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누구도 건드릴 수 없게 되리라.
선명히 떠오른 문자열은 이제 가지에 남은 마지막 문자열이었다.
챙강.
마지막 문구마저 끊겨 사라지자 세계수 가지를 감싸던 모든 빛이 흩어지고 이내 백옥 같은 신비로움을 뽐내는 멀쩡한 가지만 남게 되었다. 가지의 봉인이 모두 풀렸다.
카수스가 시전 중이던 모든 공격을 무르고 황급히 가지에 손을 대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자 처음엔 그를 거부했던 가지가 순순히 그의 손길을 받아 주고 있었다.
‘그 누구도 건드릴 수 없게 되리라.’, 봉인석을 가진 이가 나타날 때까지 누구도 가지에 손댈 수 없게 만들었다.
일련의 문구들은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었다. 비로소 왜 봉인석을 만들 때, 4가지의 태양의 가호와 태양의 보석이 필요한지 알 수 있었다.
어느 하나가 빠진다면 봉인의 균형을 이루기 힘들었다.
더불어 난 태양의 가호를 이렇게 연계하여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놀라워 머릿속이 맹렬하게 회전하는 걸 느꼈다.
태양의 가호를 많이 다뤄 본 적이 없는 난 한 개의 힘을 하나의 상황에서만 사용해 왔고 그것 외에 다른 걸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태양의 가호를 연계하여 시너지를 발생시킬 수 있다는 걸 알게 되니…. 4개의 가호가 모여 하나의 거대의 봉인을 만들어 내듯 모든 힘을 종합하면 어떠한 거대한 힘이 탄생할 수도 있다는 사실에 설레는 기분이 들었다.
“저길 봐!”
엘더가 스태프로 가지의 한 부분을 가리키며 내게 말했다.
“저건!”
그곳엔 놀랍게도… 드라이어드 열매가 맺혀 있었다. 가지가 멀쩡히 살아 있긴 해도 잎이나 열매가 맺혀 있는 곳은 아무 데도 없었는데, 딱 한 곳, 깊숙한 곳에 위치한 가지에 투명한 드라이어드 열매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것도… 두 개가.
하나의 꼭지에 무려 두 개의 열매가 마치 앵두처럼 함께 매달려 있었다. 기이한 현상이었다. 꼭지 하나에 열매 하나, 이것이 여태 봐 왔던 세계수 가지에서 열매가 맺히는 방식이었다.
열매를 발견한 건 카수스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얼굴은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찾은 사람처럼 광기에 젖어 들었다.
저곳에…. 저 열매 중 하나에 필드의 가디언이 있다!
카수스는 이곳에서 리버 필드의 가디언을 얻었다고 했다. 그렇다는 건….
나와 카수스는 동시에 열매가 맺혀 있는 가지를 향해 뛰었다. 각자의 드라이어드들 역시 지금 최우선 상황이 무엇인지 깨닫고 곧바로 행동으로 옮겼다.
내 주인은 열매로, 상대는 접근하지 못하도록.
카수스가 공격을 사용하던 패턴을 보면 모든 공격에서 동일하게 제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열매를 갖기 위해선 움직여야 하니 공격을 펼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당장 연속적으로 휘몰아치는 그래프트의 위험에서 벗어난 것은 다행이나 여기까지 와서 열매마저 뺏기면 미래는 없었다.
카수스는 통행에 방해되는 세계수 가지의 잔가지들을 전부 망가뜨리며 전진했다. 반면 난 그보다 작은 키를 이용하여 허리를 숙인 채 온 힘을 다해 달렸다.
두 사람 전부 동시에 열매 근처에 도달했지만 애초에 가지에 더 가까웠던 카수스가 조금 더 앞섰다. 날 발견한 카수스가 단도를 꺼내 드는 것이 보였다. 그러곤 경쟁자를 제거하기 위하여 단도를 던지려는 게 보였다.
챙강.
하지만 그의 시도는 벌처럼 날아온 데이지에 의해 막혔다.
그가 전투에 합세하지 않는다면 드라이어드 머릿수가 많은 내가 전적으로 유리했다.
