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 막기만 해선 이길 수 없었다. 내 쪽에서도 카수스에게 한 방 먹일 수 있는 공격이 필요했다.
카수스는 어떻게 저런 능력을 페널티 없이 사용할 수 있는 거지? 정말 세계수가 내린 특권 같은 거라고? 아니, 아무리 세계수의 능력이라 하더라도 저렇게 밸런스 문제가 심한 능력을 일개 인간에게 그냥 줄 리가….
“왜? 더 발버둥이라도 쳐 보지.”
속수무책으로 카수스를 노려보니 그가 비웃으며 말했다.
저 거만한 말투, 마치 자신이 신이라도 되는 듯한 말투가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 모든 노력을 계란으로 바위 치기와 다름없다는 투로 내 절망을 즐기고 있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좋은 대안이 나오지 않는다. 그래프트를 상대로 드라이어드들에게 그냥 뛰어들라고 하기엔 큰 부상을 얻을 수 있었다.
생각해 내야 해!
슈우우욱!
그때, 바람의 검이 전조 없이 우릴 향해 쏟아졌다. 메스키트가 급하게 엘더와 함께 보호막을 전개하며 이를 막아 냈다.
보호막은 경고 등처럼 쉴 새 없이 붉게 빛났고 방패를 올려 든 메스키트의 표정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콰광!
역시나 그래프트로 막았을 때보다 피해가 막대했다. 모두가 전멸하는 치명적인 상황은 피했으나 엄청난 여파로 모두가 멀리 내던져졌다.
난 드라이어드들의 보호를 최대한 받았지만 충돌의 여파로 생긴 상승 기류에 적잖게 몸이 밀려났다. 흙먼지가 걷히고 바라본 정면은 가히 비관적이었다.
카수스의 등 뒤에 남은 구슬의 개수는 7개, 단 3개의 검만으로 우리를 초토화시킨 것이다.
구슬을 소수만 사용하여 간을 보는 건 전대 노멀 필드 가디언의 모습과 닮아 있어서 기분이 나빴다. 그 주인에 그 드라이어드.
“제희, 괜찮아요?”
다급한 메스키트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녀는 공격을 온전히 막아 내지 못한 게 무척이나 자존심이 상했는지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메스키트가 아니었다면 최소 몸 한 군데에서 피를 질질 흘리고 있었을 게 분명하기에 결코 그녀의 능력 부족이 아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기 위해 아무 데나 짚이는 곳에 손을 댔다. 그런데….
우우웅.
심상치 않은 진동 소리가 들려왔다. 당장 진동을 유발하는 기술이 없기에 마치 건물 전체가 스스로 진동하는 듯한 기이한 현상이었다.
난 무심코 손을 댄 게 무엇인지 확인했다.
충돌 여파로 인해 밀려나며 난 어느새 세계수 가지의 끝자락에 도달해 있었다. 내가 손을 댄 건 축 늘어진 세계수 가지의 끝부분이었다. 손을 댄 부분이 새하얗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어?”
카수스가 가지에 손을 대자마자 격렬한 거부 반응에 튕겨 나갔던 걸 떠올려보면, 이렇게 여상히 손을 대고 있는 게 기묘할 정도였다.
내 손과 가지의 접촉 부위에서 파생된 빛이 크기를 키우더니 빠른 속도로 다른 가지를 타고 번지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공기를 뒤흔드는 진동도 더욱 거세졌다.
가지에서 일어난 예사롭지 않은 변화에 카수스 역시 공격을 멈추고 이를 지켜봤다.
차르르.
어디선가 여러 개의 가는 쇠사슬들이 서로 부딪히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마침내 모든 세계수의 가지가 새하얀 빛에 둘러싸였을 때, 가지를 중심으로 알 수 없는 문자들이 떠올랐다. 일련의 문자 행렬은 수십 줄이나 되었고 가지를 감싸듯 둥글게 회전하며 반짝반짝 푸른빛을 냈다.
그 문자들은… 봉인석에서 확인할 수 있었던 기이한 문자들과 닮아 있었다.
가지가 변화를 일으킴에 따라 기이하게도 갯방풍의 태양의 가호가 담겨 있는 오른쪽 어깨의 보석에서 새하얀 빛이 터져 나왔다.
이와 동시에 수많은 문자열 중에서 한 줄이 선명하게 빛을 발하며 떠올랐다.
때를 기다리리라.
갯방풍의 군락지에서 얻은 반지 안쪽에 새겨져 있던 문구를 나타내는 문자열과 같았다.
차각, 챙강. 챙강.
곧이어 쇠사슬이 끊어지는 듯한 소리가 들리더니 문자열이 툭 끊겨 사라져 버렸다.
그러자 이번엔 세계수 가지가 다홍색 빛으로 물들었고, 동시에 오른쪽 손등에 박힌 퉁퉁마디의 태양의 가호를 담은 보석도 똑같이 반짝거렸다.
이전처럼 수많은 문자열 중에서 또 다른 한 줄이 떠올라 선명하게 빛을 발했다.
악한 것을 정화하리라.
난리 통에 공기에 가득 떠오른 흙먼지들이 일제히 정화되어 사라지며 가지 주변에 상쾌한 공기가 감돌았다.
챙강.
이 문자열 또한 쇠사슬이 끊기는 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난 일련의 과정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단번에 눈치챘다. 세계수 가지의 봉인이 풀리고 있었다.
봉인석을 소지한 내가 열쇠나 다름없었고 가지와 접촉하자 마치 자물쇠가 풀리듯 반응이 일어난 것이었다. 이 상황을 긍정적으로 봐야 할지 부정적으로 봐야 할지 알 수 없었으나, 내 걱정과 다르게 봉인은 착실하게 풀려 갔다. 손을 떼려 해도 접착제를 발라 놓은 것처럼 뗄 수 없었다.
두 번째 봉인이 풀리자 가지는 어느새 연보라색 빛으로 휩싸였다.
다음으로 떠오른 문구는 ‘그 누구도 진실을 알 수 없으리라.’였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식물의 군락지에서 얻었던 태양의 가호가 담긴 보석 역시 빛을 내었다.
해당 봉인이 풀리자 더욱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세상에….”
“가지가…!”
“가지가… 죽은 게 아니었어?”
투두둑, 툭.
가지를 감싸고 있던 죽은 껍질이 툭툭 떨어져 내리고 그 안에 숨어 있던 새하얀 전신이 드러났다. 멸망한 테라리움과 함께 가지 역시 생명을 다한 게 이치에 맞음에도 불구하고 여느 테라리움에서 볼 수 있는 생생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진실을… 알 수 없다고 하더니. 설마!”
비로소 문구들이 세계수의 상태를 의미함을 깨닫게 되었다.
‘때를 기다리리라.’, 봉인이 풀리는 날까지 모든 상태를 연장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악한 것을 정화하리라.’, 세계수 가지가 외부의 공격으로 인해 다치는 것을 방지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 누구도 진실을 알 수 없으리라.’, 가지에 거짓된 모습을 씌워 죽은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가지 전체가 짙은 보라색 빛에 휩싸이며, 이에 동조하듯 내 가슴께에 위치한 참골무꽃의 태양의 가호가 담긴 보석도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