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마땅한 티를 가득 내며 시종일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애쉬와 계속되는 전투로 지친 나와 시들링. 우리들 사이에 수습하기 힘들 만큼 좋지 않은 기운이 감돌았고 그만큼 정신력도 많이 저하되었다.
이렇게 쉴 틈 없이 힘든 상황에 내몰린 건 간만이었다. 거의 쉬지 못하고 달려야 했고 필요하다면 굴러야 했다.
전투 도중 절벽 끝에 내몰렸을 때, 안전히 내려갈 틈이 없어서 데이지의 줄기를 구명줄 삼아 거의 구르듯이 내려가야만 했다. 그 바람에 여기저기 부딪혀 온몸이 아팠고 입은 장비는 흙먼지와 재가 덕지덕지 묻어 거지꼴이 되었다.
코를 풀 때마다 까만 먼지가 나오고 얼굴을 닦으면 깨끗한 수건이 순식간에 더러워질 정도였다.
이 죽음의 대지에선 불에 타 죽는 것만 걱정해야 될 게 아니라 오염으로 인해 큰 병에 걸려 죽는 것까지 걱정해야 될지도 모른다.
우린 바위들이 모여 자연적으로 생성된 동굴을 운 좋게 찾아냈다. 불에 타 버린 나무와 큰 바위들이 주변을 가리고 있어 몬스터들의 시선을 피하기 좋았고 전체적인 지역 온도가 높은 것에 비해 동굴 안은 적당히 기온이 낮은 편이라 한숨 돌릴 수 있었다.
간신히 물을 마시며 휴식을 취했다. 쉬지 않고 움직인 탓인지 다리가 말도 못 하게 아파 왔다. 겨우 바위에 등을 기대고 주저앉았을 땐 다시 일어날 수 없을 만큼 다리가 덜덜 떨렸다.
난 다리를 주무르며 자고 일어나면 꼬박 며칠을 앓아야 할 만큼 엄청난 근육통이 기다리고 있음을 직감했다.
“쉬어야만 해.”
아무리 다들 여행에 잔뼈가 굵었다고 하더라도 이런 강행군을 계속하기엔 체력적으로 문제가 있었다.
“포인세티아, 막 전투를 끝내서 미안한데 도와줄 수 있어?”
“내게 맡겨!”
일단 몸 안에서 들끓는 열을 식혀야 할 필요가 있었다. 동굴 안의 온도가 낮다 하더라도 우리가 앞 번대에서 지냈던 것만큼의 쾌적한 온도와는 거리가 멀기 때문에 불쾌지수는 자꾸 상승했다.
그로 인해 세 명 모두의 짜증이 늘어나고 있어서 자칫 잘못하다간 심각한 내부 분열을 초래할지도 몰랐다. 쉴 수 있는 순간엔 안락하게 쉬어서 육체뿐만 아니라 감정을 다스려야 할 필요가 있었다.
포인세티아가 동굴 곳곳에 눈꽃을 뿌려 기온을 급속도로 낮추기 시작했다.
그녀가 스노우 필드의 가디언이긴 하지만 모체가 식물이기에 눈을 만들어 내는 것을 불가능했다. 그녀가 사용하는 차가운 눈과 관련된 기술들은 모두 스노우 필드에서 모아온 것들이었다.
겨울눈의 방에 스노우 필드를 한 조각 떼어 내어 저장하고 있다가 필요에 따라서 꺼내 쓰는 것이다.
마음 같아선 그 겨울눈의 방으로 들어가 몇 분 쉬다 오고 싶지만, 전투에 사용해야 할 중요한 기술을 개인의 사리사욕을 위해 멋대로 남발할 순 없었다. 겨울눈의 방이란 기술은 사기적인 성능을 갖고 있는 만큼 재발동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상당했기 때문이다.
주변에 눈꽃들로 인해 시원한 냉기가 흐르자 모두의 얼굴이 평온하게 변했다. 짜증이 가라앉자 머릿속이 좀 더 냉정하게 변했다.
“그런데 카수스 말이야.”
동굴 곳곳을 눈꽃으로 장식하며 내 옆에 작은 눈사람을 만들던 포인세티아가 말했다.
“아직까지 101번째 테라리움에 있을까? 가능성이 가장 높은 곳이긴 하지만 여기까지 오면서 느꼈잖아. 도저히 버틸 만한 곳이 아니란 걸. 그리고….”
포인세티아가 우리와 멀리 떨어진 곳에서 휴식을 취하는 애쉬를 흘긋 바라봤다.
“괜찮아. 쟨 드루이드가 아니라 네 말을 들을 수 없어.”