뒤이어 데이지가 줄기를 뻗어 카수스의 움직임을 막으려고 했다. 그러나 간발의 차로 그는 열매가 맺힌 가지에 도착한 후였다. 열매 두 개를 모두 욕심낼 심산인지 가지를 통째로 꺾어 가려는 게 보였다.
둘 중 어떤 열매가 가디언의 열매인지 알 수 없었지만 둘 모두 뺏긴다면 확률은 100%가 되는 거나 다름없었다.
“죽어도 못 줘!”
심장이 세차게 뛰며 온몸 구석구석 뜨거운 피를 보낸다. 절체절명의 순간, 놀랄 만큼 엄청난 집중력이 발휘되며 카수스를 저지하기 위한 수십 가지의 작전들이 머릿속을 메운다.
그동안의 경험에 빗대어 떠올린 작전들이 실행 가능성과 성공률 순으로 소거되거나 순위가 재정렬되고, 마침내 번뜩이는 단 하나의 수가 떠올랐다.
세계수 가지를 대상으로 했던 봉인, 그걸 카수스를 대상으로 시전한다면?
봉인을 진행하기 위한 준비물은 전부 내 손안에 있었다. 태양의 보석과 가호가 봉인을 푸는 열쇠였다면 한편으론 다시 봉인을 구축할 수 있는 도구이기도 했다.
어떤 메커니즘으로 봉인이 완성됐는지는 이미 전부 이해했다. 그렇다면…!
난 열매를 향해 뻗었던 손을 틀어 카수스에게로 향했다. 가지를 쥔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갑작스러운 내 행동에 그가 당황하는 게 보인다.
봉인의 마지막 단계는 참골무꽃의 문구였다. 그렇다는 건 봉인을 다시 하기 위해선 풀렸던 과정이 역순으로 진행되어야 했다.
“너도 당해 봐.”
참골무꽃의 가호가 담긴 보석에서 터져 나온 빛이 내 팔을 타고 흘러 카수스를 붙잡은 손까지 도달했다. 이윽고 가지가 보랏빛에 잠식되었던 것처럼 그의 몸이 빛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이상을 느낀 그가 내 손을 뿌리치기 위해 거칠게 반항했다. 이에 따라 빛의 세기도 들쑥날쑥 불균형하게 흔들리는 게 보였다.
그의 근력을 이겨 내기 힘들어 뿌리치는 대로 내 몸이 이리저리 흔들렸지만, 떨어지지 않으려 손톱까지 박아 가며 안간힘을 쓰고 붙들었다.
어쩐지 봉인을 진행하기에 힘이 달린다는 느낌이 들고 있는데….
챠르르.
내 주머니에서 아쿠아마린 팬던트가 멋대로 튀어나와 허공에 떠올랐다.
그 누구도 건드릴 수 없게 되리라.
가지를 감쌌던 문구가 카수스의 주위로 떠올랐다.
난 주머니에서 나머지 아쿠아마린 장신구들을 전부 꺼내 허공에 던졌다. 그러자 각 장신구들이 서로 하나의 빛의 선으로 이어지며 원을 만들었다.
그 누구도 진실을 알 수 없으리라.
정체 모를 식물의 가호가 힘을 더하자 놀랍게도 카수스의 모습이 점점 변해 가기 시작했다. 그는 처음 만났을 때의 시체와 같은 모습으로 퇴화되었다. 피부가 윤기를 잃으며 푹 꺼졌고 머리카락도 지푸라기처럼 변해 갔다.
“내게 무슨 짓을!”
악한 것을 정화하리라.
퉁퉁마디의 가호가 봉인에 더해졌을 때였다.
“쿨럭….”
그는 별안간 새까만 피를 한 움큼 토해 냈다. 바닥에 떨어진 피는 놀랍게도 극저온의 상태에 흩뿌려진 것처럼 빠르게 결정화가 진행되었다. 눈꽃의 모양을 띠며 얼어붙던 피들이 작은 충격에도 서로 부딪혀 유리처럼 깨졌다.
“너….”
때를 기다리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