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에게 필요한 건 나의 무기라고?
하지만 드라이어드의 무기는 바크와 더불어 태어날 때부터 함께인 거잖아. 그런데 어떻게 무기를 바꿀 수 있는 거지?
메스키트의 발언으로 인해 강렬한 충격을 받았으나 어지러운 혼란도 뒤따라왔다.
그녀는 위험한 전장 속에서 내게 모든 걸 맡긴 채 무장 해제를 했다. 여태껏 수없이 우리 팀을 지켜 준 방패도, 수천 번 적을 꿰뚫은 랜스도 전부 땅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메스키트를 감싸는 새까만 빛. 그건 전혀 이질적인 게 아니었다.
언제부턴가 금빛을 벗어 던진 내겐 칠흑같이 새까만 빛이 함께했다. 그 빛은 종종 나타나 내게 존재감을 내비쳤다.
재앙의 드루이드인 카수스가 세계수의 힘을 사용하며 그 상징과 다름없는 신성하고 찬란한 금빛을 동반하는 걸 보면, 내게 나타난 검은빛은 세계수에 대조되며 세계수를 벗어 던진 나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러니 새까만 빛에 휩싸인 메스키트는…. 그녀가 더 이상 세계수의 드라이어드가 아님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징조였다.
내가 세계수와 반목한다 하더라도 세계수의 피조물인 드라이어드가 어떻게 그 긴밀한 관계를 끊어낼 수 있겠는가. 탄생부터 성장까지 모든 것들이 세계수와 연관되어 있는데.
존재의 근간을 흔드는 메스키트를 바라보며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수없이 고민하고 있을 때,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직접 입을 열고 말하는 게 아닌 마음을 통해 들려오는 소리였다.
“제희, 나의 세계수.”
우리의 영혼의 연결이 더없이 굵게 연결되어 있을 때, 우린 굳이 입을 열지 않아도 서로의 생각을 공유할 수 있었다.
“내가…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나의 무기를 만들어야 한다니….”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어요. 무기는 말 그대로 전투에 사용하는 기구잖아요? 하지만 달리 말하자면 무언가를 이루기 위한 중요한 수단이 될 수도 있죠.”
“쉽게 들리지만 너무 어려운 일이야. 해 본 적 없는 일인걸.”
“세계수가 우리 드라이어드를 만들 때 쥐여 준 무기는 세상에 나갔을 때 우리가 해야 할 일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어요. 누군가를 지키는 존재가 되라는 의미로 내게 방패를 쥐여 준 것과 같죠. 어쩌면 내가 방패가 아닌 데이지와 같은 검을 들었다면, 엘더와 같은 스태프를 들었다면, 난 다른 방식의 전투를 해 왔을 거예요.”
그녀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조급해하는 날 다독이며 해답으로 이끌었다.
“하지만 다른 무기를 든 제가 잘 상상이 안 되죠? 그래요. 그 어떤 나무보다도 뿌리가 깊고 튼튼한 제가 아니면 그 누가 방패를 들 수 있겠어요? 엘더? 그 아이는 무리예요. 막으려다가 되려 휘어 버릴 걸요.”
조금은 장난을 섞으며 나를 웃음 짓게 만든다.
“그래서 세계수는 알맞은 역할을 무기와 함께 내린 거죠. 그건 어쩌면 세계수가 우리 드라이어드들에게 바라는 소망과 같은 거라고 볼 수 있어요. 그러니 제희가 생각하는 것보다 이건 아주 쉬운 일이에요.”
두근두근, 나도 할 수 있다는 의지가 샘솟는다.
“생각해 봐요. 제희는 내게 어떤 걸 원하나요? 내가 제희를 위해 무엇을 했으면 좋겠나요?”
공기가 진동하며 메스키트가 더욱 더 짙은 빛에 휩싸인다.
“당신이 생각하는 나. 당신이 내게 부여할 역할. 내게 바라는 소망.”
“내가 바라는 건… 내가 생각하는 건… 내 안의 메스키트는, 앞으로의 메스키트는… 의지가 되어 주었으면 좋겠어. 지금처럼, 늘 그래 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팀이 흔들리지 않도록 의지가 되어 주는 존재가 메스키트야.”
