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58화 (558/604)

“당신에게 꼭 필요한 꽃을 얻길 바랄 게요.”

목화 드라이어드가 내게 특별한 힘을 사용했던 걸 떠올려 보면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들었다. 되돌아가는 도중 테라리움을 발견하자마자 드라이어드 포트를 이용해도 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가지는… 죽은 것 같은데.”

세계수 가지를 이리저리 살피던 포인세티아가 말했다.

그녀가 말한 대로 세계수 가지에선 더 이상 생명이 느껴지지 않았다. 백옥처럼 아름다운 하얀 가지의 모습은 그대로이나 박제되어 버린 생명처럼 그 안은 텅 비어 있는 느낌이었다.

봉인으로 인해 겨우 마지막 남은 생명을 유지하다 봉인이 풀리며 순리대로 죽게 된 것으로 보였다. 가지로써는 그 두 개의 열매가 최후의 결실이었던 거나 다름없었다.

“되살리기엔 늦은 거 같지?”

엘더가 기대감을 가지며 슬쩍 물었다. 그로서는 이전에 28번째 테라리움에서 죽기 직전의 가지를 살려낸 적이 있으니 이번에도 혹시나 싶었을 거다.

그러나 아무리 집중해도 그때처럼 세계수 가지의 부름은 들리지 않았다. 또한 살 수 있는 희망이 있더라도 이곳을 다시 엄청난 다이아를 들여 살려낼 마음은 그다지 들지 않았다. 내게 더 이상의 테라리움을 보유하는 건… 좀 위험했다.

난 이미 죽어 버린 가지에 손을 댔다.

이 테라리움도 이젠 완전히 끝났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참 많은 이야기를 가지고 있던 테라리움이었다. 한 시대를 끝내 버린 재앙의 드루이드가 태어난 고향….

어쩐지 복잡한 기분이 든다.

나도 모르게 죽은 가지를 하염없이 쓰다듬었다.

신의 일부인데 봉인을 당하지 않나 부활한 재앙을 위한 전력을 내어 주질 않나…. 여러모로 이용만 당하다가 정작 제대로 된 권능은 보여 주지도 못한 채 이렇게 죽어 버린 게 복잡한 심경을 들게 한다.

세계수는 왜 카수스에게서 모든 걸 빼앗지 않았을까?

과거의 드라이어드가 주인과 재회하도록 내버려 두었을 뿐만 아니라… 가장 중요한 건 자신의 권능을 그가 아직까지 마음대로 휘두르도록 허락했다는 점이겠지.

카수스에게 더 이상 신에 대한 공경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그가 아무렇지도 않게 꺾어 나갔던 가지를 떠올려 보면, 그에겐 세계수는 수단 그 이상은 아니었다.

그는 모험의 끝에서 세계수의 무엇을 보았던 걸까? 세계수는 카수스에게서 무얼 보고 있는 걸까?

설마 아직까지 그를 순례자 후보로 보고 있는 걸까?

어떻게 보면 난 이미 반목하고 길을 걷길 거부했으니 유력 후보가 하나 사라진 거나 다름없었다. 그렇다면 과거 정점에 올랐던 카수스에게 다시 한번 기대를 걸게 된 건 아닐까?

재앙을 불러왔던 그였지만 끝이 좋지 않았으니 부활한 이후에는 마음을 고쳐먹고 달라질 거라고 기대한 건 아닐까?

“하….”

수많은 고민을 하는 내 곁에 메스키트가 다가왔다. 전투가 소강된 지 오래였지만 그녀는 손에 여전히 새로 얻은 무기를 들고 있었다.

갖고 싶었던 물건을 막 얻고 난 후, 그 기쁨에 언제 어디서나 손에서 놓질 않으려는 것과 같은 마음이 엿보였다.

“제희도 제희를 위한 무기를 갖는 게 어때요?”

“날 위한 무기?”

메스키트가 의외의 말을 했다.

“무기라면 이런 게 있긴 한데….”

난 전투에서 그다지 큰 효과를 내지 못하는 총을 꺼내 보였다. 어쩔 땐 의외의 상황을 만들어 내주기도 하지만 이건 기본적으로 투척용 소화기 그 이상의 힘을 낼 수 없었다. 더욱이 레벨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장난감 총이나 다름없었다.

“후후, 그런 게 아니에요. 제희는 제게 무기를 만들어 줬잖아요?”

그녀가 보란 듯이 방패와 랜스를 들어 올렸다. 가까이서 보니 더욱 영롱했고 무기를 휘감는 새까만 오라가 상당히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세계수만 할 수 있었던 일을 말이에요. 제희가 해냈어요. 그러니 더한 것도 할 수 있을 거예요.”

“더한 것…?”

메스키트의 애매모호한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데 엘더와 데이지가 불쑥 끼어들었다.

“그 무기 어떻게 한 거야?”

