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상에 표시된 101번째 테라리움에 마침내 도착했을 때, 드디어 끝났다는 생각보단 이제부터 시작이란 생각이 확 들었다. 그나마 얼마 전까진 주둔하고 있던 사람들이 있었던 덕에 오래전 멸망으로 사라져 버린 테라리움보단 도시의 형태가 많이 남아 있었다.
굳이 입구를 찾아 들어갈 필요는 없었다. 이미 테라리움 주변을 감싸던 울타리나 벽이 전부 소실된 상태였기에 사방이 입구였다. 몬스터가 적은 곳을 통해 진입하려는데 시들링이 내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
“발밑을 조심하도록.”
“발밑?”
설명을 요구하는 나에게 그는 먼저 어느 곳을 가리켰다. 그곳에선 꿈틀꿈틀 기어가던 불이 갑자기 쾅 소리와 함께 폭발이 일어나 멀리 날아가는 모습이 보였다.
“지뢰가 깔려 있는 듯하다.”
“지뢰라고? 테라리움 내부에 지뢰가?”
그 말을 들은 이후로 단 한 발자국도 뗄 수 없게 되었다.
폭발은 꽤 자주 일어났다. 그만큼 지뢰가 많이 깔려 있다는 걸 뜻했다.
“사람들이 철수하면서 지뢰를 깔고 갔을까?”
폭탄이 아무리 강력하더라도 불의 움직임을 제지할 수 있을지언정 퇴치할 수준은 못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파묻힌 지뢰엔 다른 효력이 있는지 밟은 불은 물론 주변의 다른 불에게도 하얀 김이 피어오르며, 놀랍게도 상처를 입히는 모습이 보였다.
어쩌면 지뢰엔 드라이어드의 능력이 섞여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건 모른다. 하지만 급히 철수하면서 한가하게 지뢰를 깔고 갈 수 있었을 거란 생각되지 않는다.”
이곳은 이제 버리는 곳이었기에 굳이 뒤처리를 하고 가는 것도 맞지 않긴 했다. 그렇다는 건 주둔하면서 깔아 뒀다는 걸까?
“파괴력이 상당히 강한데? 잘못 밟으면 다리 하나는 날아가겠어. 떨어진 네 다리는 내가 주울게. 쓸모없게 된 거니 내가 가져도 되지?”
“그렇게 되지 않게 널 먼저 보낼 거야.”
헛소리를 하는 애쉬를 걷어차 주고 싶은 마음을 애써 참으며, 테라리움에 진입하지도 뒤로 물러나지도 못한 채 갈팡질팡했다.
“미리 깔았다면 지뢰의 위치가 표시된 지도 같은 게 있지 않을까?”
101번째 테라리움은 멸망 전에도 주민들이 살 만한 환경이 되지 못했다. 그러니 내가 60번째 테라리움을 통째로 전쟁터로 썼던 것처럼 그들도 작전 요새로 사용했겠지. 침입자가 들어온다면 곧바로 지뢰가 발동하기에 경고용으로 깔아 뒀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모두 철수했으니 지도를 찾는 건 어려울 거 같고….”
“가려는 길의 지뢰를 미리 터뜨려 안전지대로 만드는 건 어때? 내가 저 앞길을 터뜨리면 연쇄적으로 터질 것 같은데.”
애쉬가 당장이라도 힘을 사용할 것처럼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말했다.
“너무 요란해서 눈길을 끌 거야.”
테라리움 내에서 전투가 벌어지는 건 상당한 악조건 속에서 버티라는 거나 다름없었다. 전투는 물론 지뢰까지 신경 써야 하니까. 안전지대가 확실하지 않으니 데이지와 같은 공격형 드라이어드들이 마음껏 뛰어다닐 수도 없었다.
“땅속을 탐지해 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드라이어드가 있다면 또 모를 텐데.”
난 나와 시들링이 데리고 있는 드라이어드들의 능력을 차분히 따져 보았다.
시들링의 드라이어드들은 거의 공격에 치우쳐 있기 때문에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물론 쓸모 있는 드라이어드가 있다면 시들링이 먼저 말했을 테고.
“블루 멜로우는 어때? 전투하는 걸 보니까 탐지 능력이 있는 것 같던데.”
시들링의 수정구를 든 블루 멜로우는 전투에 직접 나서진 않으나 뒤에서 팀을 서포트하는 지원형 드라이어드였다. 수정구를 들고 끊임없이 무엇을 탐지하기에 혹시나 싶어 물어봤다.
