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45화 (545/604)

피로 회복제를 까서 마시려다 말았다. 어차피 참골무꽃이 깨어나길 기다리는 상황이니 내친김에 좀 더 휴식을 취하는 게 낫겠다 싶었기 때문이다. 고작 며칠이지만 강행군이 이어졌고 다들 제대로 잠도 못 잔 채 움직이고 있는 실정이니 온몸이 고될 것이다.

태양의 가호의 영향 때문인지 이곳은 비교적 불의 접근이 없는 편이었다. 휴식을 취한다면 최적의 장소였다.

“우리도 좀 쉬자. 쉴 수 있을 때 많이 쉬어 두는 게 좋겠어.”

애쉬는 내 말에 기다렸다는 듯이 바위에 털썩 걸터앉아 상체를 한껏 뒤로 젖혔다. 조금만 균형을 잃는다면 그대로 쓰러질 것처럼 위태해 보였다.

반면 시들링은 쉬라는 말에도 갑옷을 정비하며 부지런을 떨었다.

그렇게 무리한 일정을 진행해 왔는데도 그 누구도 힘들다는 말을 내뱉지 않았다. 이 상황에서 지쳐 가는 건 나뿐인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뭐라도 좀 먹을래? 아니면 물이라도.”

애쉬에게 물었지만 그대로 잠든 것처럼 아무 대답 없이 고요했다.

“그럼 먹고 싶을 때 말해.”

“…….”

아무 반응도 없는 그를 뒤로한 채 난 자리에 앉아 물 한 병을 다 비웠다. 사방이 지글지글 끓었고 그로 인해 땀도 수시로 흘러 지속적인 수분 보충이 필요했다.

“순찰을 나갔다 올까 하는데 순번은 어떻게 할까요?”

칼미아가 내 곁에 와서 물었다.

“너희도 좀 쉬는 게 어때? 지금까지 계속 전투를 해 왔잖아.”

“안전이 최고잖아요. 그리고 저희는 그렇게 지치지 않았어요. 힘드시다면 순찰은 저희들이 도맡을까요?”

“그럼 좀 부탁해.”

“맡겨만 주세요! 시들링, 우리끼리 순번을 짜 봤는데….”

드라이어드들은 드루이드의 몸 상태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 내 드라이어드들은 내 영향을 받아 피곤할 텐데 시들링은 아직도 체력이 남아도나 보다. 소위 말하는 강철 체력에 부러움이 밀려왔다.

난 대충 기댈 만한 적당한 크기의 바위를 찾아 등을 댔다. 체력을 한계까지 뽑아 쓴 바람에 온몸이 무거웠다. 이대로 땅에 머리만 댄다면 곧바로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만 버티고 좀 자는 게 어때?”

아니꼬운 눈초리로 날 보던 실새삼이 입을 열었다.

“네 체력으로 지금까지 버틴 것만으로도 잘한 거다. 그러다 탈이나 쓰러지면 더 문제니 지금이라도 좀 눈을 붙이지 그러느냐.”

그의 조곤조곤한 잔소리를 들으니 마치 자장가를 들은 것처럼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애써 버티며 주위를 살피는데 묘한 불안감이 사라지지 않는다.

내가 잠들어도 괜찮을까? 내 중재가 없는 동안 저 애쉬와 시들링이 싸우기라도 하면 어떡하지? 큰 전투가 벌어졌는데 내가 제때 일어나지 못한다면?

그때 내 두 눈 위로 차가운 손이 내려앉았다. 포인세티아였다.

“자, 시원하지? 더운 열기 때문에 몸이 불쾌해져서 잠에 못 드는 걸 수도 있어. 내가 곁에 있어줄게.”

“곁에 있을 거라면 네 시끄러운 입이라도 다물고 있는 게 어떻겠느냐?”

“여차하면 실새삼을 적진 한가운데로 집어 던질게. 저 자식은 늙은 만큼 질 좋은 장작이라 불이 환장하고 달려들 테니 시간을 아주 잘 벌어 줄 거야.”

“새파랗게 어린 것이 못하는 말이 없구나.”

“메스키트가 없었다면 가디언들은 죄다 너처럼 성격이 괴팍하다고 생각했을 거야.”

실새삼과 포인세티아가 아웅다웅 말싸움을 벌이는 걸 듣고 있자니 시끄럽다기보단 오히려 평화로웠다. 더욱더 잠기운이 몰려왔다.

“네가 잠든 사이에도 우리 드라이어드들이 널 지키며 알아서 잘하고 있을 테니까 걱정은 내려두고 한숨 자자.”

그 말이 무슨 주문이라도 된 것처럼 곧바로 눈이 감겼다. 버티던 것이 무색하게 바로 정신이 날아갔다.

