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갯방풍의 가호가 자물쇠를 잠그며 봉인이 완성되었다.
우우웅.
그를 중심으로 공기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그의 팔을 붙잡은 손에서 엄청난 반발력이 느껴졌다.
챠르르.
허공에 떠올라 원을 그리며 회전하던 장신구들이 하나의 빛으로 합쳐지는 게 보였다. 덩어리를 이루던 빛은 이윽고 형체를 만들었는데…. 동서남북 네 방향에 보석을 단 둥근 고리였다.
태양의 보석 장신구가 모두 모이면 티아라가 나타날 거란 예상과 달리, 그건 머리에 쓰기엔 둘레가 너무 작아 보였고 더구나 고리에 가시처럼 솟은 장식도 미적으로 보나 실용성으로 보나 매우 떨어져 보였다.
피부를 뚫을 것처럼 솟아서 아무리 성능이 좋아도 결코 내 드라이어드에게 착용을 권하고 싶지 않을 정도였다.
그렇게 탄생한 고리는 봉인의 대상자인 카수스에게로 날아갔고, 그가 거부할 새도 없이 팔목에 수갑처럼 채워졌다.
그 상황에서 문득 손오공의 머리에 씌워진 긴고아가 떠올라 어이없는 웃음이 나올 뻔했다.
“으윽!”
가시 같은 장식이 착용자에게 고통을 줄 거란 내 예상은 맞았다. 카수스의 손목에 채워진 팔찌는 빈틈없이 조여들어 그의 살갗을 파고들었고 피를 보일 정도로 생채기를 냈다.
“너…!”
그가 분노한 얼굴로 날 바라봤다. 붙잡히지 않은 다른 손을 들어 주먹을 쥔 꼴이 그대로 날 한 대 후려칠 기세였다.
그때였다.
4개의 가호들이 사슬처럼 맞물리며 제대로 힘이 발동하기 시작한 것인지, 카수스가 가지에 손을 대었을 때 거부 반응을 일으켜 튕겨 나갔던 것처럼 나 역시 그에게서 엄청난 반발력을 느끼며 튕겨 나갔다.
하지만 떨어져 나간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카수스가 쥐고 있던 가지에서 두 개의 열매 중 하나가 일련의 여파로 함께 떨어져 나왔고, 난 운 좋게 그 열매를 손에 쥘 수 있었다. 놓칠세라 열매를 쥔 손에 꽉 힘을 주었다.
“내게 무슨 짓을 한 거지?”
그가 가지에서 남은 열매 하나를 따 손에 쥐곤 핏발 선 눈으로 물었다.
드라이어드들이 재빨리 나가떨어진 날 부축하며 보호 태세에 돌입했다.
“너도 당해 보라고 했잖아.”
봉인의 여파로 초췌한 모습이 되어 버린 그가 이전만큼 무섭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곧 죽을 것 같은 병자처럼 보여 후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지에 걸렸던 봉인을 네게도 걸어 봤어.”
사실 이 봉인이 잘한 짓인지는 모르겠다. 적어도 카수스를 당황하게 만들어 2개의 열매 중 하나를 빼앗아 냈다는 점에서는 이득이었지만….
봉인은 본래 세계수의 가지를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거란 말이지.
그런 점으로 보면 본의 아니게 카수스를 극강의 보호 상태로 만들어 버린 게 아닌가 하는 불안도 있었다. 누구도 손댈 수 없는, 온실 속의 화초처럼 가둬 둔.
가둬 둔다? 불현듯 버스 터미널에서 본 밀폐형 테라리움이 떠오른다. 그러고 보니 봉인의 형태는 어느 정도 테라리움을 닮아 있었다.
“괜찮은 건가요? 저 드루이드가 당신에게 뭔 짓을 한 거죠? 갑자기 당신의 모습이 변했어요.”
카수스의 드라이어드들이 자신들의 주인을 걱정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에게도 카수스가 바뀐 모습으로 보이나 보다.
“암매, 이 팔찌 좀 박살 내 주겠어?”
카수스는 일단 자신의 손목에 수갑처럼 채워진 팔찌를 없애 보려는 속셈으로 보였다. 돌매화가 팔찌에 손을 대자 퉁 하는 소리를 내며 거부 반응을 일으켰다.
“……!”
“너에게 문제가 생긴 게 분명함.”
‘그 누구도 건드릴 수 없게 되리라.’, 그 힘은 자신의 드라이어드조차 거부하는 엄청난 힘을 보였다. 이로 인해 그의 드라이어드들이 적잖게 충격을 먹은 듯했다.
“큰일 났네. 그 봉인, 이제 나 아니면 못 풀 텐데?”
봉인을 풀려면 4개 식물의 태초의 군락지에서 가호를 가져와야만 했다. 하지만 그 가호들은 내가 흡수함으로써 이제 세상에 더 이상 남지 않게 되었다. 그가 봉인을 풀기 위해 군락지를 도는 순례를 하더라도 얻는 게 없었다.
“그렇다면 봉인 시전자를 죽이면 되겠군.”
카수스가 다시금 스태프를 꺼냈다. 겨우 소강되었던 전투를 다시 진행하려는 기세였다.
“이런….”
