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저 하얀 꽃을 잊을 수 있을까. 우리가 다시 만나는 순간을 무척이나 고대해 왔었다.
이곳으로 오게 된 목적의 반은 바로 나의 마거리트를 되찾기 위해서였다.
“마거리트!”
그녀의 이름을 크게 부르자 멈칫 움직임을 멈추고 더 이상 다가오지 못한다.
“마거리트, 널 데리러 왔어.”
우리에겐 할 이야기가 아주 많았다. 날 버리고 카수스에게 간 드라이어드를 탓하진 않는다. 처음엔 배신감이 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마거리트는 미성숙한 드라이어드였다. 완벽히 성장을 끝내고 세계수 밖으로 나온 드라이어드들도 그릇된 선택을 하는데, 큰 중압감을 생긴 상황에서 다른 판단을 내리는 것도 이해가 갔다.
“이리 와. 나와 함께 돌아가자.”
내 말에 멈췄던 걸음이 다시금 움직인다. 그리고 마침내 어둠 속에서 그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많이 수척해진 모습이었다. 또 그새 울었는지 눈가가 빨갰다.
“미안해…. 너와 함께 갈 순 없어. 모두 널 위해서야.”
뚝뚝 끊기는 목소리로 그녀가 힘겹게 말을 이었다.
“왜 그러는 거야? 예언 때문에 그래? 네가 봤던 그 미래가 맞을지도 몰라. 하지만 난 예전의 ‘제이’가 아니야! 예언이 달라졌을 거야!”
많은 의미를 담고 있는 말이었다. 내게서 아바타 제이는 떨어져 나갔다. 그리고 순순히 세계수의 순례자의 길을 걷는 제이와 달리 난 다른 길을 걷고 있었다. 나와 제이의 엔딩은 명백히 달랐다.
마거리트가 걱정하는 미래는 오지 않을 것이다.
내가 이 여행의 끝에서 결국 자살을 선택한다는 말도 안 되는 미래.
그 길만이 자신의 목숨 하나로 자신의 소중한 존재들을 살릴 수 있는 길임을 확신했다.
어차피 이곳은 원래 자신의 세계도 아니지 않는가?
‘본래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자.’
그렇게 마음을 먹은 공제희가 자살을 선택했을 때, 모든 게 끝났다.
“달라지지 않아.”
그 말만큼은 끊기지 않게, 확신이 서려 있었다. 마거리트는 굳게 믿고 있었다.
마거리트는 세계수 밖으로 나오기 전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을 선택했기에 내 곁으로 올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후 그녀는 그 선택을 파기하고 ‘가장 소중한 존재가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을 선택했다.
그녀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는 드루이드인 나이므로, 어쩌면 그녀가 본 미래인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 중에 내 죽음이 포함되어 있어 선택을 바꾼 거라고 생각한다.
대의를 위해 나 하나를 희생하는 길, 있을 법한 이야기였지만 지금의 나라면 그 누구의 희생없이 대의를 얻는 길을 찾고 말 것이다. 그게 내 목숨이라면 더더욱.
난 그다지 정의롭고 희생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세상을 위해 내 목숨을 포기하라고 한다면 엄청 망설일 거다. 그리고 결코 그런 선택을 하지 않을 거다. 죽는 건 무서우니까.
“네겐 같은 제목의 책이 두 권이 있었지. 그리고 한 권은 스스로 파기했고. 다른 책을 내게 보여 줘. 그리고 우리 둘이 깊이 이야기를 나눠 보자. 네가 오해하는 게 있다면 풀고 내 속마음을 네게 전해서, 다시 예전처럼 네가 나의 드라이어드가 되는 거야.”
마거리트의 얼굴이 울 것처럼 찡그려졌다.
“그래서 안 된다는 거야. 나의 옛 진리는 너무 다정해서… 아무도 널 지킬 수 없을 거야.”
그녀는 끝끝내 우리가 있는 쪽으로 오지 않았다.
“추함. 울 거라면 돌아가는 걸 기원함.”
마거리트는 입술을 깨물고 돌매화의 곁에 섰다. 그녀를 바라보는 돌매화의 표정은 썩 곱지만은 않았다. 카수스의 품으로 간 마거리트가 그의 드라이어드들에게 그다지 환영받는 존재가 아님을 잘 알 수 있었다.
