걱정했던 대로 대부분의 지하 통로는 붕괴되어 이용이 불가했다. 드라이어드들의 힘으로 잔해를 치워 길을 뚫는다 하더라도 2차 붕괴가 일어날 확률이 너무 컸다.
만약 이렇게 좁은 공간으로 지상의 불이 쏟아져 내린다면 그건 그거대로 문제였다. 공간은 드라이어드의 힘을 상당수 제약한다.
“이쪽으로 가면 드디어 과수원으로 향하는 통로와 이어질 것 같은데.”
테라리움 지도와 비밀 통로 지하를 대조해 보며 확인한 결과 우리는 드디어 과수원 가까이에 도착했음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통로가 이어지는 지점이 지상에서 빛이 스며들 정도로 무너져 내려 있었다.
“어떡하지. 돌아가기엔 너무 먼데. 다른 좋은 통로를 찾을 거란 보장도 없고. 지도를 보니까 과수원 주변 통로는 거의 전멸했다고 봐도 될 것 같은데….”
드라이어드들과 회의를 나누는 사이 문득 우릴 따라왔던 참골무꽃이 포인세티아에게 기댄 채 바들바들 떠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새로운 곳에 가고 싶다는 일념 하나로 결국 우리와 동행하게 되었는데 전쟁터 한가운데를 거닐고 있으니 얼마나 무서울까. 불을 피해 이동하고 주변에서 지뢰가 터지는 걸 목격하고 지하 통로를 통과하는 일련의 과정 속에서 참골무꽃은 사색이 되어 입을 틀어막고 덜덜 떨었다.
그녀를 보며 모든 참골무꽃들이 다 저러할까 하는 궁금증도 생겼다. 전부 그렇다면… 도저히 모험을 함께 할 수 없지 않을까?
그녀 또한 드라이어드였지만 실전에 직접 참가하지 않았다. 겁이 너무 많아서 불과 마주했을 때 기절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제 역할을 다한 거나 다름없었다.
참골무꽃은 유독 포인세티아를 많이 의지했는데, 그녀가 기절하려고 할 때마다 포인세티아가 냉찜질을 해 줬던 점이 오히려 스스럼없게 다가와 줬다고 받아들인 모양이다.
하지만 포인세티아는 좋은 기동성으로 우리 팀의 정찰 담당인지라 자리를 비울 때가 많았고, 그렇게 되면 그녀는 울며 겨자 먹기로 내 곁으로 살금살금 다가왔다. 본능적으로 드루이드 곁이 가장 안전하다는 걸 깨달은 거다.
한편 참골무꽃이 가장 무서워하는 드라이어드는 의외로 엘더였다.
“강수를 두는 게 어때? 어차피 과수원까지 다 왔고.”
엘더가 메스키트를 스태프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가 말하는 강수란 메스키트의 능력을 이용해 새로운 통로를 뚫어 과수원으로 가는 통로와 잇자는 뜻이었다. 마침 벽을 뚫는 다면 경유하는 통로가 바로 근처라 애써 다른 길을 되돌아갈 필요가 없었지만 그로 인한 여파가 너무 컸다.
메스키트의 능력은 주로 지진이 동반되는데 효과는 굉장하더라도 이로 인해 통로의 천장인 지반이 무너지거나 큰 소음이 발생하여 적들에게 노출된다는 단점이 있었다.
“위험이 따르겠지만 곧바로 과수원 건물로 진입하면 될 거라고 생각해.”
이에 시들링과 다른 드라이어드들에게 의향을 물었고 우려를 표하는 의견이 어느 정도 나왔다. 그러나 다른 길을 찾는다 하더라도 지금 상황보다 더 나을 거란 보장이 없었기에 결국 엘더의 말대로 새 통로를 뚫자는 의견으로 좁혀졌다.
드라이어드의 능력으로 최대한 천장이 무너지지 않도록 지반 아래를 받들고, 통로가 뚫림과 동시에 과수원을 향해 달리기로 했다.
참골무꽃은 일련의 계획이 제시되는 동안 졸도할 것처럼 몸을 떨었다.
“이곳이 무덤이 되면… 어떡하나요?”
여러모로 보나 지원형에 기동성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모습에 그녀가 걱정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괜찮아. 내가 안고 뛰어 볼게. 제희는 너희가 잘 부탁해.”
