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수원의 중심, 세계수 가지가 있는 방 안에서 거만하게 앉은 카수스가 날 맞이했다.
그의 모습을 보자마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잠깐이지만 마거리트가 내게 이별을 고하는 꿈속에서 부활한 그의 모습을 봤었다.
병자처럼 파리한 얼굴, 거미줄처럼 들러붙은 머리카락, 움푹 파인 볼에 툭 꺼진 두 눈. 그런데 금안만큼은 흉흉하게 빛나서 귀신의 얼굴을 목도한 줄 알았었다. 더구나 뼈만 남은 듯한 앙상한 몸에 마거리트의 어깨를 잡아끄는 손가락은 나뭇가지와 같았다.
한마디로 되살아난 시체를 보는 듯했지.
동면 상태로 숨만 겨우 붙여 놨다 들었으니 막 깨어난 그의 모습이 그런 꼴을 하고 있는 것도 이해가 갔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전체적으로 아직까지 핼쑥한 느낌은 그대로지만 살과 근육이 붙어 모습이 많이 달라졌다. 예전 실새삼을 만났을 때 엿보았던 전성기 때의 그의 모습을 아주 빠른 속도로 되찾아 가고 있었다.
지나치게 빠른 속도로….
이대로 조금만 시간이 더 지난다면 그는 본래의 모습을 되찾을 것이다.
“늦었잖아.”
그가 책망하듯 말했다.
“이렇게 마주하는 건 처음이지? 사는 내내 어찌나 요란하게 일을 벌였는지 당신의 이야기를 지겹도록 접하게 되더라고. 자신의 기록을 지우기 위해 그렇게 노력했다고 들었는데 다 헛수고네?”
그를 상대로 말이 곱게 나올 리가 없었다.
내 말에 그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새롭게 시작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이 세계에 내 명성이 남아 있다니. 나쁘지 않은데?”
그의 말투는 묘하게 사람의 신경을 긁었다. 그런 점에서 애쉬와 닮았다.
카수스의 옆엔 양귀비 드라이어드가 찰싹 붙어 갖은 교태를 부리고 있었다. 우릴 업신여기며 기세 좋게 물 먹였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래서… 가져왔지?”
카수스가 내게 물었다. 마치 뭘 맡겨 놓은 듯한 당당한 태도였다.
“뭘?”
“세계수 가지에 걸린 봉인을 풀 수 있는 무언가를 말이야. 아주 재밌는 짓을 벌여 놨더라고.”
그렇게 말한 그는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났다.
“이것 봐.”
그러곤 세계수 가지를 향해 손을 뻗었다.
티잉!
그러자 놀랍게도 가지에 닿은 그의 손이 퉁 튕겨져 나왔다. 마치 가지가 그의 손을 거부하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아? 이것 때문에 내가 얼마나 오래 이곳에 발이 묶였는지. 대단한 녀석들이야.”
맨눈으로 봤을 땐 세계수 가지에 별다른 특이점이 보이지 않았다. 그저 테라리움의 멸망과 함께 생이 다한 가지만 존재할 뿐이었다. 봉인되어 있음을 나타내는 어떠한 현상도 확인할 수 없었다. 그저 가지가 카수스의 손길을 거절하는 것 외에.
“그래, 이 테라리움은 지독하리만큼 날 수치로 여겼었지. 나서서 이 짓거리를 해 놓은 게 오히려 어울릴 정도야.”
“네가 뭐라고 지껄이는지 하나도 이해가 안 가.”
어딘가 나사 하나가 빠진 사람처럼 느껴졌다.
“들었어. 너 역시 모험의 첫 드라이어드를 가디언으로 뽑았다지?”
그 이야기가 나오자 나도 모르게 마거리트에게 시선이 갔다. 그가 내 이야기를 알고 있는 원인은 그녀밖에 없었다.
“네 여행은 많은 점에서 나와 닮아 있어. 내 첫 드라이어드도 가디언이었거든. 첫 모험을 필드의 가디언과 함께. 그건 장차 위대한 인물이 될 거란 운명이나 다름없었지. 수많은 드루이드 중에서 선택받았다는 거잖아?”
내게 동의를 구하듯 은근하게 묻는다.
“날 너와 같은 취급 하지 마.”
저자와 한 데 묶이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선배 드루이드로서는 존경할 점이 많은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 끝의 결과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끔찍했다.
