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52화 (552/604)

카수스의 능력은 가히 신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었다.

내가 신의 능력이라 칭하는 가드닝 스킬을 사용하지 않고도 경험해 봤던 그래프트를 드라이어드 없이 스스로 재현해 낼 수 있다는 점에서 세계수의 화신이라 느껴질 정도였다.

만약 내가 그대로 세계수의 순례자 길을 밟았더라면, 나 역시 카수스와 같은 능력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을까 하는 의문도 들었다. 달리 말하자면 본래 제이가 밟았어야 할 엔딩을 카수스는 이미 경험했던 것이고 그 엔딩 특전까지 가지고 있는 셈이나 다름없었다.

메스키트의 그래프트를 보여 준 후 그는 곧바로 허공에 10개의 구슬을 띄웠다. 노멀 필드 가디언의 능력으로 현재의 데이지가 부상 상태에 돌입해야만 사용할 수 있는 그래프트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사용하는 그래프트는 전혀 페널티가 없어 보였고, 전대 가디언이 발동했던 것만큼의 상당한 기세가 느껴졌다.

저 그래프트 한 번에 전멸을 맞이할 뻔했기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내가 잘못 본 건가? 지금 인간이 식물의 능력을 사용하는 것 같은데. 내 말이 맞아?”

지켜보며 때를 노리던 애쉬가 내게 물었다. 드루이드가 아닌 그의 눈엔 지금 상황이 무척이나 비정상적으로 느껴질 것이다.

“맞아. 본래 저 능력은 드라이어드와 함께 특정 조건을 만족해야만 사용할 수 있어. 그런데 지금 저놈은 그런 조건도 없이….”

쿵!

메스키트가 방패를 땅에 내리꽂는 소리가 들렸다.

“제희, 이 공격은 제 힘으로 막아야 해요. 알고 있죠?”

“알겠어.”

그녀의 말이 맞았다. 저런 대규모 공격은 같은 급의 가디언이 그래프트를 펼쳐 저지하는 수밖에 없었다.

전대 노멀 필드 가디언을 상대할 땐 메스키트가 없었기에 속수무책으로 당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메스키트와 하나가 되는 걸 느끼며 이미 카수스가 사용했던 절대 방어의 그래프트를 다시 한 번 선보였다.

솨아아아….

푸른 기운을 담은 모래가 바닥에 요동친다. 마음을 단단하게 만드는 기운이 급속도로 사방에 퍼져 나갔다.

파직, 파지직.

허공에선 기운과 기운이 부딪혀 불협화음을 내고 있었다. 수많은 스파크가 터지며 불안한 기운을 고조시켰다.

쿠구궁!

카수스가 했던 것보다 몇 배는 더 높고 두꺼운 모래의 방벽이 세워졌다. 푸른 기운을 먹은 모래 벽은 하나의 테라리움 단위를 통째로 포괄할 수 있을 만큼 능력이 강했다.

이건 메스키트의 대단한 능력과 함께 내가 가진 다이아의 힘이 동시 보좌를 하고 있기 때문에, 카수스가 사용한 능력의 강화 버전이나 다름없었다.

“힘 싸움을 해 보자는 거면….”

그래프트의 능력은 공격 방어와 더불어 모든 능력을 취소시켜 절대 방어를 노리는 힘이었다. 이론대로라면 카수스가 사용하는 힘도 끊겨야 하지만 가디언의 그래프트 간의 힘 싸움이었기에 단번에 끊기진 않았다.

능력 간의 충돌이 발생하며 사방에 숨이 막힐 듯한 기운이 모두를 짓눌렀다.

무자비한 공격과 절대 방어의 싸움. 검과 방패의 힘겨루기.

카수스가 만들어 낸 10개의 구슬이 바람의 칼날이 되어 우릴 향해 파고들었고, 메스키트의 모래 벽은 조금의 틈도 내주지 않고 굳건하게 버텼다.

검과 방패의 충돌로 건물 곳곳에 작은 모래 폭풍이 발생했고 이에 드라이어드들이 휘말리게 되었다.

콰지직!

“……!”

모래 벽을 뚫으려는 검에 금이 가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이내 땅에 떨어진 유리처럼 깨져 형태를 유지하지 못한 채 사라져 버리는 모습이 보였다.