어째서 그런 대접을 받으면서까지 카수스 곁을 지키려고 하는지….
다시금 내게 오지 않겠다고 말한 마거리트로 인해, 우리의 영혼의 연결이 끊겼던 순간이 떠올랐다. 영혼의 연결이 끊어지는 건… 아무렇게나 말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건 심장이 떨어져 나가는 기분이었다. 영혼이 텅 비어 버리고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공허한 기분이 든다. 온갖 부정적인 감정이 쏟아져 나와 빈자리를 채우고 제대로 사고할 수 없을 정도로 슬퍼진다.
그 일이 있고 난 직후의 난 어쩌면 반쯤 미쳤다고 봐도 될 것이다. 슬픔을 잊기 위해 눈앞에 보이는 모든 일에 열중했다. 그건 계속해서 나의 정신을 극한으로 내몰았고, 끝내… 세계수에게 내 몸을 맡기는 비극적인 결말을 만들어 내고 말았다.
심장이 아파 오는 듯한 기분이 들어 가슴께를 움켜쥐었다.
차라리 날 포기하고 갔으면 그쪽에서 사랑받고 잘 지내고 있든가!
내 드라이어드들이 그런 내 모습을 걱정이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는 게 느껴진다. 내가 파멸로 치닫는 일련의 과정들을 가장 가까이서 모두 지켜봐 왔던 그들이기에 얼마나 걱정스러울지는 잘 알았다.
“그럼 카수스를 없앨게. 그렇게 된다면 결국 넌 내게 돌아올 수밖에 없을 거야. 내가 정말 예전의 제이와 다르다는 걸 직접 네게 보여 준다면….”
카수스를 없애겠다는 내 말에 마침내 돌매화가 벽에서 등을 떼고 정면으로 우릴 바라봤다. 어떤 드라이어드라 하더라도 제 주인을 얕보는 걸 참을 수 있는 드라이어드는 없나 보다.
돌매화가 반응하자 다른 드라이어드들도 일제히 전투태세를 취했다.
“당장 해치워 버리자.”
실새삼이 적극적으로 나서니 정말로 일촉즉발의 순간이 도래했다.
다들 돌매화 하나만 상대하면 된다고 생각할 테지만 마거리트가 등장하며 상황이 많이 바뀌었음을 깨달아야 한다. 그녀는 내가 아는 가장 잠재력이 무궁무진한 지원형 드라이어드였다.
마거리트가 사용하는 예언형 버프는 성공 확률이 존재했지만, 그녀가 성장하며 반드시 두 번의 버프는 100% 확률로 성공하는 패시브 스킬을 얻게 되었다. 현재 마거리트의 주변을 떠다니는 두 송이의 꽃이 이걸 의미했다.
마거리트의 버프는 그녀의 의지로 제한 없이 사용 가능했기 때문에 쿨타임을 초기화시키는 기본적인 버프부터 공격력을 몇 배나 크게 상승시키는 특별한 버프까지 다양했다.
그런 그녀가 돌매화에게 제대로 버프를 꽂기만 한다면, 우리는 최악의 경우 두 그루의 돌매화를 한 번에 상대해야 할 수도 있었다.
나와 다닐 때는 엘더와 티격태격하며 질투도 많고 천방지축인 모습을 자주 보여 줬기 때문에 몇몇 드라이어드는 적진에 마거리트가 포함되어 있으면 얼마나 힘든지 그 위험성을 잘 모를 듯했다.
카드 게임을 다수 해 본 나로서는 저런 버프형 캐릭터를 상대 덱에서 만나는 게 정말로 끔찍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출전한 캐릭터의 한계치를 높여 버리니 상대하는 게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었다.
“실행. 내 주인은 멀쩡한 모습으로 데려오라는 명령은 하지 않았음. 또한 전부 데려오라는 말도 하지 않았으니 모두 죽이고 저 드루이드만 데려가겠음.”
돌매화가 무기를 꺼내 들었다. 자신의 몸집만 한 직사각형 방패와 위협적인 메이스를 꺼내 들었다. 이에 맞서 메스키트가 앞으로 나가며 자신의 방패와 랜스를 꺼내 쥐었다.
