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기절한 참골무꽃은 아무리 봐도 금방 깨어날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걱정스럽게 지켜보던 데이지가 말했다.
“아마 겁은 나더라도 한편으론 안심한 게 아닐까요? 이렇게 무방비 상태인데 마치 잠들어 버린 것처럼 보여서요.”
긴장이 풀리면 갑자기 잠이 쏟아지듯 어쩌면 참골무꽃도 그간 홀로 견뎌 내야 했던 힘든 상황 속에서 우리를 보고 한편으론 안심했다는 게 데이지의 말뜻이었다.
“너무 불쌍해. 이렇게 풀 한 포기 없는 황량한 대지에서 어쩌다가 홀로 깨어나서….”
더 깨우려던 걸 멈추고 그녀가 편히 누울 수 있도록 자세를 고쳐 주었다.
“넌 왜 그렇게 사람이 못됐어? 아니, 네가 얼마나 악독한 인간인 걸 내가 잘 아는데 물어서 뭐 해. 차라리 하던 구경이나 마저 하든가. 네가 드루이드와 드라이어드를 얼마나 부정적으로 생각하는지 잘 알고 있지만 함께 다니고 있는 지금은 티를 안 내는 게 낫지 않아?”
내 말에 애쉬는 코웃음을 치며 무시했다. 그의 태도에 이가 갈렸지만 더 논쟁을 벌여 봤자 내 입만 아플 뿐이었다.
난 드라이어드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아무래도 과거 이곳에 참골무꽃의 군락지가 있었던 게 맞는 것 같지? 본인은 자각하지 못하는 듯하지만 아늑한 기운이나 동족의 기운이 아주 많이 느껴진다는 걸 보면 맞는 것 같아.”
그러나 여러 군락지를 다녀 봤지만 이처럼 아무런 흔적도 찾을 수 없을 만큼 막막한 곳은 처음이었다. 아마 홀로 태어난 참골무꽃마저 없었다면 도저히 믿기 어려웠을 것이다.
“어떤 거 같아? 혹시 다른 기운이 느껴져?”
우리와 달리 드라이어드들은 뭔가 다른 걸 느끼나 싶어 물었다. 특히나 기감이 예민한 메스키트라면 특별한 무언가를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었다.
“글쎄요. 아무래도 동족만이 느낄 수 있는 기운인 듯하네요. 도움이 못 되어 미안해요.”
메스키트가 난처하단 얼굴로 말했다. 아무것도 찾을 수 없다면 마냥 참골무꽃이 다시 깨어나길 기다려야 한다는 건데 그건 너무 시간이 많이 허비되었다.
“이래서 어린 것들이란.”
이 모든 상황이 일어날 동안 쭉 지켜보며 관망하고 있던 실새삼이 혀를 찼다.
“아마 과거 태초의 군락지가 있던 곳이 맞을 것이다. 단순히 역사가 짧은 군락지는 소멸된 지 오래되었음에도 기운이 잔존할 정도는 되지 못하지.”
“정말 태초의 군락지가 있었을 거라고?”
꼰대력이 슬슬 발동하는지 목소리엔 권위가 가득했다.
“내가 태초의 군락지에서 자연 발생했기에 잘 알지. 태초의 군락지는 그곳에서 수만 송이가 오랜 시간 동안 같은 태양 빛 아래 꽃잎을 틔워 낸 곳. 그 덕에 태양의 가호가 맺힌 만큼 아주 강한 힘을 품은 땅이다. 변화에 속수무책으로 모습을 잃더라도 땅이 가진 염원과 같은 기운은 쉽게 사라지지 않아.”
실새삼이 오랜 세월을 살아온 드라이어드라는 건 알았지만 무려 태초의 군락지 출생일 줄은 몰랐다. 물론 그렇다고 그 태초의 군락지가 형성될 때부터 지금까지 살아왔다는 뜻은 아닐 거다. 시들링의 말론 카돈 드라이어드의 태초의 군락지를 다녀왔다고 했으니 그저 태어나는 곳이 특별하다는 뜻일 뿐이겠지.
“이곳이 그저 평범한 군락지였다면 저 꽃이 이미 멸망한 땅에서 기운을 느낄 일도, 외따로 피어날 일도 없었겠지. 태초의 군락지의 또 다른 힘이자 성질인 순환의 연속성을 유지하려는 성질에 대해서 빼먹을 순 없어. 어떠한 종의 시작의 땅이란 의미를 가진 거나 다름없으므로 끝을 맺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애를 쓴다.”
내가 방문한 태초의 군락지는 인삼 드라이어드의 군락지가 전부였지만 그곳에서도 자연의 순환을 계속해서 강조했었다.
