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50화 (550/604)

바닥에 끌릴 정도로 긴 비단 치마만큼이나 밤색의 긴 장발도 눈에 띄었다. 넓은 소매와 금과 옥으로 만들어진 사치스러운 장신구들….

전체적인 복식이 여태 봐 왔던 드라이어드들의 장비와는 느낌이 달랐다. 인삼 드라이어드들을 만났을 때와 같은 느낌이라고 할까?

동양풍, 그것도 아주 높은 관직을 가진 자들이나 입는 사치스럽고 화려한 장비였다. 좀 더 나아가서 방금 등장한 드라이어드의 모습이 마치 동양 판타지에서 접했던 황후 혹은 후궁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날 바라본 드라이어드의 새빨간 입술이 곡선을 그렸다.

챠륵.

두 눈이 마주치자 반짝이는 구슬들로 장식된 금부채를 활짝 펴 하관을 가리고 샐쭉하게 눈웃음을 짓는다. 입술만큼이나 새빨갛게 칠한 눈꼬리 때문에 인상이 더욱 사나워 보인다. 무척이나 개성이 강한 드라이어드였는데 미모도 대단해서 나도 모르게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엘더와는 다른 결의, 사람을 홀리는 위험한 마력을 가진 아름다움이었다.

“후후….”

새빨간 드라이어드가 낮게 웃음을 흘리며 천천히 부채질을 했다. 그러자 주변에 매혹적인 향이 더욱 진득하게 풍겨 왔다. 엘더가 필사적으로 내 호흡을 조절하고 있는 와중에도 그 틈을 파고들어 올 정도였다.

그 향을 맡고 나서 내 몸에 어떤 악영향이 온 건 아니었다. 그저 끝까지 치달았던 긴장이 아주 빠르게 완화되고 있었고 머릿속의 부정적인 생각들이 휘발되며 점점 몽롱해진다는 기분을 받았다.

그 순간….

오른쪽 장갑의 손등에 박힌 다홍색 보석이 환하게 빛을 내뿜었다. 보석에서 피어난 다홍색 빛이 내 위로 껍질을 만들 듯 덧씌워졌고 이내 외부에서 풍겨 오는 향기를 차단해 맑고 상쾌한 공기로 만들기 시작했다.

퉁퉁마디의 군락지에서 얻은 태양의 가호는 ‘정화’의 힘이었다. 힘을 얻을 당시에는 그 쓰임새를 바로 파악하지 못했으나 이젠 알 것 같았다.

새빨간 드라이어드는 등장하기 전부터 우리에게 자신의 능력을 사용했고, 그 능력은 눈에 보이지 않는 향기의 형태로 어떠한 영향을 끼쳤다.

그걸 태양의 가호는 부정한 것이라 판단했고 곧바로 정화의 힘을 발동한 것이다.

경험하고 나니 상당히 사기적인 힘이었다. 이 힘만 있다면 드라이어드의 도움 없이도 나 자신을 여러 디버프 형태의 공격 속에서 지킬 수 있었다.

“저 드라이어드의 능력은…!”

카나비스 드라이어드를 만났을 때와 은둔자의 정원으로 향하는 배 위에서 허브 드라이어드들을 만났을 때 비슷한 경험을 했었다. 정신과 육체를 조종하는 힘.

“네가 101번째 테라리움에서 일어난 마약 사건의 원인이구나.”

내 말에 새빨간 드라이어드는 무척 기쁘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내 말이 맞으며 자신이 원인이 되었다는 말이 상당히 만족스럽게 느껴지는 것처럼 보였다.

“상냥한 내 주인이 무능한 그대들을 기다려 주는 아량을 베풀고 있으니 이제 그만 떼를 쓰고 부름에 응하는 게 어떻겠니?”

“여기서 너흴 쓰러뜨린다는 선택지도 있는데 굳이 왜?”

“너는 괜찮다고 하여도… 다른 이들은 아닌 것 같은데?”

드라이어드가 부채를 접고는 그 끝으로 내 옆을 가리키며 말했다.

“다들 괜찮아?”

드라이어드의 공격에 멀쩡했던 건 나와 내 드라이어드들뿐이었다.

애쉬와 시들링은 마치 취한 것처럼 비틀댔는데 정도가 심하진 않았지만 바르게 서 있는 게 힘들어 보였다.

