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처에 태초의 군락지가 있었던 걸까….”
중얼거리는 말에 시들링이 반응했다.
“가능성은 있다. 과거에 해안 테라리움이었다면 지형적 특성상 오션 필드 드라이어드들의 탄생지였을 테니.”
“그렇다면 불에 의해 수많은 태초의 군락지들이 사라진 셈이네.”
신비로운 신화의 근원지들이 자취를 감춘다는 건 그만큼 만나볼 수 있었던 위대한 힘들 역시 세상에서 사라진 거나 다름없다는 뜻이었다. 어쩐지 우울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뭘 어쩌면 되는 건데?”
애쉬가 지루한 얼굴로 물었다. 그에게 드라이어드에 관한 이야기는 전혀 흥미를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난 태초의 군락지에 대해 처음 알게 됐을 때 심장이 터질 것처럼 두근거렸었는데.
“이 기록에 의하면 이곳의 세계수 가지는 현재 아주 특수한 상태야. 봉인이라고 표현되어 있는데 이게 정확히 뭘 의미하는지 모르겠어.”
“여기 기록에 아주 오래전부터 가지가 맺는 열매의 수가 점차 줄어 비교적 최근엔 열매를 거의 맺지 않았다고 나와 있다. 그와 관련된 것이 아닌가?”
시들링이 칼미아가 가져온 정보를 제시하며 말했다.
“가지가 열매를 맺지 못하는 원인은 다양해서 여기서 말하는 봉인이 직접적인 원인인지 알 수 없지만… 가능성은 아주 크다고 봐.”
“그거 꼭 동결 같은 거네. 교단에선 세계수 가지를 대상으로 여러 실험을 했는데 그중엔 꽁꽁 얼려 버리는 실험도 있었지.”
애쉬가 전혀 웃기지 않는 소리를 웃으며 말했다.
“실험…. 그래, 16번째 테라리움의 연금탑을 생각하면 그리 유별난 것도 아니겠지.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어떻게 되긴. 동결시킨 부분은 동사했지.”
문득 끊임없이 태워져 연료처럼 쓰이던 16번째 가지가 떠올라 씁쓸했다. 가지는 고통에 겨워 내게 도와 달라고, 차라리 죽여 달라고 소리쳤었다.
“계속 실험을 진행했다면 다른 결과를 얻었을지도 모르겠지만 동결시키기 위해 막대한 에너지를 소비하는 거에 비해 딱히 얻는 게 없으니 그대로 종결했지. 태우면 연료로라도 쓸 수 있지만. 연구원들을 더 투입했다면 동결 후 해동해도 멀쩡하도록 만들 수 있었으려나.”
그들에겐 세계수 가지가 살려 달라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던 걸까? 만약 들려도 그런 짓을 벌였다면 감정 없는 사이코패스와 다를 게 뭐야.
실험에 사용된 가지는 몇 번째 가지였을까? 16번째 가지가 계속해서 실험에 이용됐던 걸까? 하필 행정 관리원을 잘못 만나서….
“어쨌든 기록엔 봉인을 푸는 방법도 존재한다고 나와 있는데 보시다시피 너무 오래 돼서 그 부분을 읽을 수 없어. 중요한 건 봉인을 푸는 게 우리에게 이득인지 아닌지 모르겠다는 거야.”
“그래서?”
“내가 멸망을 몰고 온 드루이드에 대해 설명했지? 그 드루이드가 이 테라리움에 온 목적 중 가장 확률이 높은 건 이 테라리움에서 어떤 드라이어드를 얻기 위해서야. 과거 그가 이곳에서 한 드라이어드를 개화했고 이번에도 똑같이 개화시키기 위해 굳이 여기까지 와서 사람들을 내쫓은 거지.”
“아무리 내가 드루이드가 아니더라도. 가지에서 원하는 드라이어드 열매를 찾거나 불러내는 게 불가능에 가깝다는 걸 알고 있는데 말이야. 그게 가능했다면 교단은 굳이 인공 개량에 목을 매지 않고 유니크 등급 이상의 드라이어드들만 뽑아냈겠지. 스페셜을 뽑을 수 있다면 최고의 실험체로 쓸 수 있겠군.”
애쉬가 비아냥대며 말했다.
“그 드라이어드와 재회를 한다는 점에 가능성이 있어. 아주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야. 간혹 드라이어드가 직접 세계수에게 의지를 표해 원하는 가지에 열매로 맺힐 수 있는 듯해.”
마거리트를 얻었던 경우를 생각하면 가능했다. 카수스 역시 이 점을 알고 있기 때문에 약속의 증표나 다름없는 101번째 테라리움을 고집한 걸 테고.
