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39화 (539/604)

테라리움 밖으로 나가자 거짓말처럼 공격이 뚝 끊겼다. 우리를 뒤쫓아 오는 수많은 불은 여전했지만 적어도 필드에 대한 페널티는 없었다.

멋대로 튀어나간 애쉬를 쥐어박고 싶었지만 그로서는 최상의 판단을 내린 거기에 분만 삭힐 뿐이었다.

일단 몬스터들을 전부 해치워 소강상태를 만들었다. 그리고 아주 잠깐 숨 돌릴 틈이 생겨 전투로 인해 흩어졌던 서로가 모이게 되었다.

“자, 이제 내게 제대로 이야기해 주겠어? 널 원하니 군말 없이 네가 하자는 대로 따랐지만 적어도 내가 뭘 상대해야 하는지는 알아야 하지 않겠어?”

101번째 테라리움까지 애쉬를 끌고 왔으니 스텔라를 위한 첫 번째 목적은 완수된 거나 다름없었다. 이제 애쉬는 자신이 원하더라도 홀로 인페르노까지 돌아가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저곳엔 꼭 해치워야 할 적이 있어.”

“나만큼?”

태연하게 자신이 본래 우리와 적이었음을 언급한다.

“네 악명은 그에게 비할 바도 못 되지. 넌 고작 테라리움 몇 개를 멸망시킨 수준이지만 저자는 세계를 멸망시켰던 인물이니까.”

“좀 전에 떨어지던 바위에 맞아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야?”

“허황되게 들리겠지. 이해해. 나도 그에 대해 처음 알게 됐을 때 단번에 믿는 것이 힘들었으니까.”

카수스에 대해 그를 어떻게 납득시켜야 할까. 그가 공공의 적이라곤 해도 애쉬 역시 그를 적으로 인지할 수 있을까?

“먼 과거, 우리가 짐작하기도 어려운 아득한 과거에 세상이 한 번 멸망했다고 해. 우습게도 그 멸망의 시초가 한 드루이드였는데, 그때 그는 죽었어야 했지만 최근에 특수한 힘을 사용해 부활했어.”

“소설을 많이 읽었군. 널 보니 교단으로 돌아간다면 단원들에게 그런 글을 읽지 말라고 금지해야겠어. 드루이드는 세계를 지키는 위대하신 자들 아니야?”

조롱과 비아냥이 이어진다.

“인페르노에 가담한 드루이드들도 있는 걸 보면 꼭 모두가 세계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는 건 알잖아? 그는 자신이 이룩한 부와 명예를 버린 채 죽고 싶지 않았고 영원한 삶을 얻기 위해 세상의 이치를 깨트렸어. 그 여파로 세계 멸망이 도래한 거야. 그에게 지금의 삶은 재시작이나 다름없어. 한 번 걸었던 길이니 다시 걷는 건 무척 쉽겠지. 더구나 세상을 멸망시킬 방법에 대해 알고 있기도 하고 다시금 과거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무슨 짓이든 벌일 수 있어.”

“세상의 멸망이라…. 네 말이 맞는다면 그렇게 나쁘게 들리진 않는군.”

그의 표정으로 보아하니 말엔 진심이 담겨 있었다. 자신들이 사는 세상을 잃고 싶지 않은 사람들과 달리 그에게선 조금도 세상에 대한 애정이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멸망한다면 곧 너도 죽을 수 있는 거야.”

“난 죽음이 두려운 게 아니야. 개죽음이 두려운 거지. 아무것도 해 보지 못한 채로 죽는 게 두렵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허망한 죽음이 두려운 거야. 지금 순간에도 죽어 가고 있는 내가 그딴 걸 두려워하겠어? 멸망한다면 나만 죽는 게 아니라 모두가 죽는 거니 아주 깔끔하고 완벽한 죽음이군, 그래.”

스텔라…. 당신을 비난할 이유는 많지만 적어도 육아에 대해선 비난할 생각이 없었는데. 애쉬가 이렇게 자란 건 최선이었나요? 차라리 시들링을 키운 드라이어드 손에 맡겨졌다면 답답할지언정 정의로운 인물이 됐을 텐데.

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애쉬를 바라봤다.