만약 그가 사리사욕을 채우려다 멸망을 가져온 사람이라는 걸 몰랐다면…. 지금 이 순간을 무척이나 황송하게 여겼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빅토리아와 함께 명성을 떨칠 땐 이곳에선 입구에 팻말을 걸어 놓을 정도로 환호했어. 최고의 드루이드가 탄생한 테라리움이라고 말이야.”
“101번째 테라리움이… 네 고향이었다고?”
상당히 놀랐다. 가디언을 얻은 장소 외에 카수스가 태어난 고향이었다니.
“그리고 내가 세계수를 배신했다는 걸 알게 되자 그 누구보다도 빠르게 발을 뺐던 곳이기도 하지. 몇백 년 만에 고향에 돌아왔는데 참으로 놀랍더군. 내가 태어난 집이 있던 곳은 벽을 세워 최근까지 쓰레기 소각장으로 썼었고 부모님의 무덤이 있어야 할 곳은 석회를 부어 공터로 만들어 놨더군. 마치 저주받은 땅이라도 된 것처럼 여기던 게 오늘날까지 이어지다니….”
“그럼 세계수 가지에 걸린 봉인도…. 어쩌면 널 의식한 일일 수도 있겠네?”
“글쎄. 이미 뒈진 놈들의 생각 따위 알 게 뭐야.”
그는 생각도 하기 싫다는 얼굴을 했다.
가지의 봉인은 정말 카수스를 의식했기 때문일까? 하지만 최초로 봉인을 논했던 자들은 그가 부활할 수 있을 거란 사실을 전혀 몰랐잖아?
“자, 이야기는 여기까지. 가져왔지? 가지의 봉인을 풀 수 있는 방법.”
그가 손을 내밀었다.
“왜 내가 그걸 알고 있다고 생각해?”
“암매의 공격을 받고 후퇴한 지 시간이 꽤 됐는데 이제야 날 찾아왔잖아? 더구나 드라이어드 여럿이 테라리움 내부를 수색하고 다녔고.”
역시 그는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었다.
“무슨 짓을 하고도 남을 시간이지. 만약 봉인에 대해 이 자리에서 처음 들었다는 소리 따위 집어치워. 그 정도도 알아내지 못한 녀석을 내 후배라고 부르는 건 수치야.”
“너 같은 선배 둔 적 없어.”
그의 망언에 이가 갈렸다.
“그럼 후임쯤으로 할까? 나 다음의 세계수의 희생자 후임?”
“희생자…?”
역시 카수스는 세계수의 궁극적인 목표에 대해 뭔가 알고 있는 게 분명하다. 가디언을 10그루 모두 모은 그가 마주한 진실은 뭐였을까?
순례자의 길의 끝엔 뭐가 있는 거지?
왜 세계수를 저버리고 영생을 살기 위해 가디언들의 힘을 이용한 거지?
“뭐, 내가 동면 중일 때까진 후임이라 볼 순 있어도 이젠 그럴 필요 없어. 내가 다시 할 테니까. 그러니 봉인을 풀 방법과… 네게 있는 가디언들을 모두 내놔.”
더 말하기 귀찮다는 듯 말투엔 갈수록 성의가 사라졌고, 종래엔 생기가 사라진, 죽어 버린 눈으로 날 바라봤다.
“그동안 그래, 뭐… 고생했어.”
“미친놈. 아직도 네가 세상을 제패하던 그때의 너인 줄 알아? 지금 상황이 이해가 안 가나 본데.”
난 드라이어드들에게 공격 태세를 명령했다.
입만 요란한 놈이었다. 과거의 위용을 믿고 현 상황을 객관적으로 볼 줄 모르는 멍청한 놈이었다.
겨우 가디언 하나에, 눈에 보이는 다른 드라이어드도 둘뿐인 놈이 내 덱을 상대로 허세를 부리다니. 가디언과 양귀비를. 그리고 이를 서포트하는 마거리트를 상대하는 건 쉽지만은 않겠지만 애초에 머릿수부터 차이가 났으니 승부의 결과는 뻔했다.
“일어난 지 얼마 안 돼서 아쉽겠지만 이번엔 영원히 잠재워 줄게.”
공간에 흐르는 기세에 따라 돌매화가 카수스를 지키고 서며 방패를 꺼냈고, 양귀비가 표독스러운 얼굴로 부채를 폈다.
내 주력 전투원들이 다 나와 있음에도 불구하고 카수스 쪽에선 그 외에 다른 드라이어드가 더 나올 것 같진 않았다.
