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라리움을 침입하려는 불과 이에 맞서 싸우는 드루이드들. 아직 병력 지원 전이기에 방어 쪽이 열세면 어떡하나 싶었는데 생각보다 아주 많은 드루이드가 참가해 있었다.
길드 단위로 움직이는 것도 보였으며 특정 소속의 유니폼을 입고 싸우는 사람들도 많은 걸 보니 상회나 인근 테라리움에서 지원을 보낸 듯했다. 물론 개인으로 활동하는 드루이드도 많이 보였다.
1번째 테라리움은 고위험군 지원 정책으로 모든 테라리움에 지원 의무만 지운 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드루이드들을 대상으로 1번째 테라리움에서 공지한 테라리움에서 전투나 지원을 통해 많은 공을 쌓는다면 많은 혜택을 주겠다고도 했다.
그동안 모험을 하면서도 특출난 업적이나 명예를 손에 쥐지 못한 드루이드라면 혹할 만한 공지였다. 개인 참여를 독려하는 것은 좋다. 행정 관리원의 부담이 줄어들 테니까.
대규모 공성전에서 유저들끼리 다투는 게 아니라 몬스터를 상대로 전투를 벌이는 게임은 제법 많았다. 공헌도에 따라 순위를 매기고 최상위 순위인 랭커들에겐 게임에서 쉽게 얻을 수 없는 아이템이나 많은 양의 재화가 보상으로 주어진다.
게임에선 이를 노리고 활발하게 참여하는 유저가 많았고, 이곳도 다행히 게임만큼 지원 오는 드루이드가 많았다.
세계를 구하겠다는 사명보다도 때로는 확실하고 직관적인 보상이 사람들의 의욕을 부추긴다. 전투에 참여한 드루이드 중엔 물론 불을 해치우겠다는 사명만으로 참여한 자들도 많겠지만 1번째 테라리움이 주는 혜택만을 노리고 참여하는 이들도 아주 많을 터였다.
만약 내가 소속이 없었다면 나 역시 공고를 보자마자 참여하려 달려갔을 거다.
“오래 가진 않겠지.”
1번째 테라리움이 도입한 공헌도 시스템에 유일한 단점이 있다면 단기적이란 것이었다. 원하는 보상을 얻게 된다면 참가를 멈출 테니 계속해서 새로운 자들이 유입되길 기대해야 하기 때문이다.
스텔라와 온건파 베스탈리스들이 어서 빨리 전력을 모아 주길 기도하는 수밖에.
마차가 이동할 수 있는 지역까지 최대한 이동 후 도보 이동이 이어졌다.
솔직히 101번째 테라리움까지 개개인이 이동하는 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불을 뚫고 나아가는 건 무척이나 힘들었다. 조금의 쉴 틈도 없었다. 계속되는 전투에 나아가는 속도가 느려졌다.
모든 불을 해치우는 건 무의미하기에 드라이어드들을 불러 길을 트면 무작정 도망가는 방법을 택했다.
애쉬의 능력은 그다지 효율이 좋지 못했다. 드라이어드들 보다 즉발성으로 큰 위력의 광범위 기술을 난사할 순 있지만 이후엔 꼬박꼬박 그를 회복시키는 과정을 겪어야만 했다.
도저히 휴식 시간을 마련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가 지쳐 쓰러지면 금방 균형이 무너졌고, 나와 시들링은 배가 되는 몬스터들을 맡아야만 했다.
종래엔 주저앉은 그를 부추겨 이동해야 하는 상황까지 발생했다.
“내가 계속 말했지! 특정한 순간이 아니라면 그렇게 힘을 남발하지 말라고 했잖아!”
그가 짐이 되는 상황이 연이어 발생하자 나도 모르게 짜증이 솟구쳐 올랐다.
분명 셋이 함께 협동해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에 우린 전략을 세워야만 했다.
방어와 회복, 지원 등 모든 밸런스를 두루 갖춘 내가 전방을 맡고 길을 뚫는다면, 안정적인 공격력과 경험을 가진 시들링이 후방과 사이드를 맡아 흘러들어 오는 불을 막는다.
애쉬는 우리 둘 모두가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도저히 전투가 불가능할 때 크게 한방을 노려 변수를 만드는 역할이었다.