일련의 전투로 인해 내 드라이어드들은 더욱 더 애쉬를 싫어하게 되었다. 우리가 표면적으론 같은 팀이라 해도 그들은 끝까지 그를 적처럼 대했다. 그러니 긴밀한 이야기를 애쉬가 듣게 되는 걸 꺼렸다.
“멋대로 떠들어.”
내 말에 애쉬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드루이드가 아니란 말이 그의 입장에선 기분이 나쁠 수도 있으니 그러려니 했다.
“카수스는 그곳에서 가디언의 열매를 노리는 거라고 했지? 그런데 이미 그곳의 세계수 가지는 제구실을 못 할 거 아니야? 열매를 얻을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렇긴 해.”
이렇게 힘들게 101번째 테라리움에 도착했는데 그곳에 카수스가 없을뿐더러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면? 헛수고가 되고 만다.
하지만 카수스는 그동안 포인세티아의 감시망에 단 한 번도 걸리지 않을 만큼 용의주도한 데다 그가 그곳에 있다는 확실한 증거가 있는 건 아니지만 겨우 관련된 정보라도 입수할 수 있었다.
확실하지 않다고 그냥 넘기기엔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는 것에 가까웠다. 그가 정말로 그곳에서 가디언을 얻게 된다면? 어쩌면 마거리트를 다시 되찾아 올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된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 수밖에 없어.”
내 말에 포인세티아는 안타깝다는 표정을 하며 먼지로 엉망이 된 내 볼에 손을 대었다.
“그래, 네가 그렇다면. 우린 항상 네가 가는 길에 함께 할 테니까 아무런 걱정 하지 마. 그곳에서 무엇을 얻든 얻을 수 없든, 설령 무언가를 잃게 되더라도 너의 결정에 단 한순간도 후회가 없었으면 좋겠어.”
그렇게 날 위로한 포인세티아는 내 손에 작은 눈사람을 쥐여 주곤 아티팩트로 돌아갔다. 새하얀 눈사람이 내 손에 묻은 먼지들로 인해 더러워졌다. 포인세티아가 사라지자 눈이 빠르게 녹기 시작했다. 이내 축축해진 손을 보며 생각했다.
그래, 하지 않아서 후회하느니 차라리 하고 나서 깨닫자.
포인세티아가 떠나자 시들링의 곁에 있던 드라이어드들이 애쉬를 향해 쉴 새 없이 뒷담화를 내뱉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쪽 팀도 어지간히 애쉬가 마음에 들지 않았나 보다.
“감히….”
“어깨동무는 시들링도 못 해 봤는데.”
“하나부터 열까지 다….”
“재수 없어.”
약간은 엇나간 저 대화들을 말려 줄 수 있는 건 벨라돈나뿐이었지만 그녀는 애쉬를 배려해 전투가 끝난 후 아티팩트로 돌아가 나오지 않는 상태였다.
그래도 저 드라이어드들이라도 없었다면 주변이 숨 막히게 무거운 침묵으로 가득했을 테니 내버려 두었다.
난 얼굴을 닦아낸 수건을 땅에 아무렇게나 던져 놓고 생각했다. 동굴 안에 막 들어왔을 땐 그저 앉아서 쉬고 싶다는 생각뿐이었으나 이젠 온몸이 찝찝해서 견디기 힘들었다. 눈을 감을 때마다 속눈썹에서 먼지가 떨어지는 듯했고 장비가 땀으로 인해 달라붙어 답답했다.
씻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그럴 상황은 아니었기에 새 수건을 꺼내 물을 묻혀 대충 닦아 내는 데 만족해야만 했다.
앞으로 이 상황을 몇 번이나 더 반복해야 101번째 테라리움에 도착할 수 있을까?
“하아….”
의도했던 것과는 다르게 아주 무겁고 큰 신음이 내 입에서 터져 나왔다. 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방앗간 앞 참새처럼 조잘조잘 떠들던 드라이어드들이 이야기를 멈추고 날 바라볼 정도였다.
“저….”
그들이 떠드는 걸 탓한 것도 아닌데 죄를 지은 것처럼 사색이 되어서 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민들레 묘목들 말인데요.”
갑자기 페리윙클이 대뜸 내게 말을 걸었다. 칼미아와 비슷한 성향을 가져서 둘이 자주 다투면서도 죽이 맞을 땐 잘 맞아서 시들링 관련으로 내게 호들갑을 자주 떠는 드라이어드 중 하나였다.
“아, 아이들이 그쪽의 회복을 맡았지. 어땠어? 실전 경험이 많이 부족해서 많은 도움은 되지 못했을 것 같은데.”
“아니에요! 이젠 묘목으로 부르기도 미안할 만큼 많이 성장했더라고요. 전투에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사실 저희 부케엔 회복형 드라이어드가 없으니 새싹 잎이라도 빌릴 수 있다면 감지덕지이지요.”