“아마 땅속 깊은 곳에 씨앗들을 휴면 상태로 보듬어 놨다가 기회를 봐서 하나씩 땅 위로 올려 피웠을 것이다. 자연스럽게 피어날 환경이 되지 않으니 땅이 가진 힘만으로 강제적으로 발아시킨 거지. 하지만 그 힘이 할 수 있는 일은 그뿐인 것이다. 저 꽃이 저만큼 성장한 게 천운이라고 봐야 해. 대부분 잎사귀도 제대로 내어 보지 못하고 죽었을 테고, 어쩌다 드라이어드가 됐더라도 묘목을 벗어나지 못하고 전부 죽었을 거다.”
난 죽은 것처럼 눈을 감고 있는 참골무꽃을 바라봤다.
“모습과 달리 자신이 개화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했지. 성장한 기억이 없는 것처럼 말이야….”
자신의 존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였던 참골무꽃.
“그럼 땅은 씨앗을 휴면 상태로 품었던 것처럼 드라이어드도 자랄 때까지 계속 가사 상태로 품고 있었던 게 아닐까? 네 말처럼 기껏 키운 꽃들이 제대로 자라지도 못한 채 자꾸 죽어만 가니, 특단의 조치를 취한 걸지도 몰라. 드라이어드가 적당히 성장해 스스로 몸을 지키고 멀리 탐험할 수 있는 상태가 되자 그때 깨운 거라면 참골무꽃에게 성장 기억이 없는 것도 설명이 돼.”
태초의 군락지에는 상상을 넘어선 힘들이 잠재되어 있었다. 드라이어드들이 부리는 능력도 대단한데 태초의 군락지는 그 능력들의 온상지나 다름없으니까.
내 말에 실새삼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날 보는 눈이 기특함을 담고 있어 조금 어이가 없었다.
“그래, 어쩌면 이 땅은 꽃의 새로운 왕이 탄생해 후대에 태어날 꽃들을 지켜 주길 바랐던 걸지도 모르지. 제대로 된 왕만 탄생한다면 다시금 군락지를 조성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것도 적당한 환경이 뒤받쳐 줘야 가능하지. 이곳은 도저히 회생이 불가능한 땅이다.”
안타깝지만 실새삼의 평가가 맞았다. 주변에 멀쩡한 테라리움이 하나 없는 이곳은 더 이상 세계수 가지의 축복이 찾아오기 어려웠고, 아무리 용을 쓴다 한들 과거의 모습을 되찾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한때는 엄청난 영광을 누렸을 위대한 성지였을 터이나 지금은 그저 불모지일 뿐이었다. 그러니 어쩌면 땅이 계속해서 싹을 틔워 내는 행동은 어쩌면 무의미한 행동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이곳의 태양의 가호가 빚어낸 힘은 뭘까?”
참골무꽃이 말하길 땅의 기운에 몸을 숨기면 불이 발견하지 못하고 지나갔다고 했다. 이곳에 몸을 완전히 가릴 수 있는 엄폐물이 많은 것도 아니고, 멀쩡히 있는 드라이어드를 아귀 같은 불이 가만 놔둘 리가 없었다.
어쩌면 그 기운은 태양의 가호를 뜻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인삼 군락지에서 얻은 태양의 가호인 ‘시간 정지’의 힘은 인삼 꽃말인 ‘인내’와 관련이 있었다. ‘인내의 시간’, 마치 힘이 나 대신 그 순간의 시간을 견뎌내다 그 이후에 일제히 정지로 인한 반동이 오는 방식이었다.
“참골무꽃의 꽃말은 ‘나를 건드리지 마세요’…. 그렇다면 태양의 가호는 회피나 방어와 관련된 힘인 걸까?”
“이곳의 태양의 가호가 욕심나느냐?”
실새삼이 툭 질문을 던졌다.
“뭐… 주된 목적은 봉인석을 찾기 위해서지만 태초의 군락지라고 하니 바크 강화 욕심이 날 수밖에 없잖아.”
강화를 담을 슬롯은 한정되어 있으니 이왕이면 고르고 골라 내 모험에 유용할 능력을 선택하는 것이 낫지만, 애초에 태초의 군락지를 찾는 것은 엄청난 운이 따라 줘야 했다.
여태 모험하면서 발견한 태초의 군락지가 이제 겨우 두 곳이었다.
물론 드루이드 사이에서 어느 정도 많이 알려진 태초의 군락지가 있는 모양이고 정석처럼 방문하는 사람들도 있는 모양이지만, 일이 너무 바빠 미처 찾아갈 틈이 없었다. 더구나 시들링이 원한다면 카돈의 군락지에도 데려가 주겠다고 했지만…. 잠깐 갔다 오기엔 너무 멀었지.
“이 험난한 곳에서 참골무꽃을 지금까지 지켜 온 힘이라면 꽤 대단하겠지. 더구나 봉인석을 만들 때 태양의 보석은 물론 태양의 가호의 힘을 빌렸다고 했으니… 세계수의 가지를 봉인하는 데 사용하는 힘이라면 혹할 법도 하잖아.”