포인세티아가 웃으며 말하자 참골무꽃은 배신감이 가득 담긴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결론이 나자 메스키트는 랜스를 고쳐 들었다. 위험성이 큰 행동이었기에 모두가 바짝 긴장하는 게 느껴졌다. 그녀가 랜스를 내지르자 사방이 진동했고, 우린 앞만 보며 뛰기 시작했다.
등 뒤로 갈수록 줄어드는 참골무꽃의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결국 기절한 모양이다.
요란한 행동은 확실히 불의 시선을 끌었지만 곧바로 잔해들이 쏟아져 내리며 시야를 차단하자 오히려 이게 습격을 막아 주는 방벽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린 101번째 테라리움의 과수원에 입성하게 되었다.
비밀 통로의 존재는 확실히 많이 알려지지 않았는지 지키고 있는 자가 없었다. 어쩌면 과수원 건물에 진입하자마자 바로 전투가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처음 우리의 등장을 알아차렸을 때 무지막지하게 바위를 던져 댔던 걸 떠올리면, 오히려 이렇게 조용한 게 더 수상쩍을 정도였다.
이미 수차례 위기를 겪었던 테라리움이기에 가장 중심이 되는 과수원 건물 내부 역시 멀쩡하지 않았다. 그래도 카수스가 머물고 있기 때문인지 추가 붕괴가 일어나지 않도록 조치가 취해졌다는 게 보였다.
기이한 건 내부 곳곳에 결코 장식으론 어울리지 않는 바위들이 마구잡이로 솟아올라 있다는 거였다. 난 곧바로 그것이 영역 선포로 불러낸 스톤 필드임을 알아봤다.
스톤 필드는 시들링이 영역 선포로 주로 불러내는 자생 필드였기에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영역 선포가 되어 있군.”
시들링 역시 이를 알아챘는지 주변을 살피는 표정이 진중했다.
“카수스에게 스톤 필드 가디언이 있을 거라 예상했었잖아. 이렇게 된 이상 확정이나 다름없네.”
솔직히 적이 아니라면 정말 대단하다고 칭찬해 주고 싶을 정도였다. 남들은 일생 동안 단 한 그루의 가디언도 만나기 힘들 정돈데 누군 부활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곧바로 스톤 필드 가디언을 찾아 영입한다.
모든 필드의 가디언들이 그렇듯 스톤 필드의 가디언 역시 정체가 베일에 싸여 있었다. 얼마나 엄청난 드라이어드가 우릴 기다리고 있을까?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우린 지하 통로에서 빠져나와 세계수 가지가 있을 지상층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우린 어떤 드라이어드와 마주하게 되었다. 그 드라이어드는 마치 우리가 올 걸 예상하고 기다렸다는 것처럼 등을 기대고 서 있었다.
보통의 드라이어드보다 작은 체구가 스노우 필드의 드라이어드들을 떠올리게 했지만, 그들과 달리 눈앞의 드라이어드는 아주 옹골찬 느낌이 들었다.
작은 몸에 메스키트 급의 아주 무거워 보이는 중갑옷을 두르고 있었는데 그로 인해 자칫 잘못 보면 드라이어드가 아닌 작은 바위쯤으로 여겨질 듯싶었다.
양 볼까지 오는 칼단발 머리는 흰색에 가까운 연분홍색이었고 양 볼엔 마치 물감을 바른 것처럼 새빨간 홍조가 자리하고 있었다.
매우 독특한 외형이 시선을 끌었으나 무엇보다도 그 드라이어드가 풍기는 엄청난 위압감은 아주 대단했다. 다른 가디언들을 만났을 때의 위압감과 같았다.
“설마 스톤 필드의 가디언?”
그래서 저 드라이어드의 정체에 대해 어느 정도 예상이 갔다.
“느림. 생각했던 것보다 무능함.”
중후하고 묵직한 남성의 목소리가 드라이어드에게서 흘러나왔다. 마치 목소리만으로도 상대를 내리누를 수 있을 것처럼 느껴졌다. 목소리만큼이나 말투도 특이했다.
“너였군.”