드루이드와 드라이어드의 열매를 통한 재회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드라이어드가 죽어서 세계수의 품으로 돌아간다는 건 주인 또한 세상에 없다는 뜻이었는데, 죽은 주인이 살아 돌아오지 않는 한 재회는 이루어질 수 없었다.
그렇기에 드라이어드가 굳이 열매로 맺힐 가지를 선택할 이유가 없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세계수의 품으로 돌아간 드라이어드는 새로 태어나는 것이나 다름없으니 과거의 기억을 전부 가지고 있을 리도 없고.
카수스가 동면 상태에서 부활했고, 가디언은 자리를 계승하지 않는 한 죽지 않는 특이점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드루이드를 처치하기 위해선 그가 아직 과거의 힘을 되찾기 전, 그러니까 상대적으로 약한 상태에서 공략해야 하는데 가지에서 옛 동료였던 드라이어드와 재회하게 된다면… 난이도가 너무 뛰게 될 거야. 가디언 하나를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벅찬데.”
이미 가디언을 하나 보유 중인 걸로 보이는데 그걸 이번에 가지에서 얻은 건지, 아니면 이곳에 오기 전에 얻은 건지 애매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과수원에 그가 머물고 있는 걸 보면 얻지 못했을 확률이 더 컸다.
101번째 테라리움이 망하고 머물던 사람이 다 떠난 지 꽤 시일이 지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있다는 건… 혹시 기록에서 말하는 봉인이 재회를 막고 있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가지의 봉인을 정말 풀어야 할까?
이 기록에 나온 비밀 결사단은 혹시 이 미래를 예상하고 가지를 봉인했던 걸까?
“만약 봉인이 재회를 막고 있는 거면…. 우리가 먼저 봉인석을 찾아서 숨겨 버린다면 영영 봉인은 풀 수 없게 되지 않을까?”
카수스를 해치울 수 없는 최악의 경우엔 차라리 봉인을 막아 버려서 그나 나나 둘 다 가디언을 얻지 못하게 되는 방법도 있었다.
“봉인석 위치는?”
“…….”
다시 난제에 부딪힌다. 그래서 봉인을 풀 수 있는 봉인석은 대체 어디에 있는가?
기록에 의하면 봉인석은 한 개가 아니었다. ‘봉인석들’이라고 표현하는 걸 보면 적어도 2개 이상이었다. 어쩌면 테라리움 내부엔 없을 것이다. 있다면 진작 카수스가 찾았을 테니까.
나는 말없이 드라이어드들이 가져온 수많은 자료들을 가리켰다. 저 안에서 최대한 답을 찾아내야만 했다. 아니면 저 안에 없을 수도 있고….
“부탁해. 이번엔 형태가 온전하다면 동화책이라도 좋아. 가능한 보석과 보물에 관련된 자료들이 필요해.”
4그루의 드라이어드들에게 다시 한 번 테라리움 수색을 부탁했다. 이미 자료들을 살폈지만 결정적인 단서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았기에 더 많은 정보가 필요했다.
인삼 군락지에 대해 알게 된 건 신원 미상의 작가가 쓴 동화책 때문이다. 책 안에 이야기의 형태로 군락지에서 일어난 비극이 적혀 있었다.
이미 일어난 어떠한 일이 구전되고 이를 들은 이가 각색하여 책으로 남기는 건 제법 흔했다. ‘왕의 명을 받은 나무’란 동화책도 그런 방식으로 탄생했다.
봉인석의 재료에 태양의 보석과 태양의 가호를 담을 또 다른 보석이 이용됐다는 기록이 있으니 모르는 사람이 봐도 아주 값진 물건처럼 보일 터였다. 그렇다면 뇌리에 박혀 쉽사리 잊히지 않을 테니 진귀한 보물이라는 소재로 어딘가에 기록이 남아 있을 가능성이 있었다.
“짧은 시간 내에 특정 주제에 관련된 자료를 가져오는 건 힘든 일일 테지만 제이 님이 부탁하는 일이니 열심히 노력할게요!”
어려운 부탁임에도 드라이어드들은 군말 없이 이를 수행해 줬다.
한 번 더 테라리움으로 수색을 나간 그들은 날이 어두워질 때쯤 다량의 자료들을 품에 안고 돌아왔다.
몬스터와 전투하랴 그 와중에 자료도 확인하랴. 너무나 바쁜 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주제를 보석과 보물로 특정하니 걱정대로 쓸모없는 자료가 너무 많았기에 셋이 붙어 훑어보다시피 자료를 분류해야만 했다.