그가 익숙한 자세로 노멀 필드의 그래프트를 불러오려는 모습이 보였다.
그런데….
파직, 파지직.
카수스가 능력을 사용하려고 하자마자 그의 스태프를 중심으로 둥글게 총 4개의 문자열이 떠올라 회전하기 시작했다. 문자열은 전부 동일한 뜻을 가지고 있었다.
악한 것을 정화하리라.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차리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카수스는 노멀 필드의 그래프트를 사용할 수 없었다. 더불어 데저트 필드도, 바이오 필드도, 스노우 필드도.
드라이어드가 없음에도 드루이드 혼자 그 힘을 사용하는 것은 명백히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봉인은 그걸 ‘악한 것’으로 분류했고, 내게 있는 4그루의 가디언의 힘을 편법으로 사용하지 못하도록 막아 버린 것이다.
“크윽… 쿨럭…!”
더 이상 내가 보유한 가디언들의 힘으로 날 기만할 수 없음을 알게 된 그가 분한 마음을 삼키는 게 보였다. 그러다 돌연 내가 막 봉인을 걸었을 때처럼 새까만 피를 울컥 토해 냈다.
“카수스!”
그의 드라이어드들이 사색이 되어 그를 살폈지만 어딘가 그 모습이 이상했다. 그들은 카수스가 피를 토할 때까지 고통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던 눈치였다.
드라이어드는 드루이드와 아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드루이드가 아프면 그들도 영향을 받고 피곤해하면 그들의 체력 역시 떨어졌다. 마치 한 몸처럼 드루이드의 이상을 곧바로 알아챌 수 있는 게 바로 영혼이 연결된 드루이드들이었다.
그런데 이를 바로 알아차리지 못한다고?
‘그 누구도 진실을 알 수 없으리라.’, 정체를 알 수 없는 꽃의 봉인 문구가 떠오른다.
설마… 참골무꽃의 봉인이 드라이어드의 접근을 막은 것과 동시에 이젠 진실을 볼 눈까지 가려 버린 걸까?
봉인은 카수스를 드라이어드들로부터 철저히 고립시킴과 동시에 그의 능력의 반을 앗아 가 버렸다. 여러모로 봉인이 그에게 이롭기보단 해롭게 작용하고 있음이 확실시되었다.
어쩌면 봉인은 시전자의 마음에 따라 달라지는 게 아닐까?
세계수 가지에 걸린 봉인은 가지를 지키고자 하는 마음이 담겨 카수스의 접근을 막아 냈다면, 내가 건 봉인은 카수스에 대한 악의를 담았기에 공격의 방식으로 발현된 게 아닐까?
“하하, 정말 널 더 이상 살려 둬선 안 되겠구나.”
내게 있는 가디언의 그래프트를 펼칠 순 없다 하더라도 그에겐 아직 6그루의 가디언의 힘이 남아 있었다. 그것도 어떤 힘인지 알 수 없는 미지 영역의.
“우리에겐 변화가 필요해요.”
카수스가 다음엔 어떤 공격을 내보일지 걱정이 가득한 가운데, 메스키트가 진중하게 말했다.
“변화?”
“그와 맞서는 건 세계수와 맞서는 것과 다름없어요. 그가 말했던 것처럼 세계수에 가장 가까이 다가갔던 건 그니까요. 반면 제희는 현재 이도 저도 아닌 어중간한 상태나 다름없어요. 우리의 힘은 상당수가 세계수에게 전해 받은 힘을 아직까지 상당수 사용하고 있으니 완전한 세계수의 힘을 구사할 줄 아는 그에게 밀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나를 지키는 굳건한 방패. 카수스의 공격을 두 번이나 막았지만 결국 세 번째는 뚫릴 뻔했다는 점이 그녀를 고뇌에 빠지게 만든 듯했다.
“그래서 우리에겐 변화가, 다른 힘이 필요해요. 세계수의 것이 아닌 제희만의 고유한 힘이.”
메스키트의 말은 마치 이 상황을 돌파할 수 있는 해답처럼 들렸다.
“나는 모두의 가장 앞에서 모두를 수호하는 존재. 내가 먼저 달라져야겠죠.”
그렇게 말한 메스키트는….
쿵, 쿠쿵.
두 손에 쥐고 있던 방패와 랜스를 바닥에 내던졌다. 그녀의 돌발 행동에 나를 포함한 모두가 당황했다.
“세계수의 무기는 쓰지 않겠어요. 내게 필요한 건 당신의 무기예요.”
그러곤 텅 빈 두 손을 가볍게 앞으로 내밀고 굳게 눈을 감았다. 전투가 벌어지는 전장에서 결코 벌일 수 없는 일이었다.
메스키트의 발언은 묵직한 랜스처럼 내 가슴을 뚫었다. 벼락을 맞은 듯한 감각이 온몸을 휩쓸었고 곧이어 벅차오르기 시작했다. 메스키트와 그래프트를 사용할 때처럼 강렬한 스모키향이 나를 감쌌다.
솨아아.
모래가 바람에 쓸리는 소리가 들리고… 메스키트에게 무언가 변화가 생겼다.
항시 태양 아래 사막의 모래와 같은 금빛이 함께했던 그녀가 새까만 빛에 휩싸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