하나부터 열까지 우린 조금도 맞지 않는다. 그는 전형적인 악당의 모습을 한 인물이었다. 어떻게 교화시켜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는, 끝끝내 주인공과 악당 둘 중 누구 하나가 죽어야 끝나는 이야기 속의 그런 인물이었다.

양심은 물론 죄책감도 동정심도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사람.

“네가 지나치게 편협한 인간이란 걸 잊었어. 그래, 세상 모든 사람들을 동등한 저울에 놓으니 네가 공감하지 못하는 거겠지. 베스탈리스를 대상으로 설명해 볼게. 적어도 넌 그들의 수장을 맡고 있는 만큼 베스탈리스들은 다르게 생각할 테니까. 세상이 멸망했어도 모든 사람들이 죽진 않았어. 그러니 이렇게 후대가 이어져 온 거겠지.”

“멸망도 별거 없네.”

“사람들이 접근하기 힘든 바다 위에 커다란 섬이 하나 있었어. 외부와 완전히 단절된 채 대대손손 오랜 세월을 살아온 사람들이 있었지. 그 섬의 사람들은 다름 아닌 멸망을 불러온 드루이드와 그의 최측근들의 후손들이었어. 재앙을 피해 자신이 아끼는 주변 사람들만 대피를 시킨 거지. 그곳엔 보통의 사람들은 물론 드루이드도 드라이어드도 있었어. 하지만 단 하나 없는 존재들이 있었는데….”

애쉬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건 베스탈리스였어. 베스탈리스의 핏줄은 그대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 섬에 최초로 도달했던 사람들 중에 베스탈리스들이 섞여 있었다면 난 그 섬에서 후대로 이어지는 베스탈리스를 만났어야만 해. 하지만 아무도 없었어. 이 말뜻을 알겠어? 그 드루이드가 자신의 울타리 안에 포함시키는 존재들 중에 베스탈리스는 없다는 이야기야.”

카수스는 비밀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가 살아온 세상이 아득한 과거에 있어 시간의 흐름을 이기지 못하고 대부분의 정보가 소실된 탓도 있지만 그가 직접 정보 소각을 주도하기도 했다.

그에게 드라이어드를 제외한 동료가 있었는지 가족과 자식이 있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과거의 그에 대해 알고 있을 전대 가디언들은 죽거나 행방이 묘연하고 실새삼마저 기억의 대부분을 잃어버린 후였다.

어쩌면 과거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일들을 기억하는 파피루스 드라이어드들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혹은 기록을 좋아하는 메스키트의 전대 주인인 그 소녀가 집필했다던 책들 중엔 어떠한 정보가 있을지도 모르고.

어쨌든 지금으로서 얻은 정보에 의거하면 카수스와 베스탈리스의 접점은 전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개죽음이 두렵다고 했지? 물론 그 드루이드가 이번 생엔 멸망을 불러오지 않을 수도 있지. 하지만 과거 큰 힘을 얻었던 전적이 있는 만큼 이번에도 요주의 인물이 될 수 있어. 그가 세상을 주도할 수 있는 힘을 되찾게 된다면 그 미래에 베스탈리스의 형편은 어떨 거 같아? 재앙을 피하기 위한 배의 한구석조차 내어 주지 않았었는데 미래에도 챙겨 줄까?”

카수스가 베스탈리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잘 모른다. 하지만 한때 최강의 드루이드로 세상을 평정했고 만인의 우러름을 받던 그에게 단 한 명의 베스탈리스 지인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건 이상하긴 했다.

“그 미래에 베스탈리스만 개죽음을 당하는 일이 없을 거라고 어떻게 자부할 수 있어?”

하지만 확실한 건 카수스가 베스탈리스를 위해 나서 주진 않을 거란 것이었다. 베스탈리스를 걸고넘어지니 애쉬에게도 반응이 있었다.

“넌 내가 사사건건 네 일을 방해하니 날 귀찮다고 생각하겠지. 실제로도 난 인페르노에 많은 손해를 입혔고. 하지만 이제 그는 몇 배나 더 네 앞의 걸림돌이 될걸? 무엇보다도 네가 그렇게 싫어하는 드루이드이니까. 그와 인페르노의 이해관계가 잘못 얽히게 된다면 나만큼이나 짜증 나는 적이 될 거야. 나와 같은 길을 걸으면서 나보다 훨씬 선배인 드루이드를 상상해 봐.”

