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43화 (543/604)

이번엔 척이 아니라 정말이었다. ‘꺽!’ 하는 숨넘어가는 소리가 들리더니 그대로 쓰러져 버린 것이다.

그저 아티팩트에서 나왔을 뿐인데 상대를 해치워 버린 바곳은 사색이 되었다. 바곳은 벨라돈나와 같은 드라이어드들과 달리, 독을 지니고 있어도 필드에 존재하는 것 자체만으로 해를 입히는 드라이어드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우리가 어떤 영향을 끼쳤다기보단… 정말로 너무 무서워서 기절했다는 뜻이었다.

“세상에!”

깜짝 놀라 내게 있는 모든 회복형 드라이어드를 참골무꽃에게 붙였다.

영혼의 연결이 되어 있지 않아 완벽한 효과를 받기 어려웠지만 다들 능력이 좋아서 집중 치료실에 안배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건 또 뭐야? 넌 왜 자꾸 이상한 드라이어드를 줍는 거야?”

엘더가 툴툴대며 참골무꽃에게 착실히 회복의 빛을 불어넣었다.

“주운 거 아니야. 그저 바곳을 보자마자 쓰러져서….”

움찔, 바곳의 어깨가 튀었다. 자신 탓이라 자책하면 어떡하나 했는데 의외로 보랏빛 눈에 약간의 뿌듯함이 보인다.

아주 강한 드라이어드, 그러니까 메스키트와 같은 드라이어드는 등장과 동시에 위압감만으로 상대를 주눅 들게 만드는 게 있었다. 어쩌면 바곳은 그런 모습을 동경했던 걸까?

하지만 상대는 부는 바람에도 바들바들 떠는 여린 풀꽃이었다.

“겉은 이상 없어. 그냥 기절한 거야. 강제로 깨워 줄까?”

묵묵히 치료를 하던 엘더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는 시큰둥한 얼굴로 주먹을 쥐었다 피며 어떻게 강제로 깨울 것인지 피력하는 듯했다.

“그만둬. 이렇게 여린 꽃은 또 처음이라 네가 휘두르는 말에도 마음에 큰 병을 얻을까 걱정돼.”

“생긴 건 멀쩡해 보이는데…. 아니, 잠깐.”

엘더가 허리만 숙여 참골무꽃의 멱살을 덜렁 집어 올리더니 이리저리 살폈다. 그 모습에 식겁한 내가 말리자 내려놓는 손길만큼은 부드럽게 바뀌었다.

“멀쩡하진 않네. 탈진 상태 같아.”

“못 먹고 자랐나 봐요. 아니면 햇빛을 받지 못해 웃자란 건가?”

“비실비실.”

옆에서 민들레 아이들이 엘더의 말에 동조했다.

“하긴. 이런 곳에서 홀로 지내는 드라이어드의 상태가 멀쩡할 리 없지. 어쩌면 심약한 성정은 약해진 몸에서 나오는 걸 수도 있어. 하지만 어떡한다…. 당장 건강해지는 방법은 영혼의 연결을 맺는 거지만….”

내겐 COST를 비워 둬야 하는 목적이 있었다. 가디언인 포인세티아를 새로 영입하며 내 영혼이 가득 찬 가방처럼 벅차다는 걸 느꼈다.

그 후로 시간이 많이 지나고 그에 따라 성장하긴 했지만, 이후 새로 데려올 드라이어드가 또 가디언이라면 자리가 부족하지 않을지 걱정해야 되는 입장이었다.

그렇다고 다른 드루이드인 시들링에게 부탁하기도 애매했다. 시들링 팀은 그가 아이였을 때부터 함께한 오리지널 팀이라 다른 드라이어드를 영입하는 게 상상이 가지 않았다.

더구나 시들링 팀에겐 지금 팀을 보완해 줄 수 있는 회복형 드라이어드가 급선무였기에 지원형인 참골무꽃은 여러모로 밀리긴 했다.

“혹시 이거면 되려나?”

난 주머니에서 여분의 양분 열매를 꺼냈다. 수확제를 거치며 행정 관리원의 특권으로 양분 열매를 두둑이 챙겨두긴 했다.

하지만 내 드라이어드들이 모험을 통해 정상적으로 성장하고 있기에 굳이 양분 열매를 써 가며 레벨 업을 시킬 필요는 없었다. 처음엔 곧잘 챙겨 먹던 데이지도 어느 순간부턴 멀리하는 걸 보면, 양분 열매로 올릴 수 있는 성장의 한계에 다다른 것이 분명하다.

즉, 내 드라이어드들은 지금으로선 양분 열매보다 포레스트 확장을 통한 성장이 더 우선시된다는 말이었다.

“뭘 좀 먹이려면 이런 것밖에 없는데.”

