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47화 (547/604)

봉인석을 모으고 나니 기이하게도 모두 액세서리의 형태였다. 그것도 한 세트라고 칭할 수 있는 컬렉션이었다.

스페셜 등급의 목걸이, 귀걸이, 반지를 모두 모아 특별한 케이스에 넣으면 티아라를 얻을 수 있는데, 내가 알기로 성공한 이는 거의 없었다.

티아라의 존재는 26번째 테라리움에서 루비 반지를 얻을 때 알게 되었다. 그리고 한참 뒤, 낮은 거목에게 과거 카수스의 드라이어드가 착용했다는 루비 목걸이를 받으면서 루비 컬렉션으로서는 두 종류를 모으게 되었다. 하지만 아직 귀걸이의 행방은 묘연했다.

태양의 보석이 적잖이 생산되었던 과거와 달리 현재는 불에 의해 테라리움들이 위기를 겪으며 생산량이 줄어들거나 그 생산지가 아예 소멸되었다.

스페셜 등급의 보석은 가뜩이나 얻기 힘든데 생산도 애를 먹으니 현재에 와선 다이아를 뿌려 가며 찾아도 존재 자체를 알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래도 루비는 비교적 앞번대에 생산지가 적잖이 있어서 다른 보석들보단 사정이 나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등품 이상의 물건들은 해마다 돌아오는 수확제 이벤트나 테라리움 자체 이벤트처럼 특수한 상황에서만 겨우 얻을 수 있었다.

현재는 엘더에게 지혜의 루비 반지와 목걸이, 데이지에겐 불멸의 다이아몬드 반지 그리고 가막살나무에겐 스페셜 급은 아니지만 상급인 행복의 에메랄드 반지가 있었다.

그렇게 오래 모험을 했어도 결과는 겨우 이 정도였다. 그런데 한 테라리움에서 무려 아쿠아마린 장신구 한 세트를 전부 얻게 되다니.

“다 가지고 있기 겁날 정도인데….”

아쿠아마린의 상태는 잴 것도 없이 스페셜 급이었고 세공도 장인의 손길을 탄 것이 명백히 보였다. 이것들이 봉인석이란 특이점만 없으면 당장 드라이어드에게 주고 싶을 정도였다.

그런데 왜 하필 액세서리의 형태인 걸까? 꼭 착용을 목적으로 만든 듯하잖아?

“전부 파괴할 건가? 그렇다면 내게 팔아. 내게 책임지고 처리해 주지.”

애쉬가 능글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팔긴 뭘 팔아. 이걸 다이아 받고 팔기엔 내가 궁하지도 않고 팔 마음도 전혀 없어. 그리고 네가 처리한다고? 뭘 믿고.”

팔려 간다면 인페르노의 소중한 자금이 되겠지. 그 꼴은 절대 못 본다.

난 그가 다른 마음을 품을까 보석들을 전부 주머니에 넣었다.

“아아….”

“조금만 더 구경하고 싶다.”

“딱 한 번만이라도 착용해 볼 수 있다면….”

문구들을 다시 살피기 위해 꺼냈었는데, 세트의 등장과 동시에 모든 드라이어드들을 환혹시켜 버렸고 주머니에 넣자 여기저기서 안타까운 탄식이 터져 나왔다.

이 세트들이 장신구의 역할을 제대로 한다면 한 드라이어드가 몰아 착용하기만 해도 전투력이 몇 배나 증가할 것이다. 거의 등급이 한 단계 상승한 정도로 강해지는 건 아닐까?

그러니 재물 욕심이 덜한 드라이어드라도 어쩔 수 없이 탐내게 되는 거다.

물론 재물 욕심이 태어날 때부터 그득그득한 드라이어드들에게는 고문이나 다름없지만.

“좋아. 일단 순조롭게 모든 목적은 달성했어.”

난 바크 강화를 완료한 장비 파츠를 손끝으로 만지며 벅찬 감정을 다스렸다.

가슴의 보라색 보석엔 참골무꽃의 ‘은신’, 오른쪽 손등의 다홍색 보석엔 퉁퉁마디의 ‘정화’, 오른쪽 어깨의 하얀 보석엔 갯방풍의 ‘기다림’, 왼쪽 어깨의 연보라색 보석엔 정체를 알 수 없는 꽃의 ‘거짓’의 힘이 담겨 있었다.

이 중 은신을 제외한 나머지 힘들의 정확한 효능에 대해선 잘 몰랐지만 잔뜩 강화를 했다는 점에서 만족스러웠다.