마거리트가 참담한 얼굴로 책을 펼치는 모습이 보였다. 한땐 같은 팀이었던 자들에게 공격해야 하는 순간이 온 것이다.
“스톤 필드의 드라이어드는 참전하지 말고 모두 돌아가도록.”
메스키트가 낮게 깔린 목소리로 명령하듯 소리쳤다.
필드의 가디언이 적으로 있는 이상 해당 자생 필드의 드라이어드는 사리는 게 맞았다. 전대 노멀 필드의 가디언이 자신의 영역에서 노멀 필드의 드라이어드를 제외하고 전부 쫓아내 버리는 엄청난 힘을 보인 적이 있었다.
그 외에도 각각의 가디언들이 자신들의 필드 드라이어드들에게 큰 영향력을 끼치는 모습을 많이 봐왔었다.
더구나 이곳은 이미 영역 선포로 스톤 필드가 깔렸기에 돌매화의 영향력 행세를 극도로 주의해야만 했다.
이는 꽤나 암울한 상황이었다. 우리 중에 스톤 필드 드라이어드가 꽤 있었기 때문이다.
내게는 당장 가막살나무가 있었고, 시들링은 주로 스톤 필드를 선포하는 만큼 주 전투원인 칼미아와 벨라돈나가 해당 필드의 꽃들이었다.
할 수 없이 분한 마음을 삼키며 해당하는 드라이어드들이 얌전히 아티팩트로 돌아가게 되었다. 드루이드가 있다면 가디언의 영향력이 야생의 꽃들보다 덜 끼치게 되지만 행여나 발생할 수 있는 불상사에 대비해야 했다.
“아직 낙담하긴 일러. 이쪽도 가디언이 있으니까.”
내게는 무려 네 곳의 가디언이 존재했다. 다만 바이오 필드와 스노우 필드는 특수성이 강해 우리 팀 중에 해당하는 꽃이 없어서 많은 보너스를 받긴 어려웠다.
하지만 메스키트가 존재함으로써 시들링의 난봉꾼 드라이어드인 카돈이 보너스를 받게 되었고, 무엇보다도 자생 필드 중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 노멀 필드의 가디언이 우리 곁에 있었다.
데이지가 메스키트의 곁에 서며 돌매화의 곁에 있는 마거리트를 빤히 바라봤다. 마거리트 역시 노멀 필드의 드라이어드였다.
데이지의 눈빛을 받은 그녀가 일순 어깨를 움츠리며 슬쩍 돌매화의 뒤로 숨는 게 보였다. 아직 데이지에겐 다른 가디언들만큼의 힘이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가디언은 가디언이라고. 본능적으로 이를 알아본 드라이어드에겐 어느 정도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모양이다.
“배신자들.”
돌매화가 반대편에 선 네 그루의 가디언을 향해 으르렁댔다.
“말은 바로 해야지. 그 시대를 살았던 건 실새삼밖에 없는걸.”
포인세티아가 그 분노를 태연히 맞받아치며 말했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실새삼을 제외한 세 그루의 가디언들은 이미 세대교체가 끝났다. 배신자라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을 대상들이 아니었다.
“진정한 주인이 누구인지 곧 알게 될 것.”
돌매화가 공격 자세를 취하자 마거리트가 재빨리 책을 펼쳤다.
그녀가 대체 무슨 돌매화에게 무슨 버프를 사용할까? 돌매화는 무슨 능력을 가지고 있지? 메스키트 만큼 방어가 단단한 드라이어드라면 어떤 식으로 파훼해야 하는 걸까?
막 서로가 서로를 향해 전의를 불태우던 그 순간.
“정말… 하나같이 주인 말을 제대로 듣는 꽃들이 없구나.”
고혹적인 목소리가 모든 긴장감을 일시에 깨트려 버렸다. 매혹적인 향기가 풍겨 오자 엘더가 황급히 내게 달려와 입과 코를 막았다.
“언제까지 주인을 기다리게 만들 거니?”
사락사락 비단이 끌리는 소리와 함께 새빨간 비단옷을 입은 드라이어드가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