하지만 애쉬가 아무리 부정해도 모자지간이라 닮는 것인지, 힘을 일깨운 직후 불도저처럼 몬스터들을 쓸고 다니던 스텔라처럼 그 역시 황소처럼 전투에 뛰어들었다.
메스키트와 가막살나무가 앞을 지키고 있는데 제멋대로 튀어 나가는 돌발 행동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의 행동에선 마치 드라이어드에게 지고 싶지 않다는 오기까지 느껴졌다.
역할이 명확한 팀플레이에선 탱커보다 앞서 나가는 행위는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다. 우리가 지금까지 도망 전법을 펼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수준급의 탱커가 몰려오는 몬스터들의 어그로를 죄다 맡은 후 길을 터 주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우리에게 믿을 만한 회복형 드라이어드는 엘더뿐이었다. 상황이 상황이기에 28번째 테라리움에서 불러낸 민들레 아이들까지 전투에 참여하고 있지만, 아이들은 후방을 주력하는 시들링의 파티에 붙여 놓은 상태였다.
두 아이들이 연리지의 힘으로 안간힘을 써야 엘더만큼의 1인분을 해낼 수 있는 상황이기에 자동적으로 엘더가 전방의 우리 팀만 보살피는 데 주력해야 했다.
어그로가 모두 메스키트와 가막살나무에 몰린다면 엘더가 서포트를 서는 게 한결 수월했다. 둘에게만 집중하면 되니까.
하지만 애쉬가 돌발 행동을 벌이고 이로 인한 피해가 전투에 가담 중인 다른 드라이어드들에게 영향을 끼친다면, 엘더는 두 탱커뿐만 아니라 다른 딜러들에게도 눈을 돌려야만 했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힘을 다 쓴 애쉬가 나가떨어지기라도 한다면?
“그렇게 죽고 싶어서 안달이라면 지금 여기에 널 버려두고 갈게. 네겐 협력이란 개념이 없니?”
그를 101번째 테라리움으로 가는 여정에 합류시킨 게 정말 잘한 일이었을까?
눈을 돌리기 위해선 정말 이 방법이 최선이었던 걸까?
어김없이 돌발 행동으로 인해 문제가 발생했다. 불은 생태계 최상위 포식자의 모습을 흉내 내는 위험한 성질이 있었다.
애쉬의 기술은 오랜 세월 불을 다뤄 온 만큼 단순하게 타오르는 몬스터들에게 비할 바가 못 됐다. 그런 그가 마음껏 날뛰며 제 강함을 피력하니, 몬스터들의 관심은 드라이어드보다 한방을 크게 터뜨리는 애쉬에게 집중되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문제가 발생한 것을 깨달은 건 몇 번의 웨이브를 겪은 후였다. 애쉬를 모방한 몬스터들이 결국 나타나고 만 것이다.
불은 크기가 작은 개체를 잡아먹고 몸집을 키우는 습성도 가지고 있었다. 혹은 크기를 계속 불리기보단 작은 몸에 압축시켜 폭발적인 힘을 터뜨리기도 했다.
오래전, 민들레 군락지에서 시들링을 흉내 낸 불을 포함하여 이후 만나 온 드라이어드들의 공격 방식을 흉내 낸 불이 대부분 이에 속했다.
애쉬를 흉내 내는 몬스터들 또한 몸을 응축하여 폭발적인 힘을 내는 방식을 택했는데, 몸집이 작은 만큼 무리에 섞여 있으면 잘 눈에 띄지 않는 데다 잠깐이라도 캐치하는 게 느려진다면 본진에 큰 피해를 줄 수 있는 기술을 쓰곤 했다.
밀려오는 몬스터들을 막는 웨이브 콘텐츠를 플레이할 때면 유의해야 할 점이 있었다. 모든 몬스터들이 동일한 수준을 가지고 있다면 화력으로 밀어붙이면 되지만, 간혹 웨이브 사이사이 유독 신경 써서 살펴야 할 특수 몬스터가 소수 껴 있는 경우가 있었다.
자폭을 해서 큰 피해를 주는 몬스터나 주변의 다른 몬스터들에게 회복과 버프를 주는 몬스터나 먼저 처리하지 않으면 다른 몬스터들 역시 죽지 않는 경우 등이 속했다.
