많은 군락지와 필드들 역시 사라지며 뒤 번대 구역에 남은 건 죽음의 대지뿐이었다.

세계수를 중심으로 천천히 침식해 가다가 마침내 모두 소멸하는 절망적인 그림.

그 반대에서부터 역방향으로 퍼져 나가 침식을 막을 수만 있다면….

세계수의 가지, 그건 세계수가 가진 무기가 될 수도 있었다. 남은 생명들을 지키기 위한 무기. 또한 행정 관리원들이 가드닝 스킬을 부릴 수 있는 원천이 되어 주기도 했다.

그렇다면 내게 더없이 어울리는 무기는, 나 또한 가지를 갖는 것이었다.

내겐 가지를 만들고 유지할 수 있는 모든 조건이 갖춰져 있었다. 이를 세계수의 가지를 보살피는데에만 사용하고 있었지만. 내 영혼 또한 세계수의 묘목이었고 세계수가 자신의 힘을 유지하는 데 사용하는 다이아를 무한대로 가지고 있었다.

내게 필요한 건 할 수 없다는 한계에서 벗어나고, 할 수 있다는 창조의 길을 걷는 것이었다.

창조는 신이 가지는 가장 궁극적인 권능으로 인간인 내가 감히 떠올리기 힘든 영역이었으나, 태어날 때부터 함께했던 무기를 망설임 없이 내던지는 드라이어드도 있지 않은가?

내가 내던질 건 편견이었다.

우우웅.

마음을 먹은 즉시 죽은 가지를 중심으로 공기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데이지와 메스키트가 그랬던 것처럼, 새하얀 가지의 주변에 검은 오라가 아지랑이처럼 피어났다.

모두들 할 말을 잃은 채 변화하는 가지를 바라봤다. 그중 이 변화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는 자는 어쩌면 이미 경험해 본 데이지와 메스키트밖에 없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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