“내 블루 멜로우는 적의 약점을 탐지하는 데 특화되어 있기 때문에 땅속의 움직임 없는 물체를 탐지하는 일에는 소용없을 것이다.”
“드라이어드도 만능은 아니야. 그렇지?”
이중에서 가장 쓸모가 떨어지는 애쉬가 이죽거리며 말했다. 베스탈리스들 중에 드루이드와 드라이어드를 혐오하는 자들이 많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다.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이 가장 극단적인 예시이니까.
애쉬 역시 그런 성향이었다. 그는 드루이드와 드라이어드에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면 불쾌감을 아낌없이 표출했다. 어렴풋이 그가 느끼는 건 열등감이 아닐까 싶었다.
“그렇다면…”
“섬에서 싸웠던 그 드라이어드는 어떤가?”
“섬? 아, 실새삼?”
그러고 보니 실새삼은…. 땅속에 드라이어드를 묻어 두고 비상식량처럼 사용할 정도로 잔인한 녀석이었지만 그 방식에 집중해야 했다. 그는 수많은 실 줄기를 넓게 퍼뜨려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드라이어드였다.
메스키트에게도 땅속을 뒤지는 비슷한 능력이 있지만 근본적으로 그녀는 땅속을 뿌리로 다 헤집는다는 단점이 있었다. 실새삼의 능력은 상당히 섬세했기에 그가 탐지 능력에 특화되어 있지 않더라도 응용해 볼 만한 점은 있었다.
줄기의 무게가 가볍기 때문에 지뢰를 지나쳐도 터지지 않을 테고.
아티팩트에서 실새삼을 불러내자 그는 애쉬를 향해 노골적으로 불편함을 티 냈다. 호감도가 수치로 나타난다면 이미 마이너스 상태일 거다.
“땅속에 지뢰가 제법 많이 설치되어 있어. 네 능력으로 안전한 길을 찾아줬으면 해.”
“어려운 일은 아니지. 그것보다….”
막 소환된 실새삼은 테라리움을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운 느낌이 드는군….”
그의 말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그가 이와 같은 대사를 했던 적이 있었다. 겨울눈의 방에서 전대 포인세티아와 마주했을 때였다. 그에게 그리운 느낌이란 건 과거 카수스 시대에 함께 여행을 다녔던 이들을 감지해 냈다는 걸 뜻했다.
“설마….”
설마 실새삼이 카수스를 감지해 낸 걸까? 아니면 그와 함께 여행을 다녔던 어떠한 필드의 전대 가디언을?
“카수스가 이곳에 있어?”
“글쎄. 확실치는 않으나 이 테라리움에 무언가 있는 건 확실하다.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그다지 좋은 느낌은 아니거든.”
만약 실새삼이 느낀 게 가디언의 기운이라면, 카수스는 벌써….
“내 능력으로 지뢰를 탐지해 보겠다. 내 줄기와 피어난 꽃이 있는 자리는 피하도록 하거라.”
그가 손가락을 까닥이자 수백 수천 가닥의 가는 줄기가 뻗어 나와 바닥을 기었다. 줄기들은 땅을 파고들거나 그 위를 기며 착실히 지뢰를 찾아냈다.
“기운이 느껴지는 곳이 어디야? 그곳을 목적지로 삼아야겠어.”
그는 말없이 어느 곳을 가리켰다. 멀리 뼈대만 남은 건물이 보였다. 테라리움의 중심부. 그곳은 아마도 과수원이 있을 자리였다.
드디어 카수스를 직접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심장이 뛰었다. 마거리트도 함께 있겠지? 이번에야말로 그를 만난다면 마거리트를 되찾아 오겠어.
지뢰는 우리의 앞길을 막는 장애물 같은 역할도 했지만 한편으론 불이 테라리움 안으로 들어오는 걸 꺼리게 만드는 역할도 했다. 터지는 족족 피해를 입으니 꺼리는 지역이 되어 구태여 살아 있는 생명도 없는 테라리움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것이다.
다른 멸망한 테라리움들의 안에 수많은 불이 점령하고 있던 걸 떠올리면 이곳은 상당히 한산한 편이었다.
물론 그건 지뢰에 치명적인 피해를 입는 작은 불에 한했다. 몸집이 큰 불은 지뢰가 성가실 뿐 그다지 치명적인 게 아니기에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하지만 활동성은 아주 낮아서 거의 제자리에 멈춰 있는 거나 다름없었다.