그리고 이 힘들은 봉인석을 활성화하는 역할을 하는 듯했다. 그래서 따지고 보자면 내 존재 자체가 봉인석의 열쇠 혹은 일부가 된 거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봉인석을 모두 모아도 특별히 달라지는 건 없었다. 각 보석들은 막 찾았을 때 문구의 뜻을 알려 준 거 외에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한데 모아 놓아도 같았다. 뭔가 전부 모이면 무슨 일이 생길 거라 기대하고 걱정했던 것과 달리 김빠지는 결과이긴 했다.

처음엔 봉인석을 모두 찾으면 카수스가 영원히 찾을 수 없도록 숨겨 놓아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그 일부를 바크 강화에 담고 내 주머니에 넣어 뒀으니 내가 어떻게 되지 않는 한 이젠 안전한 거나 다름없었다.

네 개 모두를 내가 갖게 되며 카수스는 101번째 테라리움에서 가디언 열매를 얻지 못했다는 결론이 났다. 아마 지금쯤 그는 봉인되어 있는 세계수 때문에 전전긍긍하고 있겠지. 아직까지 과수원에 머물고 있는 걸 보면 더욱 확실했다.

그리고 이건 우리에게 희소식이나 다름없었다. 그의 전력이 걱정했던 것보단 약하다는 거니까.

그를 만나러 가기 위한 사전 준비가 모두 끝났다. 이제는 결전이었다.

“오늘 과수원까지 쳐들어갈 거야.”

드라이어드들이 만들어 준 지도와 네 개의 봉인석들. 이미 멸망하여 아무것도 없는 테라리움에서 즉석으로 정보를 찾아 이만큼이나 해냈다. 나와 모두의 모험 경력이 빛을 발한 거라 생각한다.

“일이 끝나기 전까지 마지막 휴식이 될 수 있으니 모두 충분히 쉬어 두자. 최대한 좋은 컨디션으로 임해야 해.”

다른 모험들에 비하면 이곳에서 보낸 시간은 짧은 편에 속했지만, 평소보다 몇 배는 많은 전투를 휴식 없이 겪었기에 다들 녹초나 다름없었다.

카수스와의 전투를 최고의 컨디션으로 치러도 걱정될 판에 지금처럼 드라이어드들이 작은 부상을 한두 개씩 달고 있는 상황에선 초조하고 불안한 감정이 드문드문 고개를 내밀 수밖에 없었다.

상대는 고대의 사람이지만 드루이드로선 엄청난 대선배였다. 가디언을 모두 모으고 세계의 정점에 섰던 자. 그가 겪은 모험들에 비하면 내가 지금까지 겪어 온 모험들은 새 발의 피 수준이겠지.

하지만 내겐 벌써 필드의 가디언이 4그루나 있었고 외에도 실력 좋은 드라이어드들이 더 있었다. 시들링은 말할 필요 없는 베테랑이었고 지금까진 애쉬가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했지만, 폭발적인 그의 능력이라면 엄청난 변수를 만들어 줄 것이 분명했다.

“애쉬에게 난쟁이만 있다면 딱인데….”

다만 끝까지 난쟁이들이 애쉬를 거부한 건 아쉬웠다. 기회가 생기면 틈틈이 휴대폰을 꺼내 무한 다이아 화면을 불러왔지만 난쟁이들은 그때마다 내 의도를 모른 척 곡괭이질을 하기 바빴다. 꼭 휴대폰을 앞에 두고 한 번만 컨택해 줍쇼 하고 제사를 지내는 격이었다.

시간이 흘러도 내가 애쉬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마음은 변치 않았기에 어쩔 수 없긴 했다.

우린 마지막 태초의 군락지에서 충분히 휴식을 취한 후 101번째 테라리움으로 향했다. 드디어 본 전투에 들어간다는 마음 때문인지, 시들링은 물론 애쉬에게서까지 비장함이 느껴졌다.

지도를 참고해 우리가 처음 테라리움으로 진입했던 길의 정반대 방향에서 진입하기로 결정했다.

이미 루트가 한 번 드러났다는 점에서 위험하기도 했고, 지도를 보니 과수원에서 가장 먼 방향일 뿐만 아니라 지뢰도 많아 상당히 비효율적이었기 때문이다.

진입 루트는 부대가 마지막까지 주둔했던 지역이 선정됐는데, 가장 최근까지 사람들이 활동했던 곳이라 지뢰가 적었을뿐더러 괜히 거점으로 삼은 건 아닐 만큼 자리가 좋았다. 그곳에서 지하 통로가 시작되는 약국 건물에 1차 진입 후 가능한 통로를 통해 과수원까지 접근할 계획이었다.