열기에 숨이 턱턱 막혀 나도 모르게 잠에서 깨어났을 땐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을 때였다.

부지런을 떨던 시들링도 편한 자세를 취한 채 휴식을 취하고 있었고, 멀지 않은 거리에서 애쉬 역시 곤히 잠들어 있었다. 드루이드와 드라이어드를 싫어하면서도 가장 안전한 장소는 그 곁이라는 걸 잘 알고 있는지, 나와 거리가 제법 가까웠다.

눈꺼풀이 쉴 새 없이 떨리는 걸로 보아 작은 목소리로 그를 불러도 바로 일어날 수 있는 선잠에 빠진 것 같았다.

주변은 이제 막 밝아지고 있었다. 한밤중에 이곳에 도착했으니 이제 막 동이 트려고 하고 있다는 건데,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지나지 않은 듯했다.

“아, 깼구나. 더 잤으면 좋았을 텐데.”

“그대로 하루 내내 잘 줄 알았는데.”

내가 일어난 걸 안 드라이어드들이 하나둘 말을 걸었다.

그런데 드라이어드들 사이에 의외의 꽃이 껴 있었다. 내가 자는 사이 정신을 차렸는지, 여리여리한 보라 꽃이 포인세티아와 실새삼 사이에 껴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의외의 조합이란 것도 잠시, 참골무꽃이 두 드라이어드 사이에선 비교적 안정을 취하고 있다는 게 꽤나 놀라웠다.

“네가 자는 사이 수고를 덜어 주려고 이 꽃과 이야기를 나눠 봤어.”

“그래서 몇 번이나 기절했어?”

“음, 두 번. 그래도 그중 한 번은 미수에 그쳤어. 내 생애 이렇게 겁이 많은 꽃은 처음이야.”

참골무꽃은 넓은 소매를 들어 입을 가린 채 불안한 눈으로 날 바라봤다.

“어떤 이야기를 나눴어?”

“태초의 군락지에 대한 이야기랑… 네가 찾고 있는 봉인석이나 태양의 가호. 그리고 향후 미래에 대해서?”

“태초의 군락지의 마지막을 결정할 수 있는 꽃이라고도 말해 뒀다. 자신에게 중요한 의무가 있다는 걸 알게 된 후로 그 중압감에 못 이겨서 기절하려고 했지만.”

그 주제가 나오자 참골무꽃이 다시금 겁에 질리는 모습이 보였다.

내가 잠든 사이 깨어난 참골무꽃은 남은 드라이어드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어떤 의미론 좋은 관심이었다고 한다. 덕분에 내가 휴식할 수밖에 없는 시간을 준 격이니까.

처음엔 친화력이 좋은 포인세티아와 밝은 에너지를 풍기는 데이지가 붙어 참골무꽃을 살살 달랬다고 한다. 같은 드라이어드들이 잘 대해 주니 마음을 놓은 건지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았고, 그사이 드라이어드들이 돌아가며 그녀에게 이곳 상황에 대해 자세히 물었다.

안타깝지만 기절 전에 했던 이야기가 그녀가 아는 전부였다. 그 후 많은 이야기를 나눴고 마냥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도통 중요한 주제에 다가가지 않는 드라이어드들이 답답했는지 실새삼이 끼어들었고…. 마침내 참골무꽃은 자신의 탄생 비화에 대해 알게 되었다.

멸망한 태초의 군락지에서 유일하게 끝까지 피어난 꽃. 태초의 군락지의 마지막 희망.

“태어난 후부터 너무 암울한 상황만 보고 자라서 생각이 부정적인 듯해 좀 더 여러 이야기를 해 줬어.”

드라이어드들이 모험에서 겪은 이야기들, 테라리움에서 지낼 때의 일상 이야기들, 자생 필드에서 동족들 혹은 다른 꽃들과 함께 지낸 이야기 등등….

그 이야기를 들은 참골무꽃은 꿈과 희망을 품은 것이 분명하다.

“이 세계에… 저 말고 다른 참골무꽃이 있다는 거죠? 동족들이 보고 싶어요….”

그녀는 태초의 군락지를 떠나고 싶고 이를 도와 달라 내게 말했다. 당장 영혼의 연결을 맺어 줄 수 있는 드루이드가 없다 하더라도 따라가고 싶다고 했다.

“그럼 태초의 군락지는….”

참골무꽃은 이곳에서 다른 동족이 피어나는 걸 원치 않았다. 홀로 태어나 지내는 생활이 너무 외롭고 무서웠기 때문에 이 일을 후대가 또 겪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불쌍한 마음이 든 것이다.