참골무꽃이 현재 시들시들한 상태라고 했던가.

영혼의 연결이 끊긴 상태가 오래 지속되어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퇴화했던 데이지를 떠올렸다. 드라이어드가 인간처럼 무언가를 먹고 마실 필요가 없음은 뒤늦게 알았지만, 그때의 데이지는 마치 잔뜩 굶주린 사람처럼 눈앞의 모든 음식을 해치우는 엄청난 식성을 보였다.

그렇게 해 봤자 그녀의 퇴화를 막을 수도, 잃어 가는 힘을 되찾을 수도, 그녀 내면에 자리한 부족함을 채울 수도 없었지만 먹는 행위가 어느 정도 위안을 주고 약소한 영양은 공급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드라이어드들이 챙겨 먹는 양분 열매는 보통의 인간 음식과 다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름 자체에도 양분이란 뜻이 들어가는 데다 세계수에서 나온 산물이니 탈진 상태의 드라이어드에게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그 아까운 걸 처음 만나는 드라이어드에게 주겠다고? 차라리 날 줘.”

“너도 요즘 양분 열매는 거들떠도 안 보잖아. 어차피 필요도 없는 거 과욕은 나빠.”

“그렇다고 그걸 막 줘?”

“당장 이곳이 드라이어드가 회복하기에 좋은 환경이 아니니까…. 그렇다면 급한 대로 양분 열매로 응급 처치는 해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잖아. 그게 다이아 얼마짜리인데 길바닥에 대충 핀 꽃 따위에게 주겠다는 거야? 땅에 버리는 거잖아! 100다이아를 그냥 땅에 묻는 거잖아.”

나는 짜게 식은 눈으로 엘더를 바라봤다.

내 드라이어드들이 내게 무한에 가까운 다이아가 있다는 걸 모르진 않는다. 또한 엘더를 단 한 번도 남들보다 부족하게 키운 적이 없었다.

경쟁도 심해서 다른 드라이어드에게 다이아 100만큼의 무언가를 해 주면 엘더에겐 그 10배에 달하는 1000만큼의 무언가를 해 줘 가며 달랬다.

그러니 이쯤 되면 엘더도 이제 날 닮아 고작 몇백 다이아는 좀 우습게 땅에 버릴 줄 알고 그런 성정을 가져야 하는데, 모든 반짝이는 것은 자기 것이고 세상의 보석은 전부 자신을 위해 태어났고 다이아는 오직 자신만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는 신념이 있었다.

탐욕이다, 탐욕. 자신이 1000만큼을 가지고 있어도 남의 1까지 욕심내는 탐욕덩어리.

“네가 하는 말 남이 들으면 날 욕할 거야. 드라이어드를 어떻게 키웠으면 저렇게 욕심이 그득그득하냐고.”

“다른 사람도 네가 하려는 걸 보면 나와 같은 소리를 할 거야.”

별것도 아닌 일로 아웅다웅하다가 문득 풉 하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래, 우리 사이는 이게 정상이지. 그 일이 있고 난 이후로 엘더나 나나 서로를 평소처럼 대하곤 있지만, 내 마음 한편엔 곧 깨질 듯한 유리와 같은 불안감과 어색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평소처럼 대하겠다고 하면서도 자꾸 의식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렇게 모험 첫날이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이 같은 주제로 아웅다웅하는 모습에 안도와 동시에 웃음이 새어 나오고 말았다.

“왜 웃는 거야?”

“그냥 네가 이뻐서.”

다만 모험 첫날과 지금이 다른 점이 있다면…. 이제 엘더는 내 칭찬에 얼굴을 붉힌다. 뻔뻔하게 맞다고 자신이 잘났다고 받아치던 모습이, 이젠 수줍음으로 바뀌어 버려서 다시금 마음 한편에 금이 간다. 네가 그렇게 반응하면 안 돼. 우린 이 정도면 돼. 딱 이 정도만.

엘더의 빨개진 귀에 자꾸만 시선이 가려는 걸 참았다.

“어쨌든… 이 꽃이 일어나야 정보를 얻을 수 있으니 할 수 있는 건 해 봐야지.”

곱게 누워 있는 참골무꽃의 입에 양분 열매를 조심히 밀어 넣었다. 처음엔 아무 반응이 없더니 이윽고 견과류를 갉아먹는 햄스터처럼 오물오물 열심히 씹어 먹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어지간히 굶주리고 힘들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병을 꺼내 조심히 상체를 받쳐 일으키고 물도 먹여 주었다. 지금 자신이 어떤 상황인지도 모른 채 그저 오랫동안 갈망했던 시원한 물이 쏟아지니 쉴 새 없이 목울대가 꿀렁꿀렁 움직인다.

