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57화 (557/604)

큰 상처를 입고 카수스의 곁에 힘들게 서 있던 양귀비가 반응했다. 넓은 소매로 곧바로 제 주인을 감쌌고 이를 알아차린 카수스가 화를 내는 모습이 보였다.

“도망갈 생각인가?”

확실히 카수스의 드라이어드들은 불리한 상황임을 깨닫고 후퇴하려 하고 있었고, 카수스는 이를 자존심 때문에 거부하는 눈치였다.

“이대로 못 보내 줘!”

카수스를 여기서 놓아준다면 어떤 후환이 닥쳐올지 알 수 없었다.

무력해진 지금이야 말로 그를 붙잡을 수 있는 기회였다.

스킬을 끊은 메스키트가 돌매화를 상대하기 위해 나섰다. 묵직한 두 탱커가 부딪히자 흡사 산사태가 일어난 것과 같은 굉음이 울려 퍼졌다.

모든 드라이어드들의 공격이 카수스에게 집중된 순간, 그의 아티팩트가 반짝이는 걸 목격했다.

“설마 숨겨 둔 드라이어드가…!”

곧바로 마거리트가 책을 들고 능력을 사용했고, 대상은 돌매화가 아닌 양귀비와 새로 등장한 드라이어드를 향했다.

양귀비를 중심으로 지독할 정도로 매캐한 향과 새하얀 연기가 훅 뿜어져 나왔다. 상당수의 드라이어드들이 일순 비틀거릴 정도로 엄청나게 극대화된 능력이었다.

능력을 사용한 양귀비 자체도 자신을 한계까지 몰아붙인 탓인지 탈진 상태에 이르러 숨을 헐떡이는 게 보였다.

정화의 힘이 담긴 보석이 미친 듯이 반짝인 덕에 난 무사했지만, 나 역시 흡사 사람들이 가득 찬 흡연실에 있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그러니 다른 이들은….

푸욱!

시들링이 갑자기 검을 들어 제 허벅지에 박아 넣었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능력에 취해 버린 그가 걱정된 것도 잠시, 그가 오히려 능력을 이겨 내기 위해 그런 짓을 벌인 것임을 깨달았다.

핏발 선 눈은 여전히 적을 맹렬히 노려보며 의식을 잃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었고, 이에 맞춰 그의 드라이어드들도 쓰러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화아아….

새로 나타난 드라이어드의 모습을 온전히 확인하기도 전에 카수스의 일행이 전부 눈부신 금빛에 휩싸였다. 드라이어드의 힘으로 어떠한 능력이 막 발동하려고 있었다.

“그렇게는…!”

이대로 놓치더라도 곱게 보내줄 수만은 없었다.

“데이지!”

포인세티아가 크리스탈 오브에서 눈을 불러와 바닥에 뿌리자 축축하게 젖어 있던 땅이 금세 빙판으로 변하였다. 그 위를 곧장 데이지가 뛰어들어 몸을 맡기니 빠른 속도로 미끄러지며 땅을 뛰어다닐 때보다 무척 빠른 속도로 카수스를 향해 접근할 수 있었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데이지는 마치 썰매처럼 줄기로 묶어 끌고 오던 것을 냅다 전방을 향해 던졌다.

가속도가 붙어 총알처럼 쏘아진 건… 다름 아닌 애쉬였다.

그는 양귀비가 능력을 사용할 낌새가 보이자마자 입과 코를 천으로 칭칭 매어 완전히 틀어막았고, 시들링과 달리 잠깐은 멀쩡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데이지에게 애쉬를 달려 보낸 건 내 지시였다. 의외의 결과를 노릴 수 있는 마지막 수단.

그는 그대로 카수스가 아닌 그 옆의 양귀비를 붙들었다.

큰 부상 후에 한계까지 능력을 끌어 올린 탓에 완전히 무방비였던 양귀비는 그대로 애쉬에게 머리칼을 붙잡혔다.

“한 놈이라도… 줄여야지.”

애쉬가 사악하게 속삭였다.

카수스의 일행들을 감싼 빛이 도저히 눈을 뜨고 보기 힘들 정도로 강해졌을 때, 양귀비가 있는 곳에서 엄청난 폭발이 터져 나왔다. 사방에 불에 탄 천 조각이 흩날리고…. 그 중심에 재를 뒤집어쓴 채 사냥감을 움켜쥔 맹수의 모습을 한 애쉬가 서 있었다.

눈부신 빛과 함께 카수스의 일행은 전부 사라졌으나, 단 하나, 새까맣게 타 버린 검은 열매만 잠시 남아 있다가 재로 화해 사라져 버렸다.

그건… 드라이어드의 죽음을 뜻했다.

가디언 급의 위력을 지니진 않았지만 존재 자체로도 우릴 아주 애먹였던 드라이어드였다. 앞으로도 카수스와 함께한다면 사사건건 방해물이 될 수 있었으나… 애쉬의 복수에 가까운 잔혹한 힘은 드라이어드를 세계수의 품으로 보내 버렸다.

적이 맞으나 누군가의 죽음은 마음을 불편하게 만든다. 또한 일말의 재고도 없이 무방비 상태의 드라이어드를 단숨에 태워 죽여 버린 애쉬에게도 부정적인 감정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더욱이 그의 모습 위로 후환을 없애기 위해 적들에게 검을 찔러 넣었던 이리스 파티의 모습이 겹쳐지니 더욱 찝찝한 마음이 들었다.

“드라이어드의 이동 능력이군. 멀지 않은 곳에 미리 대피 지점을 정해두고 그곳으로 카수스를 피신시켰을 거다. 만일을 위한 장치였겠지.”