“네가 그렇게 태양의 가호에 대해 욕심내니까 괜히 시샘이 나는걸.”
듣고 있던 포인세티아가 툭 끼어들었다.
“난 거의 본래 필드에서 퇴출당한 거나 다름없는 꽃이라 태초의 군락지에 대해서 아는 건 없지만… 네가 우리 포인세티아의 군락지에 방문해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싶기도 해.”
그 모습에 실새삼이 혀를 끌끌 찼다.
“저딴 지조 없는 꽃의 군락지보다 차라리 내 군락지가 낫지. 원한다면 말하거라. 실새삼의 태초의 군락지에 기꺼이 널 초대하마.”
“그건 좀 궁금하다. 무려 너 같은… 아니 너처럼 여러모로 엄청난 꽃이 태어난 곳이니 대체 어떤 곳일지 궁금해. 내가 살던 곳에선 사람이 잘못되면 터를 탓하기도 하거든. 막 수맥이 흘러서….”
내 말을 듣고 있던 그의 눈빛이 꽤나 살벌해져서 말을 멈췄다. 대체 터가 어쨌길래 저런 막장 꽃이 태어났냔 말이다. 한편으론 가디언을 배출한 터이니 명당이라고 할 수도 있겠고….
“어쨌든 태양의 가호가 욕심난다면 네가 품는 것도 상관없다만…. 그로 인한 결과에 대해선 잘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그로 인한 결과?”
“이곳엔 더 이상 태양의 가호를 유지할 수 있도록 돕는 꽃은 없다. 태초의 군락지이기 때문에 그 힘이 쉽게 사라지지 않는 것은 맞으나 지금 상태론 계속해서 힘의 빛이 바래고 있다고 봐야 하지. 계속해서 생명이 태어나고 명맥을 이어 가는 군락지에선 힘이 더 강해질지언정 약해지지 않는다. 그런 곳은 수많은 드루이드들이 가호의 힘을 받아 가도 변함이 없어.”
실새삼이 불쌍하다는 눈빛으로 누워 있는 참골무꽃을 바라봤다.
“하지만 이런 곳이라면… 드루이드가 태양의 가호를 받아 간다면 더 약해질 것이다. 아예 사라질 수도 있지.”
그의 말에 인삼 군락지의 경우를 떠올렸다. 내가 태양의 가호를 가져가자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인삼 드라이어드는 이 행위를 저주를 푸는 거라 말했지만 달리 말하자면 그곳에 유지되는 힘을 내가 모조리 흡수해 버린 격이라 더 이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거나 다름없었다.
인삼 군락지에서 살아가는 생명들은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다. 그러니 실새삼의 말처럼 빛이 바래져 가는 곳의 마지막 빛을 내가 가져가 버린 거나 다름없는 거다.
“내가 이곳의 태양의 가호를 가져간다면… 최악의 경우 이 땅의 모든 기운이 사라질 수도 있다는 거네? 그럼 다신 참골무꽃이 태어나지 않을 거고….”
“그래. 잊힌 역사만 남은 땅이 되는 거지. 이게 바로 그로 인한 결과다.”
땅은 순환의 연속성을 유지하기 위해 불모지에 싹을 틔우는 무의미한 행동을 반복해 왔다. 무의미하더라도 그 자체만으로 이곳의 자연의 순리였다. 그걸 내가 건드려도 되는 걸까?
“난 네게 힘이 늘어나는 걸 반기는 입장이다만. 그것이 내 드루이드가 더욱 안전해지는 길이니까. 어차피 이곳은 더 이상 태양의 가호가 존재해 봤자 무의미한 곳이니 네가 거두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일 테지. 하지만 넌 너로 인한 결과를 신경 쓰는 자이니 말해 두는 거다.”
내 드라이어드다운 발언이었다.
“결정이 고민된다면 저 꽃에게 의사를 물어보는 건 어떻겠느냐? 보이는 건 비실비실하다만 지금으로선 이 땅의, 이 존재하지 않는 군락지의 유일한 왕이나 다름없으니 제 땅의 미래를 결정하는 것도 스스로 해야겠지. 땅으로써는 마지막 왕이 소멸을 결정한다면 제 역할을 다하고 받아들이는 게 당연하다.”
땅이 연속되는 미래를 기원하며 실패를 거듭하다 마침내 간신히 키운 참골무꽃. 어쩌면 이 참골무꽃 다음으로 이만큼 성장할 수 있는 후대를 피워 낼 수 있을지 미지수였다.
그렇다면 저 꽃은 땅의 마지막 변화의 열쇠가 아닐까 싶었다.
걸핏하면 기절해 버리는 꽃이 그걸 결정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