“정말 제희 님이 만드신 무기예요? 와….”

엘더는 질투가 가득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고 데이지는 메스키트의 무기를 구경하며 탄성을 내었다.

“나도 사실 어떻게 만들었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어.”

그땐 정말 메스키트의 말을 따라 마음을 먹었던 것밖에 기억이 남지 않았기에 다시 해 보라고 하면 할 수 있을지 미지수였다.

“모르면 어떡하나요? 제 손에 이렇게 제희의 마음이 남아 있는데.”

“나… 나도! 내 무기를 네가 만들어 줘!”

엘더의 목소리는 상당히 다급했다. 메스키트를 힐끔힐끔 바라보는 눈 속엔 늘 그랬듯 첫 순서를 빼앗긴 투정과 메스키트를 향한 묘한 경쟁심이 담겨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엘더는 독점욕도 강했고 그렇지 못한다면 무엇이든 자신이 나의 처음이 되어야만 했다. 나의 첫 드라이어드, 첫 그래프트 등등….

다른 드라이어드들은 그런 것에 그다지 의미를 두고 있지 않은 듯한데 엘더만 유독 별났다.

“으음… 다시 할 수 있을까?”

무기를 바꾼 메스키트가 이젠 나와 그래프트를 하지 않고도 그 힘을 사용할 수 있게 된 걸 보면, 다른 드라이어드들도 바꾸는 게 이득이었다.

툭, 투툭.

“앗….”

메스키트에게 무기를 만들어 줬던 순간을 되새기고 있는데 데이지가 대뜸 자신이 들고 있는 두 개의 단도를 바닥으로 내던졌다.

“아직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모르는데 그렇게 버려 버리면….”

“저도 주세요!”

“내가 먼저야!”

그 모습들이 꽤나 절박하게 내게 요구했던 메스키트와 비교되어 작게 웃음이 나왔다.

“일단 당신들의 마음가짐이 중요해요.”

쩔쩔매는 나를 대신해 메스키트가 말했다.

“새로운 무기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껴야 하죠. 난 카수스를 마주하며 내 안의 한계를 절실하게 깨달았어요. 그래서 내가 달라져야 한다고, 그 한계는 우리가 세계수로부터 태어났다는 본질을 버리지 않으면 결코 깰 수 없을 거라 생각했어요.”

그녀는 카수스가 그래프트의 힘을 펼치려 할 때, 더 이상 막을 방법이 없음에도 선두에 서서 방패를 들며 느꼈던 마음을 이야기했다.

“상대는 어쩌면 제희가 평범하게 모험을 진행했다면 그 끝에 도달해 얻을 수 있는 결과나 다름없었어요. 하지만 제희의 모험은 아직 끝에 도달하려면 멀었죠. 그렇게만 놓고 본다면 카수스에게 제희가 지는 게 ‘아주 당연한 결과’가 될 수밖에 없었어요.”

메스키트의 말이 맞았다. 카수스와 나의 레벨 차이는 상당하니 애초부터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싸움이었다.

“그래선 안 됐지요. 그 원인을 제희에게서 찾고 싶지 않았어요. 제희가 약해서? 아뇨. 그녀는 놀라울 만큼 성장을 이뤘고 오히려 난 과거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었어요.”

그녀는 가슴에 한 손을 올린 채 참회하듯 말했다.

“누군가는 성장을 하는데 누군가는 변화하지 않는다면, 그 원인은 변화하지 않는 자에게 있지 않을까요? 그래서 새로운 힘이 필요했던 거예요.”

세계수의 힘만으론 이미 그 힘으로 정점을 찍었던 자에게 이기지 못한다. 어떤 이들이라면 포기했을 순간에 메스키트는 다른 길을 찾았다.

“이전의 내 손에 있던 건 세계수의 의지였어요. 우리의 본질은 세계수가 할 수 없는 일을 돕기 위해 파견된 심부름꾼이나 다름없었죠.”

드라이어드의 본질은 드루이드와도 많이 닮아 있었다. 세계수는 드루이드의 영혼에 축복을 심어 움직일 수 없는 자신을 대신했다.

“하지만 이젠 세계수의 바람이 아닌 제희의 바람대로 살겠노라고 다짐했으니 내 무기 역시 달라져야겠죠. 그래서 제희에게 묻고 부탁했어요. 제희가 원하는 나의 모습을, 나에게 맡길 그녀의 소망을.”

소망은 의지가 되어 메스키트의 손에 형상화되었다.

“우린 항상 그녀의 마음을 들어 왔으니 그 과정은 아주 쉬워요. 다만 첫걸음이 어려울 뿐이죠. 태어날 때부터 쥐었던 무기를 버릴 수 있는 용기. 자신의 생애 일부를 과감히 버리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 될 수도 있어요.”

그렇게 말하며 대뜸 내던져져 땅을 뒹굴고 있는 데이지의 단검을 보며 웃었다.