내 승리였다. 바람의 검은 결국 모래 벽을 뚫지 못했고 힘의 충돌을 이기지 못한 채 사그라들었다.

카수스는 의외의 결과라는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나 역시 의연한 표정으로 받아치고 싶었지만 표정 관리가 힘들었다.

“하아… 하아….”

온몸이 급속도로 피로해지는 걸 느꼈다. 힘겨루기는 이겼지만 완전한 승리는 아니었다.

가뿐히 능력을 막아 내는 것과 겨우 막아 내는 건 확실히 차이가 있었다. 결국 내가 이겼지만 과정만 놓고 보자면 카수스의 힘을 간신히 이겨 낸 것과 다름없었다.

겨우 붙들고 있던 긴장을 조금 풀자 모래 벽이 조금씩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제 역할을 다했으니 사라지는 게 맞으나 엄습해 오는 이 불안은 뭐지?

“놀고만 있진 않았나 보군. 그래프트에 뭔가 기묘한 힘이 섞여 있는 것 같은데?”

메스키트의 그래프트를 본 그가 평가했다. 자신이 펼쳤던 그래프트와 달랐다고 말한다. 아마 우리 그래프트에 섞여 있는 내 다이아의 기운을 느낀 것이겠지.

“그렇다면 한 번 더 요행이 가능할까?”

우우웅.

공기가 기분 나쁘게 진행하더니 절망적이게도 그의 등 뒤로 다시금 10개의 구슬이 떠오르는 게 보였다.

노멀 필드의 능력을 한 번 더 사용하려는 게 분명했다.

“지연 없이 바로 재사용하는 게 가능하다고?”

이건 너무 사기가 아니냐고 소리치고 싶을 정도였다.

이게 게임 속이라면 저놈은 치트키를 넘어 핵 유저나 다름없었다!

그래프트는 드라이어드와의 필살기와 같은 개념이라 사기적인 힘을 발휘하는 건 맞았지만, 그렇다고 원하는 대로 마구잡이로 사용할 수 있는 힘이 아니었다.

적어도 재발동하는 데에 영혼이 연결된 드라이어드의 교감도가 다시 회복할 때까지 기다리는 쿨타임이 존재했다. 깎여 나간 정신력을 어느 정도 회복할 시간도 필요했고.

“시들링, 미안하지만 시간 좀 벌어 줄 수 있어?”

가디언의 그래프트를 상대로 보통의 그래프트로 맞서라는 격과 다름없었지만, 시들링은 조금의 고민도 없이 태세를 취했다.

난 무너진 모래 벽을 다시 수습해야 했다. 조금 전 노멀 필드의 그래프트를 막기 위해 사용했던 것처럼 견고한 모래 벽을 만들어 내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선 정신력을 회복할 조금의 시간이 필요했다.

시들링이 나서자 양귀비도 기다렸다는 듯이 나섰다.

저 드라이어드의 능력은 내성이 없을 경우 너무 강했다.

“나도 거들까?”

“넌 안 돼! 넌 아직 아니야.”

양귀비에게 맥없이 당했던 게 은근히 마음 쓰였는지, 드라이어드를 본 애쉬가 경쟁심을 불태우는 게 보였다. 어떻게든 한 방을 먹여 주고 싶어 하는데, 그렇게 되면 능력을 사용한 그는 내가 상태를 살펴봐 주기 전까지 그로기 상태가 된다.

내 저지에 그가 자존심이 무척 상한다는 얼굴로 날 바라봤다.

“네 능력은 아직 빛을 볼 때가 아니야. 우리가 그동안 전투해 왔던 방식을 떠올려.”

그를 저지하는 건 이 상황에서 하등 도움이 안 된다는 뜻이 아니라 쓰임새가 달랐기 때문이란 걸 이해시켰다. 테라리움에 진입 후 애쉬는 한 번도 능력을 제대로 사용한 적이 없었다. 그의 능력은 페널티가 큰 만큼 적이 의도치 못한 순간에 기회를 만들어 낼 때 필요했다.

우리가 그동안 전투해 왔던 방식, 애쉬가 제대로 따라 준 적은 드물지만 어떤 때에 그의 전투 개입을 원했는지 그가 떠올려야만 했다.

이해한 건지 불만이 가득한 표정이지만 그가 물러난다.