지킬 드라이어드가 없는 애쉬는 그렇다 치더라도 시들링까지 당한 게 이해되지 않았다.

이전에 카나비스 드라이어드를 만났을 때 알게 된 사실이 있었다. 독은 독으로 제압한다고. 바곳의 힘이 더 강했더라면 내가 카나비스의 능력에 당할 일은 없었다는 거지.

하지만 시들링에겐 그만큼 강한 벨라돈나가 있었기에 애쉬처럼 맥없이 당해선 안 됐다. 물론 지금 스톤 필드 가디언의 등장으로 제약을 받는 벨라돈나가 아티팩트로 돌아간 까닭도 있지만….

“지금이라도 벨라돈나를 부르는 게 어때?”

“…….”

“아니, 바곳에게 능력을 정화할 수 있는 힘이 있으니까….”

이게 디버프 능력이라면 바곳이 활약할 수 있었다. 바곳에게 새빨간 드라이어드의 능력을 해제해 달라 요청했고 곧바로 그가 스태프를 들어 공간 가득 산약초 향을 퍼뜨렸다.

그런데 이질적이게도 두 향이 서로 맞부딪히더니 이내 어느 하나 우열을 가리지 못한 채 따로 섞여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그동안 디버프 해제를 사용했을 때와는 판이하게 다른 상황이었다.

“바곳의 힘이 안 먹히는 거 같은데….”

“벨라돈나를 부른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저건 벨라돈나와 같은 특성을 지녔다.”

“같은 특성이라고?”

그 말에 난 새빨간 드라이어드를 주의 깊게 살폈다. 같은 특성이라면….

“설마 필드에 있는 것만으로도….”

벨라돈나는 필드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상대를 중독시킬 수 있었다. 같은 편이 되어 아예 타깃에서 제외되든가 그 힘을 차단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드라이어드가 필요했다. 그 점이 바로 같은 맹독 식물인 바곳과의 차이점이었다.

“저 드라이어드가 이곳에 있는 것만으로도 영향을 끼칠 수 있어서 힘들다는 거지?”

“그렇다.”

그런 능력이라면 저 드라이어드를 쓰러뜨리는 것 외에 애쉬와 시들링을 구할 방법이 없었다.

“이런….”

그래도 독 계열은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그건 생명력이 깎여 위급하게 만들지만 지금으로선 둘 다 과하게 긴장 완화를 겪고 있는 게 다니까.

다만… 드루이드가 영향을 받으면 드라이어드 역시 온전할 수 없었다. 시들링의 드라이어드들은 눈에 띄게 축 쳐진 모습으로 제 드루이드를 보살폈다.

“전력 손실이 있겠지만… 왜 나 혼자 널 상대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거지?”

“내 능력을 막아 내는 건 칭찬할 일이지만 일을 어렵게 만드는데 재주가 있구나. 해 볼 테면 해 보려무나. 난 당장 너흴 기다리는 내 주인께 데려가는 일이 급하니….”

별안간 새빨간 드라이어드의 타깃이 바뀌었다.

“악!”

그는 다짜고짜 마거리트에게 공격을 가했다. 무방비하게 서 있던 마거리트의 몸이 그대로 꺾여 쓰러졌다.

“듣자 하니 이건 본래 네 꽃이었다고 하지. 각별한 사이였던 것 같은데 이건 네게 돌아갈 마음이 없다 하더라도 넌 다른 것 같거든.”

비단신의 코가 쓰러진 마거리트의 몸을 툭 쳤다.

“별 볼 일 없는 아가야. 난 널 빨리 내 주인에게 데려가기 위해선 뭐든 할 거야. 그걸 위해 이 꽃의 목을 따는 것도 서슴없이 할 테고.”

사뿐사뿐 마거리트의 곁으로 다가간 드라이어드가 그녀의 목 위에서 발을 들었다. 금방이라도 비단신이 잔인하게 마거리트의 목을 짓밟을 것처럼 보였다.

저 드라이어드의 잔혹한 행태도 화가 나지만 더욱 화가 나는 건 그런 취급을 받음에도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은 채 모든 걸 포기한 얼굴로 쓰러져 있는 마거리트의 모습이었다.

다시금 갔으면 사랑이나 받지 왜 그런 취급을 받고 있냐는 분노가 끓어올랐다.