“그 벽만 넘을 수 있다면, 다음은 아주 쉬워요.”

아주 쉬워요, 그건 드라이어드들에게 하는 말 같았지만 정작 내게 하는 말처럼 들렸다.

어렵게 생각하지 말라. 내가 어떻게 메스키트에게 무기를 만들어 줬는지 복잡하게 떠올릴 필요가 없다는 듯.

그건 숨 쉬는 것처럼 쉬운 일이라고 혹여나 침잠해 있을 내 불안감을 염려하여 말하고 있는 것처럼 들렸다.

“그래서… 할 수 있겠나요? 적을 상대하고 막을 수 있는 수단을 거리낌 없이 내버리고 빈손으로 그녀의 선택을 기다릴 수 있나요?”

“전 버렸어요.”

메스키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데이지가 답했다.

“제겐 세계수의 힘 따윈 필요 없어요. 제게도 제희 님의 무기를 주세요. 저도 강해질 거예요. 한계를 넘을 거예요!”

올곧은 목소리엔 흥분이 담겨 있었다.

“다음에 카수스를 만나면 반드시 제 무기로 유효타를 내고 말겠어요!”

이번 전투에서 데이지의 활약상은 그다지 크지 않았다. 카수스의 압도적인 공격으로 우린 막기 급급했지만, 그가 조롱하며 말했듯이 막기만 해선 승리할 수 없었다.

적절한 방어와 공격이 조화를 이루어야 했지만, 틈이 생기더라도 공격형 드라이어드들은 정작 카수스를 지키는 돌매화 드라이어드라는 벽을 뚫지 못했다.

체구가 작지만 단단한 바위처럼 보였던 그 드라이어드. 방어 특화 드라이어드답게 홀로 수많은 드라이어드의 공격을 막아 냈다. 그래프트라도 사용하지 않는 한 변수를 만들기 어려웠고, 그 머뭇거림이 카수스가 날뛰는 결과를 만들어 냈다.

데이지가 호기롭게 내게 매달리는 와중에도 엘더는 제 손에서 스태프를 놓지 못했다.

난 그냥 버리면 되는 일 아닌가 하고 간단히 생각했지만, 메스키트가 괜히 첫걸음이 어렵다는 말을 한 게 아닐 거다.

그건 단순히 손에 든 걸 버리는 게 전부가 아니라… 마치 손과 발을 잘라 낼 정도의 각오를 해야 한다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기 때문이다.

“나와 데이지가 쉽게 해낸 걸 보고 넌 그렇지 못하는 걸 절망할 필요 없단다.”

메스키트 역시 엘더의 의중을 읽었는지 그에게 자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아직 네 스스로가 완벽하다는 생각에 갇혀 있기 때문이야.”

엘더는 자의식이 굉장히 높았다. 한때 등급이 낮은 드라이어드들을 깔보고 다닐 만큼, 그가 인정한 자신보다 위의 드라이어드는 메스키트가 유일할 정도로 자신을 최고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 팀에 아직 너만큼 유능한 회복형 드라이어드가 없다는 점도 한몫하겠지. 넌 항상 제희와 함께 최고의 결과를 이끌어 냈으니 나와 데이지가 느낀 한계를 아직 겪지 못한 거야. 회복형은 전투에 직접 나서지 않고 뒤에서 서포트를 해 주는 역할이다 보니 더욱 그렇단다.”

엘더와의 그래프트는 항상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을 해냈다.

힐러가 절망하며 한계를 느끼는 순간은 대개 팀원을 끝내 살려 내지 못했을 때 찾아오게 된다. 물론 엘더가 애를 써도 난항을 겪었던 순간이 종종 있었지만, 이번 전투에서 데이지와 마찬가지로 엘더가 활약할 순간은 많지 않았다.

메스키트의 노력으로 팀이 전멸까지 갈 위기가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도 더 강해지고 싶어.”

“어느 드라이어드가 그런 마음이 없겠니? 중요한 건 더 이상 세계수의 힘만으론 강해질 수 없다는 걸 깨달아야 한다는 거야. 네가 든 무기에 대해 의문을 갖고 그걸 쥔 손이 이질감을 느끼고 끝내 나의 무기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그땐 너도 나와 데이지처럼 망설임 없이 무기를 버릴 수 있게 될 거야.”

엘더뿐만이 아니었다. 이를 듣고 있던 실새삼과 포인세티아도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들 역시 단번에 무기를 버리진 않았다. 다만 바곳은 생각을 전혀 알 수 없는 얼굴로 자신의 스태프 위에 꽂혀 있는 민들레 씨앗을 빤히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자, 이제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는 데이지에게 선물을 줘야지요?”

메스키트가 웃으며 데이지를 가리켰다.

그녀는 처음부터 끝까지 내게서 눈을 떼지 않는 상태였다.

데이지에게도 나만의 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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