그러곤 쉴 새 없이 민들레 아이들에 대해 칭찬을 하기 시작했다. 드루이드의 기분을 풀어 주기 위해 그자의 드라이어드를 칭찬하는 방법은 아주 옳은 선택이었다. 자신의 드라이어드를 좋게 말해 주는데 싫어할 자가 어딨는가?
“연리지를 사용하는 꽃들이다 보니 합이 굉장히 좋더라고요. 실전이 부족하다고 하셨지만 좋은 버팀목을 보고 배웠는지 적응력이 굉장히 좋았어요.”
좋은 버팀목이라고 하면… 일단 데이지2는 아닐 것이다. 공격형 드라이어드인 그는 회복형 드라이어드가 실전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르쳐 줄 수 없을 테니까.
짐작이 가는 존재라 하면…. 28번째 테라리움에 있는 인공 개량 드라이어드들이나 짭신 엘더 정도일 것이다.
민들레 아이들은 아무래도 엘더에게 힐러 자리에서 우선순위가 밀리기 때문에 거의 차용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그 아이들만이 사용할 수 있는 특수 능력의 힘을 빌릴 때 외엔 대부분의 시간을 테라리움에서 보냈는데, 실전이 부족하더라도 아이들 곁에서는 많은 경험을 듣고 배울 수 있는 버팀목들이 많았다.
그것도 아주 다양한 회복형 드라이어드들이 자리하고 있을 테니 어느 한 꽃의 방식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포괄적으로 배울 수 있었겠지.
시들링의 드라이어드들의 말에 따르면, 아이들은 단독으로 팀 하나를 책임져야 하는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기죽거나 떨지 않고 맡은 바 임무를 잘 해냈다고 한다. 회복형 드라이어드로서 고난이도 전투에서 성공적인 데뷔를 거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곧 연리지로 둘이 함께 묶여 행동하던 때를 벗어나 각자 독립된 개체로 행동할 날이 머지않은 듯했다. 민들레 아이들은 둘 모두 포레스트의 왕이 되길 원했다.
난 어쩌면 아이들이 노토스의 소나무 드라이어드들처럼 계속해서 연리지로 함께 행동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서로가 서로를 좋은 경쟁 상대로 여기는 데다 각자 욕심이 많다 보니 결국 독립한다는 미래가 더 맞을 것이다.
왕이 되려면 하나는 다른 하나에게 영혼을 맡기고 포레스트로 들어가야 한다. 둘 모두에게 왕이 될 그릇이 보였으니 서로가 정당히 실력을 겨뤄서 쟁취해 내야만 할 것이다. 그렇다면 훗날 민들레나와 민들레노 중에 왕이 되는 건 누구일까?
차마 예측할 수 없을 만큼 둘은 실력이 비등비등해 보였는데….
그런 생각들이 들다 보니 다른 이의 입을 통해 민들레 아이들이 성장했음을, 그리고 이번 전투를 통해 더욱더 성장했음을 듣게 된 게 기쁘긴 하나 장성한 자식을 앞에 둔 부모처럼 시원섭섭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모험 초기, 민들레 군락지에서 초기 데이지보다 어린 모습을 한 민들레 묘목들을 업어 와 길렀으니 더욱더.
“알려 줘서 고마워. 그리고 민들레 아이들이 안전히 실전을 끝낼 수 있도록 지켜 줘서 고마워.”
내 드라이어드지만 아이들의 안전은 전적으로 시들링의 드라이어드들에게 달려 있었다. 정신없는 전투 속에서 아이들이 크게 다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지쳐 보이긴 해도 힘든 전투를 겪었으니 그 정도는 다행이었다.
이야기를 끝내자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그래서 몸이 고되더라도 앞으로 나아갈 힘은 많이 충전되었다.
새 수건과 물병을 꺼내 애쉬에게 던져 주곤 지도를 함께 꺼내 위치를 체크했다. 정신없는 와중에 계속 지도를 체크하며 이동하는 건 무리니 어느 한 방향을 정해 두고 그걸 기준으로 달리는 것만 생각했다.
“우리가 방향을 심하게 이탈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여기일 건데. 그렇다면 곧 101번째 테라리움이 머지않았어.”
굴러떨어지듯 내려간 절벽이 101번째 테라리움 근처에 있었다. 지금 쉬고 있는 동굴은 지도에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이동 시간을 고려해서 가장 일치하는 부분을 가리켰다.
“조금만 쉬고 다시 이동하자.”
그리고 초보일 때 외에 이용한 적 없는 피로 회복제를 꺼내 뚜껑을 땄다. 내 드라이어드들이 알면 엄청 싫어할 테지만 내 체력이 발목 잡는 건 더욱 싫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