“멈춰. 제안에 응하겠다. 대신 넌 당장 이 자리에서 사라져. 네가 계속 머문다면 나 역시 전투를 고집하겠어. 마거리트에게 더 이상 해를 가한다면 나 역시 똑같이 네게 해를 가하고 말 거야.”

전투를 강행하려던 처음과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애쉬와 시들링이 저 드라이어드의 영향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해 전력 손실이 온 것도 있고, 마거리트가 적팀인 것과 동시에 인질이 되었다.

카수스의 드라이어드들은 이미 과거에 팀을 이뤘던 이들이 다시 모여 팀을 이룬 것이기에 자신들만의 유대감이 무척이나 두터울 거다. 그러니 새로 들어온, 그것도 주인을 갈아탄 마거리트를 심하게 배척하는 것도 모자라 온갖 텃세를 부리고 있는 거겠지.

“내게 명령할 수 있는 건 내 주인뿐이야. 네 태도가 무척이나 내 신경을 거스르지만 이 또한 주인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선 충실한 내가 한 수 접어야겠지. 지체 말고 따라오거라.”

새빨간 드라이어드는 쓰러진 마거리트는 거들떠도 보지 않고 가 버렸다. 그렇다고 남은 돌매화가 마거리트에게 신경을 쓰느냐? 그것도 아니었다.

드라이어드가 사라지자 마거리트는 비척비척 자리에서 일어나 축 처진 어깨로 돌매화 뒤로 가서 숨었다. 내게 자신의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은 발악처럼 보이기도 하여 마음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내가 애정으로 키우던 꽃인데…. 대체 왜….

“번복 불가. 따라오는 걸로 알겠음.”

돌매화가 새빨간 드라이어드가 사라진 방향을 메이스로 가리키며 채근했다.

“이것만 알려 줘. 저 드라이어드의 정체는 뭐야?”

“양귀비다.”

“양귀비…!”

언젠가 인터넷에서 봤던 양귀비의 새빨간 꽃잎이 떠오른다. 그리고 그만큼이나 새빨갛던 드라이어드의 비단옷.

“그 악명 높은….”

양귀비를 모를 리가 없었다. 그 악명 높은 아편 전쟁의 원인이 된 꽃이 아닌가?

더욱이 마약 하면 바로 떠오르는 꽃이기도 하고, 내가 살던 곳에선 재배하는 것도 엄격히 금지할 정도로 위험한 꽃이었다.

“저게 그 양귀비였다고…. 101번째 테라리움이 멸망한 것도 바로 이해가 되네.”

더불어 허탈한 기분도 들었다.

꽃이 가진 전쟁의 역사가 이곳에서도 되풀이되고 있다는 느낌도 받았을뿐더러 결국 꽃 하나로 테라리움의 마지막 명이 끊겨 버린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다들 괜찮아?”

양귀비가 사라지자 이젠 괜찮아졌는지 시들링과 애쉬의 표정이 한결 나아 보였다.

“욕심나는 꽃이군.”

된통 당해 놓고도 양귀비를 떠올리는 애쉬의 표정은 탐욕의 화신 그 자체였다. 카나비스를 탐냈던 조직이니 양귀비는 오죽하겠어. 더구나 그 위험한 힘을 직접 맛봤으니 이를 악용할 수천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그득그득 채웠겠지.

카수스도 그렇고 애쉬도 그렇고. 악독한 놈들의 선호 꽃이 된 양귀비에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쿵!

우리가 미적대는 걸 참지 못한 돌매화가 화를 담아 발을 굴렀다.

“가자, 카수스를 만나러.”

양귀비가 재차 등장해 휘젓고 가는 건 좋지 않았으므로 각자의 상태를 마지막으로 점검한 후 걸음을 옮겼다.

마거리트의 곁을 지나쳐 갈 때, 익숙한 그녀의 향이 은은하게 느껴져 마음이 시렸다. 향기에 더 이상 생기는 없었다.

마거리트는 꿋꿋하게 내 쪽을 바라보지 않고 등을 돌리고 서 있었다. 이따금 튀어 오르는 어깨가 어쩐지 울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녀를 달래 줄 수 없었다.

“마거리트, 네가 뭘 해도 내 마음은 변하지 않아.”

그래서 날 바라보지 않는 꽃에게 한마디 말만 남긴 후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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