눈먼 불이 밟은 지뢰가 터져 큰 소리가 나면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긴 했으나 먹잇감이 없다는 걸 깨달으면 다시 잠잠해졌다.
즉, 지뢰만 잘 피해서 이동하면 불과 성가신 전투를 치를 필요 없이 안전히 목적지까지 도달할 수 있음을 뜻했다.
실새삼이 표시한 안전지대를 밟으며 조심히 이동하고 있을 때였다.
이런 모습을 아니꼽게 보고 있는 자가 있는 게 분명하다.
갑자기 핸드폰이 시끄럽게 진동하며 금빛으로 반짝였다. 내 핸드폰은 모험을 하면서 딱 세 번, 특정 상황에서만 이런 식으로 반응했다.
은둔자의 정원에서 실새삼을 감지해 냈을 때와 포인세티아를 처음 마주쳤을 때. 그리고 땅굴 속에서 전대 노멀 필드의 가디언을 감지해 냈을 때였다.
멋대로 켜진 핸드폰에서 중앙에 크로스 헤어가 자리한 둥근 금빛 홀로그램이 붕 떠올랐다. 주변에 새로운 필드의 가디언이 있을 경우 알려 주는 핸드폰의 기능이었다. 크로스 헤어 안에는 실새삼을 가리키는 붉은 점과 그 외 알 수 없는 붉은 점이 하나 더 있었다.
“필드의 가디언이 근처에 있어!”
실새삼은 물론 내 말뜻을 알아들은 시들링이 바짝 긴장한 상태가 되었다. 필드의 가디언에 대해 모르는 애쉬는 내 말이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새로운 가디언을 만날 때마다 혹독한 신고식을 치렀다. 죽을 뻔한 경험은 덤이었다.
실새삼을 만나러 가기 전엔 마거리트가 예언의 힘을 발동해 세이브 포인트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그를 만났을 땐 전멸할 뻔했고, 포인세티아를 만났을 땐 겨울눈의 방에서 피가 흐를 정도로 큰 상처를 입었다.
땅굴에서 전대 노멀 필드의 가디언을 만났을 땐 실제로 죽음을 눈앞에 두고 데이지가 리플레이를 발동해야만 했고.
즉 이번에도 큰 시련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폰이 가디언의 존재를 감지한 직후 일이 발생했다.
쿵! 쿠쿵!
하늘에서 거대한 바위들이 비처럼 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출처는 우리의 목적지였던 과수원으로, 그곳에서 누군가가 우릴 향해 돌덩어리를 집어 던지는 것처럼 인위적인 포물선으로 날아왔다.
단순한 공격이기에 피할 수는 있지만 문제는 주변의 지뢰들이었다.
일제히 떨어진 바위들은 지뢰를 건드렸고 순식간에 연쇄적으로 터져 나갔다. 다시금 모든 드라이어드들이 출동해 오직 드루이드를 지키기 위한 전투가 벌어졌다.
깔리거나 머리를 부딪치면 즉사할 위험을 가진 바위 비와 터지면서 주변에 피해를 입히는 지뢰들, 더구나 연속적으로 소음이 발생하자 잠잠하던 몬스터 불들도 이곳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이건 명백히 우릴 노린 공격이야.”
우리가 101번째 테라리움으로 들어온 걸 상대가 알아차렸다. 어쩌면 실새삼이 곧바로 그리운 기운을 느낀 것처럼 그쪽도 실새삼의 기운을 느낀 걸지도 모른다. 카수스가 내게 실새삼이 있다는 걸 알고 있을 확률이 컸다.
마거리트가 그에게 말해 줬을 수도 있지만, 60번째 테라리움에서 길드전이 벌어진 이후 그 근처에 카수스가 전투를 지켜봤다는 증거를 발견했었다. 그곳에서 실새삼을 직접 봤을 수도 있겠지.
실새삼의 기운을 느꼈다는 건 곧 그의 주인인 나 역시 함께 있다는 걸 뜻했고.
“계속 여기에 있는 건 위험해요!”
주변에 안전지대라고 할 만한 곳이 없었다. 밟고 있는 자리가 안전해도 위와 양옆에서 공격이 쏟아지니 자리를 피할 필요가 있었다.
“일단 테라리움을 빠져나가는 게 어때? 최소한 발밑에 지뢰라도 없는 곳으로 말이야.”
그렇게 말한 애쉬는 멋대로 전장을 이탈해 테라리움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돌발 행동을 하지 말라고 말했는데!
하는 수 없이 테라리움에 진입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우리는 후퇴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