드라이어드들에게 초목이 무성한 푸른 초원과 새파란 파도가 치는 바다, 그리고 새하얀 눈이 펼쳐진 고산 등, 다채로운 환경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난 후, 어쩌면 우리와 만나지 못했다면 세상은 전부 아무것도 없는 잿빛 황야로만 이루어져 있을 거라 여겼던 게 비참해졌다고 한다.

자신이 죽고 난 후에도 태초의 군락지는 다시금 생명을 틔우려 할 텐데 그 꽃도 태어나면서 죽을 때까지 누구를 만나지 못하면 이런 고난만 보며 살아야만 했다.

“그건… 의미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내가 태양의 가호를 가져가는 바람에 이 땅이 모든 힘을 잃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건 비극이 아닌, 드디어 오랜 잠을 청하는 거라고 말했다.

“훗날 세상의 불을 모두 무찌른다면….”

그때 잠에서 깨어나 다시 이 땅도 생명이 가득한 곳으로 변하지 않겠느냐며. 때를 노리며 계속해서 품은 씨앗들을 하나씩 땅 위로 올렸지만 그건 애꿎은 생명만 허비하는 거라며.

“저 혼자만이 아닌, 씨앗들을 숨겨 놓았다고 했으니 함께 가고 싶어요.”

그 말에 문득 가막살나무가 떠올랐다. 혼자가 아닌 지키고 있던 묘목을 함께 데리고 가고 싶다던 그의 말. 드라이어드들은 군락지는 물론 이에 포함된 생명들도 무척이나 소중하게 여겼다.

참골무꽃이 떠나고 싶다 마음먹었기에 나 또한 태양의 가호를 가져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곳에 있는 동안 정말 그 봉인석은 본 적이 없어요.”

“그럼 태초의 군락지에 봉인석을 숨겨 둔 게 아닌 건가….”

가장 큰 목적을 완수하진 못했으나 예상 밖의 수확은 있었다.

우린 땅이 숨겨 둔 씨앗을 찾기 위해 땅을 파기 시작했다. 소동에 애쉬가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잠에서 깨어났다.

“이젠 땅을 파는 거야? 정말 너희 족속들은 이해할 수가 없어.”

“도와줄 거 아니면 저기 가서 잠이나 더 자.”

참골무꽃은 남겨진 씨앗들을 데려가겠다는 일념 하나로 열심히 땅을 팠다.

하지만 씨앗이 있을 거란 건 확실치 않은 짐작이었고 태초의 군락지의 영역이 어디까지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꽤나 난이도 있는 작업이었다.

자칫 잘못하다간 이 일대의 땅을 다 엎어야 할지도 모르는 과정이었다. 하지만 이곳의 존폐를 결정할 수 있는 유일한 권리를 가진 참골무꽃의 소망이었다.

“저쪽을 파 봐.”

실새삼이 땅을 훑고 메스키트가 약한 지진을 이용해 딱딱한 땅을 무르게 만들었다. 적을 해치울 때나 쓰던 무기들이 푹푹 땅에 처박혔고 마침내 우린… 무언가를 찾아냈다.

다 말라 스러진 식물들이 둥지처럼 엮여 있고 그 안에 색이 바랬지만 한땐 아주 질이 좋았을 연보랏빛 천 위에 오돌토돌한 씨앗 몇 알이 함께 있었다.

“몇 개 없네….”

누군가 허망하단 목소리로 말했다.

어쩌면 참골무꽃이 그런 결단을 내리지 않았어도 이 땅은 머지않아 순환이 끊겼을 것이다. 후대로 내보낼 씨앗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을 테니까.

말라비틀어졌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인데 씨앗들에게선 넘치는 생명력이 느껴졌다. 은은하게 피어오르는 연보랏빛 기운.

“태양의 가호가 마지막 씨앗들에 맺혀 있었군.”

이를 보며 실새삼이 말했다.

인삼의 군락지에서 태양의 가호는 어떠한 석판에 모여 있었다.

난 조심히 빛을 품은 씨앗들을 꺼내 참골무꽃에게 전해 주었다. 그 순간 빛이 마치 내게 인사하듯 크게 반짝이는 걸 보았다.

참골무꽃은 두 손으로 씨앗들을 소중하게 품어 올렸다. 이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가가 촉촉했다.

“내가 태어나서 다행이었네…. 그렇지 않았다면….”

나머지 씨앗들도 전부 처참하게 생을 마감했으리라.

“어? 저기 뭔가 있는데?”

씨앗을 가져가기 위해 천을 드러내자 그 밑에 감춰진 무언가가 드러났다. 그건 맑고 투명한 물빛을 띠는 반짝이는 보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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