애쉬가 아낌없이 몬스터들의 멘토가 되어 준 탓에 우리 전투에도 특이점이 생기고 말았다.
90번대 이후의 지역들은 모험을 하는 드루이드들의 발길이 끊긴 지 오래 지난 데다 대부분의 생태계가 망가져 사라졌기 때문에 불이 무언가를 모방하기에는 좋은 환경이 아니었다. 주변엔 살아 있는 생명체가 없고 자신들과 같은 몬스터들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수가 미친 듯이 많아 몰려오는 것과 저들끼리 뭉쳐 레벨이 상당히 높아진 것 외엔 의외로 전투 방식이 단순해서 밀어붙이는 게 가능했다.
공략대로 처리해야 했던 마차 형태의 불이나 하늘을 날아다니며 성가시게 했던 비행형 불도 없으니 101번째 테라리움으로의 진입만을 노린 채 밀고 들어가면 됐는데, 이젠 변수가 생겼다.
애쉬를 모방한 불을 우선적으로 처리하지 않으면 드라이어드들이 공격에 휩쓸렸다.
메스키트나 가막살나무는 그 공격을 버틸 수 있지만 다른 공격형이나 지원형 드라이어드들은 한 방만 제대로 맞으면 꽤나 치명적이었다.
“저쪽은 내가 맡을게!”
포인세티아가 일부러 애쉬를 모방한 불이 있는 곳으로 뛰어가며 말했다. 그녀에겐 일시적으로 무적이 될 수 있는 겨울눈의 방이란 기술이 존재했다. 적 무리에 뛰어들어 무적 상태가 되어 기술을 먼저 빼게 만든 후 다른 딜러들에게 불의 위치를 알려, 다음 기술이 오기 전까지 해치울 수 있도록 틈을 만들었다.
시들링은 물론 내 드라이어드들이 대부분 실전 경험이 뛰어난 드라이어드들이라 다행이었다.
데이지는 큰 공격이 올 때 뛰어난 반사 신경으로 재빨리 회피하는 것이 가능했지만, 회피할 안전지대가 없다면 위험해질 수밖에 없었다. 애쉬를 모방한 불이 많아진다면 데이지의 손발이 묶이는 거나 다름없었기에, 그녀는 바곳과 함께 움직였다.
광범위 공격이 가능한 바곳이 미리 약속된 구역만 집중적으로 공격한다면 데이지는 그 구역으로만 발을 빼면 되는 일이었다.
애쉬가 여러모로 민폐를 끼치고 있으나 그만큼 드라이어드들은 빠르게 대처를 했다. 그래도 그가 멋대로 굴도록 내버려 둘 순 없었다.
“인페르노가 자신들의 수장이 불의 공격으로 죽었다는 걸 알면 참 좋아하겠어?”
나보다 훨씬 몸집이 큰 그를 부축해 옮기는 것도 한두 번이지, 내가 계속해서 위험에 노출되는 건 좋지 않았다. 시들링은 직접 전투에 뛰어들어 드라이어드들과 함께 싸우고 있기 때문에 그의 힘을 빌릴 순 없었다.
무엇보다도 내가 아무렇지도 않다는 걸 그에게 보여 줘야 그가 안심하고 전투에 임할 수 있기 때문에 애쉬와 나 사이에서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갈등을 숨기기 위해 노력했다. 그를 직접 부축해 옮기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내 체력에도 한계가 있기 때문에 도망갈 힘까지 소모하면서 그를 보살필 순 없었다.
“내가 그들에게 너의 최후에 대해서 말해 줄게. 제멋대로 뛰어다니다가 불타 죽었다고. 너 같은 망나니에게 아주 걸맞은 최후 아니야? 이번에도 먼저 튀어나가 민폐를 끼친다면 정말 그 자리에 내버려 둘 거야. 지금 네 곁에 있는 건 네 뒤치다꺼리나 해 주는 부하들이 아니야! 협력이란 걸 배워! 어차피 여기까지 온 이상 제 발로 빠져나가지도 못할 거 아니야?”
그의 멱살을 잡고 흔들며 소리쳤다. 압도적인 공격력만 있다면 막연히 제 역할을 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합이 맞지 않는 사람이 껴 있는 파티는 무너지기 딱 좋았다.
“입이 있다면 말을 해!”
“…….”
결국 애쉬는 오만상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