실새삼이 카수스의 일행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드라이어드의 능력은 영혼의 연결이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만 효과를 발휘하니 멀리 가진 못했을 거예요. 찾으러 가죠!”

메스키트 역시 주위를 둘러보며 판단을 내렸다.

곧바로 도망친 카수스를 찾기 위해 기동성이 좋은 드라이어드들로 수색대를 구성해 보냈지만 결국 그를 찾아내진 못했다.

범위를 특정할 수 있다하더라도 사용 직전 마거리트의 버프를 받았으니 능력이 극대화되었을 테고, 더구나 방향은 특정할 수 없으니 아무리 드라이어드들이 수색을 벌였어도 놓치는 부분이 있었을 거다.

“놓쳐선 안 됐는데….”

카수스를 놓친 것에 대해 불안해하는 날 실새삼이 달래듯 말했다.

“그래도 그를 이 정도까지 몰아붙인 건 네가 처음일 거다. 호되게 당했으니 조심하겠지. 더욱이 그의 전력을 줄여 버렸으니….”

그러곤 애쉬를 흘긋 곁눈질로 바라보며 그가 해치워 버린 양귀비를 언급했다.

“과거 카수스에겐 필드의 가디언들 외에도 다른 드라이어드들이 많이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기억해 내려 해도 도통 양귀비에 대해 떠오르는 게 없는 걸 보니 부활 후 영입한 것 같군.”

“그 꽃은 오래전 세계수 안에서 드라이어드들에게 논쟁을 일으킨 원인이기도 했어요.”

메스키트가 다가와 실새삼의 이야기를 이어받았다.

“제가 예전 카나비스 드라이어드와 관련하여 이야기했던 걸 기억하시나요? 영혼을 오랫동안 죽음의 기운으로 잠식시켜 회복 불능의 상태로 만드는 종들이 있다고 했었죠.”

“응, 기억해. 드루이드의 안위를 위협할 수 있는 종들은 세계수 밖으론 나가선 안 된다는 주장이 있었다고 했었어.”

“그래요. 아주 오래전 모체들의 경험담에 따른 논란이었죠. 카나비스 모체도 문제를 일으킨 적이 많지만 특히나 그 양귀비. 그 꽃은 테라리움 간에 전쟁을 일으켰다는 점에서 더욱 문제가 됐어요. 수많은 사상자를 만들고 그 과정에서 드루이드를 떠나보낸 수많은 꽃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줬죠.”

양귀비에 얽힌 설화는 내가 살던 세계뿐만 아니라 이곳에서도 엄청났다.

“그건 나도 알고 있다. 그래서 몇몇 테라리움에선 지금까지 재배는 물론 유입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다고 들었다. 양귀비를 소유한 드루이드의 출입 역시 많은 제한을 받는다고도 했다.”

자신이 낸 허벅지의 상처를 드라이어드들에게 치유 받고 있던 시들링이 슬쩍 말을 얹었다.

“가만히 있어! 상처가 벌어지잖아! 그렇다고 너 스스로 상처를 입히면 어떡해?”

그의 허벅지에 붕대를 감아 주던 로즈우드가 그를 책망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수스를 수색하러 떠난 드라이어드들이 돌아올 때까지 아직 전투 상황이 종료된 건 아니라며 제대로 된 치료를 마다하던 그였다. 그 때문에 그의 장비는 아직까지 그가 흘린 피로 더러워져 있었다.

사라져 버린 카수스를 계속 추적하기엔 상황이 여의치 않아 그를 찾는 걸 포기하자 그제야 다들 치료와 회복에 집중할 수 있었다.

“양귀비는… 그 악명에 대해선 나도 다른 의미로 잘 알고 있어. 그런데 드라이어드들 간의 논란의 시초가 되었던 꽃이라니.”

“그만큼 양귀비를 암암리에 배척하는 꽃들도 많고, 종 자체가 자아가 굉장히 강하고 주인과도 반목하기로 유명해서 카수스를 향해 과한 충성심을 보이는 게 의문이긴 했다. 진정 그 꽃이 악명대로 행동했다면 카수스의 아티팩트로 도망가는 선택을 했을 텐데.”

실새삼이 혀를 찼다.

만약 무사히 카수스와 함께 도망을 쳤다면 먼 훗날 그 꽃에 또 다른 악명이 붙었을지도 모르겠다.

“이제 어떻게 할 건가?”

치료를 끝낸 시들링이 몸을 풀며 물었다.

“카수스를 붙잡진 못했지만 그에겐 당장 재기 불능한 상처를 입혔다는 점에서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다고 봐. 그가 드라이어드 열매를 가져가는 것까지 막았다면 좋았을 텐데. 어쨌든 상황은 종료됐으니 돌아갈 준비를 하자.”

난 그가 두 열매를 모두 얻기 직전, 가까스로 빼앗아 낸 하나의 열매를 꺼내 들여다봤다. 유리와 같은 투명한 공.

“그런데 어째서 열매가 두 개 맺혀 있었던 걸까?”

나빠지는 테라리움 상태와 더불어 봉인까지 당한 세계수 가지는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열매가 맺혀 있었다는 건 카수스의 예상대로 주인의 부활을 알아차린 가디언이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가지로 찾아왔다는 건데.

그를 만나러 나타난 리버 필드의 가디언으로 예상되는 드라이어드는 제외하고, 마치 쌍둥이처럼 함께 매달려 있던 또 다른 열매의 정체에 대해선 의문이 들었다.

설마 내가 가져온 게… 리버 필드 가디언의 열매인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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