시들링이 칼미아와 그래프트를 펼치며 손에 두 자루의 장총을 쥐었다. 이에 질세라 양귀비가 부채질을 하며 향정신성 능력을 펼쳤다.

시들링 위에 덧입혀진 칼미아의 기운이 세차게 요동치는 게 보였다. 그래프트가 정신력의 능력을 많이 받다 보니 교감이 흐트러지고 있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는 이에 지지 않고 이를 악물고 카수스를 향해 위협 사격을 펼쳤다. 주인을 지키기 위해 돌매화가 황급히 전선으로 뛰어들었다.

“도울게요!”

데이지가 무기를 들고 돌매화를 향해 뛰어갔다.

시들링의 그래프트가 전혀 효과가 없었던 건 아니다. 그의 공격을 피하느라 카수스가 힘에 집중을 하지 못하는 게 느껴졌다. 그만큼 공격 주기가 늦춰져 마침내 나 역시 메스키트와의 그래프트를 온전히 펼쳐 그에 맞설 수 있는 시점까지 도달했다.

모래벽이 세워지자 양귀비의 능력이 단번에 끊겼다. 덕분에 페이스를 되찾은 시들링이 후퇴하며 때를 놓치지 않고 공격 타깃을 카수스에서 양귀비로 바꿨다.

탕! 타탕!

칼미아의 총에서 발사된 탄환이 양귀비를 향했고, 스킬이 끊기며 완전히 무방비 상태가 되었던 양귀비에게 유효타를 내었다. 첫 발은 간신히 피했으나 피할 곳을 예견해 한 번 더 쏘아진 탄환은 미처 피하지 못했다. 결국 양귀비는 어깨에 큰 상처를 입으며 꺾였다.

바크를 적시는 제 피를 보며 분노하는 게 보였다. 저렇게 큰 상처를 달고 있다면 시들링과 애쉬를 괴롭히는 향정신성 능력 사용에도 영향을 끼치리라.

파직, 파지직.

양귀비를 쓰러뜨린 걸 기뻐하는 것도 잠시, 곧바로 카수스의 공격이 모래 벽에 부딪혔다.

“몇 번이고 공격해 주마. 과연 누가 이길지 궁금하지 않느냐?”

버거운 나와 달리 저쪽은 여유가 묻어 나오는 목소리라 열이 받았다.

그의 재공격은 다시금 내 승리로 끝났다.

쩌적….

하지만 첫 승리와는 결과가 조금 달랐다. 견고했던 모래 벽에 금이 생겼다.

이대로 다시 재공격을 받는다면… 다음엔 모래 벽이 뚫리지 않을까 하는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그가 다시금 구슬을 만들어 내는 모습을 보니 그 생각이 더욱 짙어졌다. 그는 고집스럽게 노멀 필드의 그래프트를 펼쳤다.

다른 그래프트를 펼쳐 전략을 바꿀 수 있을 텐데도…. 마치 내 곁에 있는 가디언들의 능력을 통해 우위를 보여 주고 싶다는 과시가 느껴질 정도였다.

데이지는 아직 저만큼 완벽한 그래프트를 펼칠 수 없기 때문에 능력의 완성도만 놓고 본다면 기만질은 충분했다. 그러나 그 능력으로 나를 완전히 제압할 수 있느냐는 다른 문제겠지.

“다시 공격이 온다면….”

사르르….

나를 감싸던 모래가 무너지듯 바닥으로 떨어지는 게 느껴졌다. 메스키트와의 그래프트가 풀리려고 하고 있었다. 다음 공격은 메스키트의 그래프트로 막지 못한다는 게 기정사실이 되었다.

나는 지금 카수스라는 한계와 맞닥뜨렸다.

“잘 싸우긴 했지만. 거기까지군.”

이를 느낀 카수스도 더욱 기세를 올렸다.

이전까지의 과정이 전부 내 승리로 끝났다 하더라도 마지막이 중요했다.

내가 지금 그래프트를 사용할 수 있는 드라이어드는 셋. 그중 하나는 힘을 다했고 남은 건 둘인데, 데이지와의 그래프트는 부상이 필요했고 엘더의 그래프트는 회복에 치중했기에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다음 공격이 온다면 어떻게 막아야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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