“그도 너처럼 샘의 기운을 사용할 수 있나?”

“아닐걸?”

“그렇다면 살려 둘 이유가 없군.”

“아직까진 너도 내겐 적이고 그 드루이드도 내게 적이지. 하지만 적의 적은 아군이라고, 그를 해치우겠다는 목적 하나로 협력하자는 거야.”

“부활이라… 과거의 유물이라면 유물답게 땅속에 파묻혀 있어야지.”

마침내 제대로 된 이해관계를 통해 애쉬의 협력을 이끌어 내는 데 성공했다.

“그래서 필드의 가디언은 뭔데?”

“드라이어드 중에서도 제일 강력한 드라이어드라고 보면 돼.”

“해치워야겠군.”

드라이어드를 싫어하는 건 여전했지만. 그에게 카수스에 대한 적대감을 심을 수 있었던 이유 중엔 카수스가 드루이드라는 점도 한 몫 한 것이 분명하다. 현재 드루이드가 통치하는, 주가 되는 세계가 마음에 들지 않아 무력행사를 벌이는 거나 다름없는데, 드루이드인 카수스가 다시금 세계의 주도권을 잡는 게 어지간히 마음에 들지 않겠지.

“그래서 방법은 있고? 아까처럼 갔다간 또다시 도망 나오기 바쁠 텐데?”

“너….”

애쉬의 말에 갑자기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가 처음으로… 내게 계획을 물어봤다. 그동안 수차례 그의 귀에 때려 박아도 듣는 척도 하지 않고 제멋대로 행동했었는데, 이젠 내게 어떻게 할 거냐고 묻는다.

“그래, 계획. 계획이 필요하지.”

마치 시들링이 처음으로 정상적인 화법을 구사했을 때 느끼는 감정과 비슷했다. 속이 울컥해지는 무언가가 있었다. 하지만 구태여 이를 애쉬에게 티 낼 필요는 없었으니 자중했다. 시들링에게 했던 것처럼 칭찬이라도 한다면 다시금 우리 사이엔 벽이 한 층 더 생길 터였다.

“우리에겐 약점이 너무 많아. 일단 적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점이 첫째고.”

카수스가 데리고 있는 드라이어드의 정보를 모른다는 것이 이미 정보 싸움에서 아래라는 걸 뜻했다. 그는 나와 시들링의 드라이어드에 대해 전부 알고 있을 확률이 높았지만 나는 그가 보유한 드라이어드들 중 마거리트만 확실하게 알뿐, 나머지는 가디언을 데리고 있을 거란 게 전부였다. 누구를 데리고 있는지도 문제지만 몇을 데리고 있는지도 아주 중요했다.

드루이드들이 자신의 전력을 들키지 않기 위해 평소에 드라이어드들을 아티팩트에 넣어 두고 다니듯 정보에 따라서 전투의 난이도가 급격하게 달라졌다.

“무식하게 바위를 내던지는 드라이어드에 대해선 들어 본 적이 없는데….”

슬쩍 시들링을 바라보니 그가 카돈에 대해 언급했다. 사막의 왕자인 카돈 드라이어드는 압도적인 파괴력을 이용해 지면을 부수어 튀어나온 파편을 이용한 부가 피해를 입힐 수 있었다. 따지고 보면 메스키트도 종종 모래를 이용하니 같은 맥락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데저트 필드의 가디언은 내게 있으니 그나마 비슷한 속성을 생각해 보자면… 혹시 스톤 필드?

“그리고 지형도 적이 이미 중심부에서 주둔하고 있다는 게 큰 문제이기도 해.”

101번째 테라리움은 멸망하긴 했지만 멸망 시기가 오래되지 않아 아직까지 내부에 건물들이 제법 제대로 자리하고 있다는 게 문제였다. 이미 망한 지 오래됐고 불의 점거가 오래된 테라리움은 그곳이 한때 테라리움이었음을 모르고 지나칠 만큼 심하게 손상되어 있었다. 즉 지형적으로 갖는 이점이 거의 없는 거나 다름없었는데, 101번째 테라리움은 지뢰와 더불어 여러모로 고려할 점이 많은 필드였다.

“우선 탐색전이 먼저 되어야 할 거 같아.”

지금 상황에서 무턱대고 진입하는 건 좋지 않았기에 결국 할 수 있는 한 정보를 끌어모아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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