테라리움 근처까지 접근하자 하늘에 불안한 기운이 감돈다. 상대도 마치 우리가 올 때를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느껴졌다. 언제 어디서 돌들이 쏟아질지 알 수 없었다.

최대한 불과의 전투를 피하며 소란을 줄여야만 했다.

“데이지, 포인세티아, 잘 부탁해.”

“칼미아, 페리윙클, 다녀와라.”

“네! 다들 조심하세요.”

“내가 상단을 맡을게.”

“그럼 저희가 건물 내부를 살필게요.”

기동성이 좋은 드라이어드들이 선두로 나서 정찰을 맡았다. 불이 포진한 위치와 루트를 가로막는 장애물 등을 빠르게 알려 주며 돌파 시간을 단축하고 안전을 확보했다.

약국과 병원 건물은 주둔 부대가 마지막까지 사수하기 위해 노력한 것인지 다른 건물들에 비해 그나마 상태가 괜찮은 편이었는데,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내부가 무너져 내려 통로를 찾는 일이 막막할 정도였다.

외관만 그럴싸했던 것이다.

“저기 약도가 있어요!”

드라이어드들이 진입을 위해 무너져 내린 잔해를 대강 치우던 중 건물의 약도를 발견했다. 물론 지하 통로의 존재 자체는 비밀이기에 약도에 표시되어 있진 않으나 전체적인 건물의 넓이와 의심되는 구역 몇 개 정도는 짚어 낼 수 있었다.

“이대로 하늘에서 건물을 향해 바위가 떨어진다면 모두 깔려 죽을 텐데.”

애쉬가 깨진 창문 너머로 밖을 살피며 말했다. 농담조로 말하긴 해도 은은한 불안감이 깔려 있었다. 처음 적습이 시작되었을 때 가장 먼저 도주를 택했던 만큼, 드라이어드들의 호의적인 보호를 받을 수 없는 애쉬는 지금 상황에선 약자나 다름없었다.

공격력은 아주 강하지만 방어력은 쓰레기인 캐릭터들이 있지 않은가? 애쉬가 딱 그 꼴이었다.

물론 그런 캐릭터들도 간혹 강력한 한방을 위해 기용되긴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다 문득 어떠한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애쉬를… 사람이 아닌 드라이어드처럼 생각하고 대하는 건 어떨까? 그것도 호감도가 극히 낮은 내 드라이어드로 말이야.

인간관계에서 정서상 그를 드라이어드처럼 대하는 게 아니라 전력으로써의 애쉬를 한 그루의 드라이어드로 여겨 보는 건 어떤가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내 덱에 이제 막 들어온 제어가 어려운 드라이어드. 특징은 높은 공격력에 주특기는 광딜. 다만 한 번 기술을 사용하면 강한 공격만큼 반동이 크고 기술에 따른 쿨타임도 긴 편.

회복형 드라이어드와 상성이 좋지 않고 낮은 방어력 때문에 덱에 기용한다면 방어형 드라이어드의 출전은 필수….

애쉬를 상대로 그를 로드 캐릭터 격인 드루이드가 아니라 내 덱에 포함된 드라이어드라고 상상하니, 의외로 그를 포함한 전투 덱들이 수월하게 떠오른다.

또한 그가 드라이어드들처럼 신체 어딘가에 꽃을 달고 뛰어다니는 모습까지 상상하니 은근 재미도 있었다.

나도 모르게 그를 바라보며 비죽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창밖을 살피던 애쉬가 마침 등을 돌렸고 웃는 얼굴인 나와 딱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뭐야? 이제 와서 내게 반한 거면 곤란해.”

아무 말 없이 자신을 보고 웃고 있으니 기분 나쁘게 여길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그는 그냥 넘어갔다. 아니 은근히 기분이 좋은 듯한 느낌이 들어 오히려 의아해졌다.

“저쪽 공간이 비어 있다.”

줄기를 펼쳐 건물을 살피던 실새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약도를 토대로 특정 구역들을 살피다 마침내 지하 통로를 찾아낸 것이었다.

“건물 안에는 지뢰가 없어서 다행이네요.”

“길을 뚫을게요. 혹시 모를 2차 붕괴에 대비해 주세요.”

“제희, 이쪽, 내 방패 밑으로 와요.”

쪼르르 메스키트의 품으로 달려가자 애쉬의 시선이 싱겁게 사그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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