“수가 많다고 자만하는구나. 내가 겨우 드라이어드만 믿고 세계의 정점에 올라갔겠느냐?”
목소리와 말투가 다른 사람처럼 바뀌었다.
그가 손을 위로 뻗었다. 그러자 가볍게 쥔 주먹에서 눈부신 금빛이 터져 나왔다.
빛은 이내 점점 몸집을 불리며 길어지다가 어떠한 형태를 취했다. 마침내 빛이 사라지며 정체를 드러냈다. 그건 스태프였다. 더욱이 무척이나 익숙한 형태였다.
카수스의 것이 좀 더 정교해 보이긴 하지만… 저건 내가 가지 부르기를 할 때 사용하는 스태프였다.
새하얀 세계수의 나무줄기들이 큰 기둥을 감아 올라가고 최상단에선 맹금류의 발톱처럼 모여들었다. 그 안엔 눈부신 금빛을 발하는 동그란 수정이 자리하고 있었다.
“세계수가 날 버린 줄 알았는데… 아직 쓸 수 있더구나.”
그는 그 사실이 전혀 기쁘지 않다는 것처럼 말했다.
“신의 권능은 참으로 재밌지. 세계수는 네게 뭘 주었느냐?”
“예전이라면 모를까. 세계수와의 긴밀한 관계는 끝난 지 오래야.”
“그래? 하지만 다시 욕심내지 않을 수 있을까? 알려 주마. 끝을 본 자의 싸움을.”
카수스의 스태프에서 눈을 뜨고 있기 힘들 정도로 엄청난 빛이 터져 나왔다. 그 빛을 피해 눈을 감았다 떴을 때… 경악했다.
스태프는 다른 형태로 바뀌어 있었는데 역시나 눈에 익은 모습이었다.
그는 빛으로 빚은 방패와 랜스를 들고 있었는데… 메스키트의 무기와 같은 것이었다.
“처음 본 모양이지? 그렇다면 너의 수준으론 겨우 가지를 접목시키는 그래프트 따위가 전부였나 보군.”
“어째서 네가 메스키트의 무기를 들고 있는 거야?”
나 역시 메스키트의 방패와 랜스를 든 적이 있었다. 그래프트의 형태로.
하지만 카수스에겐 메스키트가 없음에도… 마치 그래프트를 하듯 그녀의 시그니처를 덧입고 있었다.
“너처럼 모험이 묘목 수준이나 다름없는 자들은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권능이지.”
쿠구궁!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거대한 지진이 일어났다.
발밑에 빛나는 모래가 마치 강처럼 흘렀다. 지진이 거세짐에 따라 모래는 너울 쳤고 이내 거대한 파도가 되어 사방에 부딪혔다.
이 전조 증상은….
“피해!”
내 모든 드라이어드들이 동시에 움직였다.
데이지와 포인세티아가 카수스를 향해 뛰어들었고 메스키트는 나를 보호하며 방패를 세웠다. 하늘에서 두 드라이어드가 공격을 감행한다면 땅 위론 실새삼이 줄기를 뻗으며 양동 작전을 펼쳤다.
우르릉!
번개가 치는 소리가 들렸다. 파도처럼 부딪히던 모래들이 마침내 거대한 벽을 쌓았다.
이 일대를 뒤흔드는 기이한 전조 증상은 메스키트와 그래프트를 펼쳤을 때와 동일했다.
카수스는 홀로 인간의 몸으로 그 그래프트 능력을 펼쳐 냈다.
그를 중심으로 모래 벽이 솟아오르며 드라이어드들의 모든 능력들이 끊겼다.
메스키트의 그래프트 능력은 셧다운. 이롭든 해롭든, 모든 드라이어드의 스킬을 차단시키는 능력이었다.
그간 여행에서 알게 된 바론 대대로 데저트 필드의 가디언은 벨벳 메스키트였다. 그러니 그래프트도 지금의 메스키트가 사용하는 형태와 많이 다르지 않을 것이다.
모든 능력들이 일제히 끊기며 기세가 한풀 꺾였다.
“나를 거쳐 간 모든 그래프트 능력을 기억한다. 이걸 연륜, 나무들의 언어론 나이테라고 하지. 내게 실재하는 가디언은 한 그루뿐이지만 넌 남은 9그루 가디언의 능력까지 상대해야 될 것이다.”
그가 일부러 메스키트의 그래프트를 먼저 선보인 건 일종의 과시나 다름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