“그 마음, 전달받았어요.”
그 순간, 메스키트를 감싸던 빛이 일제히 그녀의 양손에 모여들었다.
더불어 그녀가 바닥에 내던진 방패와 랜스가 모래로 산화되어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제 내 손에 제희가 아닌 다른 존재의 의지를 쥐어 대신할 일은 없어요. 나의 주인이자 나의 신이 원하는 의지를 쥐고….”
메스키트의 손에 모인 빛은 점점 형태를 띠었고 어느새 이전보다 훨씬 거대한 방패와 좀 더 날렵해진 랜스가 되었다. 온통 빨려 들어갈 것 같은 새까만 금속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그 주위를 검은 아우라가 행성의 고리처럼 회전하고 있었다.
“맞서 보이겠어요.”
의지가 형상화된 무기. 더는 메스키트가 든 게 단순한 무기로 보이지 않았다. 그걸 느끼게 되자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메스키트는 나로 인해 다시 태어난 드라이어드가 되었다.
우우웅.
카수스가 어떤 가디언의 공격형 그래프트를 펼치기 시작했다.
“괴상한 수를 쓴 모양인데 무기를 바꾸는 건 지금까지 처음 본 현상이니 칭찬해 줄 만하지만. 그래 봤자 그래프트를 다시 사용할 수 없는 상황이란 건 변함없지 않은가?”
여유로운 척하지만 카수스는 동요하고 있었다.
그에게 일어난 일련의 상황들 모두 그가 활동하면서 처음 겪은 일들로, 경험해 보지 못한 일은 누구에게나 크기가 다른 불안감을 심는다.
겨우 무기가 바뀐 정도로 자신을 이길 수 없다 말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든 거겠지. 정말로 자신을 이길 수 있는 힘을 각성하게 된 건 아닐지.
“굳이 당신을 이기는데 꼭 그래프트가 필요할까요?”
메스키트는 양손에 의지를 쥐고 더욱 앞으로 나아갔다. 이젠 등 뒤로 팀원들과 한참 떨어진 거리. 마치 쏘아질 공격을 죄다 혼자 막아 보이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보조하겠다.”
시들링은 메스키트 혼자 그래프트의 위력을 막아 내는 건 무리라고 생각했는지 자신이 그녀를 거들겠다고 말했다.
“괜찮을 거야. 아니, 괜찮아. 메스키트 혼자… 할 수 있을 거야.”
난 그를 만류했다. 애초에 시들링이 보유한 그래프트는 전부 공격 위주였다. 함께 돕겠다는 마음은 고마우나 그다지 도움은 되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지금의 메스키트는 전혀 질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공기 중의 수분 함량이 급속도로 높아지며 마치 물속에 잠긴 것처럼 숨을 쉬기 힘들어질 지경이 되었다. 어쩌면 지금 카수스가 선보이려는 그래프트의 주인은 리버 필드의 가디언.
부글부글, 기포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바닥이 진동했다. 더불어 어느새 건물 내부가 홍수 피해를 입은 것처럼 바닥에 얕은 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내가 기억하는 그 기술이 맞는다면.”
실새삼이 기억을 억지로 되짚는 듯한 찌푸린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곧 땅에서 무차별적인 공격이 터져 나올 거다. 이건 대상을 특정하지 않는 공격이라 상대하기 더 까다로울 거야.”
실새삼의 말을 들은 건지 메스키트가 바로 반응을 했다. 그녀는 자신의 몸집만 한 방패를 들어올렸고….
쿠구궁…!
천지가 울리는 굉음과 함께 그녀가 든 방패에서 새까만 빛으로 반짝이는 모래가 터져나왔다. 찬란히 빛나는 모래알은 빛의 색 때문에 마치 보석 부스러기처럼 보였다.
“이건…!”
그녀가 사용하려는 힘은 그 징조가 무척이나 익숙하다는 것과 동시에 이 상황에서 보게 될 거라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었다.
흘러간 모래는 마치 바닥에 흥건한 물을 죄다 덮을 기세로 퍼져 나갔고, 특정 구간까지 범위를 확장하다가 이내 두꺼운 모래 벽을 쌓기 시작했다.