실새삼이 앞으로 나오며 그 드라이어드에게 아는 체를 했다. 하지만 드라이어드는 심드렁한 얼굴을 한 채 여전히 벽에 등을 기댄 상태였다. 무시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카수스에게 가장 먼저 가디언이 생긴다면 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다. 흐릿해지는 기억 속에서도 네놈의 대단한 충성심은 유독 남더군.”
“무시. 내 기억 속에 주인을 쉽게 배신하는 드라이어드는 없음.”
실새삼이 과거 카수스와 함께했을 때 그 곁에 있던 드라이어드였나 보다. 돌아오는 대답으로 보아 전 주인인 카수스와 함께하지 않고 내게 온 실새삼을 배신자로 여기고 있음이 보였다.
“저 녀석은 돌매화 드라이어드다. 카수스는 암매라고 부르지.”
“정지. 네 녀석에게서 내 이름을 듣고 싶지 않음.”
“돌매화? 스톤 필드의 가디언이 맞지? 우리에게 무지막지하게 바위를 던져 댔던 것도 저 드라이어드고.”
“그렇다. 방어형으론 벨벳 메스키트와 양대 산맥을 이루던 드라이어드다. 또한 벨벳 메스키트처럼 공격력도 강하니 주의해야 할 것이다.”
실새삼이 돌매화 드라이어드에 대한 정보를 알려 줬다. 돌매화는 스톤 필드의 가디언이 맞았고 유감스럽게도 메스키트와 동일 포지션에 있는 드라이어드였다.
그렇다는 건 적에게 메스키트가 있는 격이나 다름없으니 아주 난감했다.
“글쎄요. 정말 저와 수준이 같을까요?”
내 불안을 느낀 건지 메스키트가 여유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실새삼이 말을 걸 땐 무시로 일관하던 돌매화가 메스키트의 발언엔 반응을 보였다.
“흥미. 후대의 사막나무군. 하나 아둔. 넌 날 이길 수 없음.”
공교롭게도 돌매화에게서 실새삼에게서나 느낄 수 있었던 꼰대 기질이 은은하게 느껴졌다. 이로써 고대에 활동했던 가디언들은 자신들의 과거에 꽤나 자부심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물론 한 필드를 대표하는 가디언인 만큼 자신의 필드가 최고라는 자부심과 함께 은근한 기 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실새삼의 꼰대질과 돌매화의 꼰대질은 어떠한 차이가 느껴졌다.
“우릴 막으러 온 건가?”
돌매화가 여기에 있다는 건 어쩌면 우리의 과수원 진입을 방해하러 왔을 수도 있단 뜻이었다. 그렇잖아도 너무 평화롭게 건물 안으로 들어온 터라 도리어 의심스러웠다.
어쩌면 여기서 곧 돌매화와의 전투가 시작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리 필드의 가디언이더라도 고작 한 그루? 가디언이 막강한 건 알고 있지만 이쪽은 가디언이 무려 넷인데.
“기다림. 내 주인이 너희와 만나길 원함.”
돌매화의 대답은 의외였다. 카수스가 우릴 기다리고 있다고?
“어울려 주지 마라. 다른 속셈이 있을 거다.”
실새삼이 이를 경계하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말엔 나 역시 동의했기에 섣불리 대답하지 않았다.
“역시 무능함. 속셈이 있었다면 너흰 과수원 안에 들어올 수 없었음.”
여기까지 평화롭게 올 수 있었던 이유가 전부 카수스가 봐줬던 거라고 돌매화는 말한다. 그 말이 적잖게 자존심을 긁었지만 한편으론 이전처럼 바위를 내던져 통로를 무너뜨렸으면 진입이 힘들었을 것은 맞기에 인정은 됐다.
“이 기회에 혼자 있는 널 쓰러뜨리는 게 더 이득이겠군. 아직 다른 가디언은 합류하지 않았나 보지? 내 드루이드여, 지금이 최상의 상황임을 잊지 말거라.”
실새삼은 돌매화와의 전투를 원했다. 그 말처럼 다른 가디언이 합류하기 전인 지금의 최적의 시기인 건 맞았다.
“나의 옛 진리….”
그런데 돌매화 너머로 아주 익숙한 가냘픈 목소리가 들려왔다. 멀리 어둠 속에서 새하얀 꽃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