그러다 상당히 유의미한 정보를 찾았다. 정보를 찾은 기록물은 다름 아닌 누군가 끝내 수신인에게 보내지 못한 편지에서였다.
민가를 수색한 페리윙클이 거의 쓸어오다시피 가져온 문서들 사이에 포함되어 있었는데, 편지에 그저 보물이라는 단어가 딱 한번 언급되어 있다는 이유로 챙겨온 것이었다.
예로부터 이곳에서 전해져 오는 말이 있다.
가령 보석처럼 귀중한 것들을 숨기려면 한 곳에 몰아 숨기지 말고 네 곳에 나눠 숨기라는 말이 있단다.
그러니 함께 동봉한 다이아들을 꼭 한 곳에 담아두지 말고 네 곳에 나눠 담아두도록 하거라.
그렇게 한다면 여행 중 도둑을 맞는 변을 당하더라도 졸지에 빈털터리가 되지 않을 테고, 남은 세 장소에 있는 다이아는 안전하여 원활하게 지낼 수 있으니 꼭 엄마의 말을 명심하거라.
어머니가 여행 중인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로 그 안에 101번째 테라리움에서 공공연하게 쓰는 말이 적혀 있었다. 중요한 물건들은 네 곳으로 나뉘어 보관한다라….
그러고 보니 유독 이런 표현이 자주 나왔던 것 같기도 하다.
도서관을 털었던 포인세티아는 도서관 건물이 크게 하나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분류에 따라 네 개의 건물로 나뉘어 있었고 그중 세 곳은 파괴되어 어쩔 수 없이 한 곳만 수색했다고 말했다.
칼미아와 페리윙클 역시 집집마다 금고를 네 개씩 두는 곳이 많아 무슨 집들이 금고를 많이 보유하고 있냐고 의문스럽게 말하기도 했었다.
이게 101번째 테라리움에서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관습이라면….
“어쩌면 봉인석은 4개일지도 모르겠어. 그리고 각각 다른 곳에 숨겨져 있을 거야.”
내 말에 시들링이 종이 한 장을 보여 주었다. 그건 낙서에 가까운 약도였다.
그는 약도의 네 곳을 차례대로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곳엔 특정 장소나 건물을 지칭하는 게 아닌 뜬금없는 단어와 문구가 적혀 있었는데, 각각 ‘기다림’, ‘순화’, ‘거짓’, ‘나를 건드리지 마세요’라고 적혀 있었다.
“기다림은 여기서 기다린다는 건가? 거짓은 장소가 잘못됐다는 거고? 나를 건드리지 말라는 건… 대체 이게 다 뭐야?”
아마 시들링이 내게 굳이 보여 주지 않았다면 의식의 흐름대로 적은 무의미하고 단순한 낙서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건 각각 꽃말이다.”
“꽃말이라고?”
그는 그렇게 말하곤 우리가 만든 내부 지도 위에 약도를 올렸다. 그러자 4개의 단어와 문구가 테라리움을 감싸는 형태가 되었다.
“각각 놓고 보면 연관성이 없지만 이 단어들을 하나로 묶는 공통점이 있는데 그게 꽃말이다.”
그 말에 시들링이 무얼 말하는지 짐작이 갔다.
꽃말이라면 이 꽃말을 상징하는 식물들이 있을 테고, 어쩌면 한때 그 식물들의 군락지가 테라리움 주변에 있었을지도 모른다. 더 나아가 태초의 군락지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101번째 테라리움의 관습과 네 개의 꽃말. 어쩌면 연관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혹시 각 꽃말에 예상되는 꽃을 알려 줄 수 있어?”
“’기다림’과 ‘거짓’을 상징하는 꽃은 많다. 하지만 ‘순화’와 ‘나를 건드리지 마세요’는 수가 많지 않아 범위를 좁힐 수 있다.”
“그중 오션 필드 태생의 식물로 범위를 더 좁힌다면? 네 생각을 말해 줘.”
시들링은 꽃말을 이용한 언어를 잘 구사할 수 있을 정도로 식물의 다양한 종에 대해 많이 알았다. 이럴 때 보면 그를 동행인으로 선택한 진가가 발휘한다.
조금 고민하던 그가 답을 내놓았다.
“순화란 꽃말을 가진 오션 필드의 꽃은 아마 ‘퉁퉁마디’, ‘나를 건드리지 마세요’란 꽃말을 가진 꽃은 ‘참골무꽃’이라고 생각한다.”
“퉁퉁마디라니… 이름이 귀엽다!”
난 혹시나 싶어 메모리 스톤을 이용해 두 꽃에 대한 정보를 검색해 봤다. 다행히 두 꽃 모두 정보가 존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