“저건 그래프트잖아!”
포인세티아가 믿기지 않는다는 목소리로 소리쳤고 이내 놀란 눈으로 메스키트와 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혹시나 내가 그래프트를 사용하는 건가 살피는 눈이었고 이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꽤나 충격 받은 얼굴이 되었다.
나도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놀라운데 다른 이들은 오죽할까.
메스키트는 나와 그래프트를 펼치지 않고도 스스로 그래프트의 힘을 사용하고 있었다. 마치 카수스가 드라이어드 없이 스스로 그래프트를 사용하는 것처럼 말이다.
“본래 그래프트가 드루이드와 깊은 교감을 통해 하나의 나무가 되어 사용하는 힘이라면…. 내 손에 항상 제희의 의지가 존재하는데 굳이 그런 과정을 펼칠 필요가 있을까요?”
콰과광!
거세게 쌓아 올린 벽이 공격 징조로 요동치기 시작한 기운을 완전히 억눌러 버렸다.
범람할 것처럼 솟아오르던 물도 전부 모래에 뒤덮여 땅이 되어 버렸다.
카수스의 시도는 완전히 무(無)로 돌아가 버렸다.
“말도 안 돼….”
그래프트는 그 위력이 가히 사기적이기에 특정한 조건이 필요한 힘이었다. 그렇기에 남발할 수 없었고.
그런데… 이젠 드라이어드가 기본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스킬이 되어 버린다면…?
메스키트는 완전한 진화를 이루고 말았다.
내 드라이어드들은 물론 시들링의 드라이어드들까지 메스키트를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큭…. 쿨럭….”
카수스의 공격 시도가 압도적인 기운에 눌려 실패로 돌아가자 그는 더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다.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겨우 버티고 있는 그의 옷은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를 만지지 못하는 드라이어드는 어쩔 줄 몰라 하며 그 모습을 지켜만 보고 있었다.
쉴 새 없이 토해 내는 각혈이 결코 그가 정상적인 상황이 아님을 알려 주고 있었다.
승기는 빠르게 내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드라이어드의 수는 이쪽이 더 많았고 적에게 가디언이 있다 하더라도, 카수스 그 자신이 지적했듯 방어만 해선 이길 수 없었다. 공교롭게도 그에게 현재 있는 가디언은 방어형이지.
카수스가 사술처럼 부리는 가디언들의 그래프트 힘은 갈수록 그의 몸에 부담을 주는지, 한 번 더 그 힘을 사용했다간 숨이 넘어갈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어려운 전투가 될 거라 생각했고 실제로도 어려움이 따랐다.
지금 우리가 승기를 거머쥐고 있는 이유는 요행 따위가 아니었다. 차근차근 쌓아 놨던 우리의 모험이 마침내 빛을 발한 거나 다름없었다.
이제 카수스는 당장 그가 가진 열매에서 리버 필드의 가디언을 개화시키지 않는 한 승산이 없었다. 하지만 이곳엔 바로 사용할 수 있는 온실과 드라이어드 포트가 존재하지 않지.
돌매화가 발악한다면 시간이 더 길어지겠지만 상황이 크게 역전되진 않을 것이다.
“카수스….”
그걸 저들도 알고 있는지 주인을 걱정하는 드라이어드들의 얼굴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너 따위 망령의 시대는 여기서 끝이야.”
지금부터 총력전이었다. 이 자리에서 확실히 카수스를 끝내야 했다.
“내가 상대하겠음.”
돌매화가 카수스를 제 뒤로 감추며 앞으로 나섰다. 예상했던 대로 돌매화가 나섰다.
“아직 안 끝났어!”
그가 잔해를 받침 삼아 비틀비틀 자리에서 일어났다. 득달같이 스태프를 치켜 들며 힘을 사용하려고 했고, 메스키트 역시 이에 맞서 태세를 정비했다.
“양귀비.”
그때, 돌매화가 뜬금없이 양귀비를 불렀고 난 곧바로 그것이 그들의 어떠한 사인임을 눈치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