그 모습에 더욱더 짠하게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이런 광경이 애쉬에겐 도무지 못마땅한 데다 이해되지 않고 지루하기만 한 건지, 우리와 멀찍이 거리를 둔 채 불이 바글거리는 황야를 바라봤다.

“후아….”

한참을 정성스레 보살폈을까. 마침내 감겨 있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며 열렸다. 바곳과 닮았으나 좀 더 푸른빛을 띠는 보라색 눈동자가 나와 마주했다. 그러자….

“어어… 안 돼. 다시 기절하지 마! 정말 해치려는 게 아니야.”

불안에 가득 찬 눈이 자신의 주변을 둘러싼 채 지켜보는 드라이어드 하나하나를 빠르게 스캔했다. 그러더니 또 졸도하려고 하길래 필사적으로 어깨를 붙들고 흔들었다.

“아이참, 우리 필드의 꽃들도 만만찮게 별난데 얘는 더 별나네? 비켜 봐. 내가 해 볼게.”

슬쩍 나와 상황을 구경하고 있던 포인세티아가 불쑥 끼어들었다. 그녀는 자신의 양손을 꼭 잡고 힘을 불어넣더니 그대로 양손을 참골무꽃의 볼에 찰싹 때리듯 얹었다. 곁에서 은은한 냉기가 느껴졌다.

“꺄악!”

덜덜 떨며 간신히 목소리를 내던 꽃에게 예상치 못했던 높은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정신 바짝 들지? 차갑지? 열기에 약한 꽃이라면 먹는 것만으로 해결되지 않을 수 있어. 그럴 땐 이렇게 온도를 좀 낮춰주면 살 만할걸?”

포인세티아의 기습으로 양 볼이 새빨개진 참골무꽃이 두 눈을 크게 뜬 채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확실히 포인세티아 덕에 다시금 참골무꽃의 의식이 저편으로 날아가는 불상사는 막을 수 있었다.

“가장 좋은 건 네가 영역 선포로 이곳에 오션 필드를 불러와 깔아 주는 거지만, 오션 필드가 없으니 어쩔 수 없지.”

“그런 방법도 있겠구나.”

꽃들은 자생 필드 위에서 생기 가득하게 움직일 수 있기 때문에 포인세티아의 말처럼 영역 선포가 긴급할 땐 좋은 방편이 될 수 있을 거란 걸 깨달았다.

“자자, 지금 좀 정신이 없는 상태로 보이는데. 그래도 덕분에 기절하는 걸 까먹은 거 같으니 뭔갈 물어보려면 빨리 해치워 버리는 게 어때?”

“아, 그래. 넌 어쩌다 이곳에 혼자 남게 된 거야? 혹시 이곳이 참골무꽃의 군락지였어? 그렇다면 봉인석에 대해 들어본 적 있어?”

포인세티아의 말에 타이밍을 놓칠까 봐 급한 대로 물어보고픈 질문을 와다다 쏟아 냈다. 그러자 참골무꽃이 어버버하며 입을 열었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개화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어요. 그저 눈을 뜨니 저 혼자 여기에 있었고…. 주변에 아무도 없었고…. 아늑한 기운 속에서 몸을 숨기면 불이 절 발견하지 못하고 피해 가길래 그렇게 계속 지내왔어요.”

자연 발생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꽃이란 건가? 하지만 드라이어드는 아무리 봐도 묘목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정말 얼마 되지 않았다면 적어도 지금 민들레 아이들만큼의 성장 수준을 보여야 할 텐데.

“태초의 군락지… 라는 건 모르겠어요. 그저 이곳에 동족의 기운이 아주 많이 느껴져서 과거엔 동족들이 아주 많았겠다고 생각한 적은 있어요…. 그리고… 그리고….”

아직 상황 파악을 제대로 못 한 참골무꽃은 내가 묻는 말에 기계처럼 아는 걸 토해 냈다. 하지만 말끝이 잘게 떨리는 걸 보면 금방 겁쟁이 모드로 돌아가 버릴 것 같았다. 그래서 최대한 빨리 꽃이 아는 모든 지식을 뽑아내려고 했는데….

“뭐야? 깼어? 무슨 드라이어드가 그렇게 매가리가 없어. 세계수는 저런 것들도 세계를 지키라고 내보내는 건가? 불에 장작이나 되지 않으면 도움은 되겠네.”

불구경이 지겨워진 애쉬가 껄렁대며 돌아와 인성 내다 버린 발언을 내뱉었다. 그건 참골무꽃의 겁쟁이 스위치를 제대로 눌러 버렸고….

“안 돼! 기절하지 마!”

“아앗, 내가 다시 해 볼게!”

포인세티아가 다시 얼음찜질을 해 보려 했지만 이미 참골무꽃은 정신을 잃고 말았다.

애쉬는 정말 도움이 안 되는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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