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난쟁이들이 폰에서 꾸역꾸역 나올 타이밍이었다. 하지만 역시나 걱정했던 대로 잠잠했다. 폰을 들고 있는 날 바라보는 애쉬의 표정이 굳었다. 마치 내게 뭘 하고 있냐고 묻는 듯했다.
“잠깐만….”
굉장히 당혹스러웠다. 못 이기는 척 나오는 난쟁이가 단 하나도 없었다.
“이전엔 서로 가겠다고 성화였잖아.”
순진한 얼굴로 멀뚱멀뚱 나만 바라보는 수많은 난쟁이들을 향해 말했다. 그들이 내가 다이아를 가져가지 않을 때를 제외하고 명백히 거부의 의사를 표하는 것은 처음이었기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난감했다.
“이런 적은 처음인데….”
“무슨 꿍꿍이인지는 모르겠지만 하는 꼴이 웃기니 계속 해 봐.”
애쉬가 비아냥대며 내게 말했지만 민망한 마음보단 난쟁이들의 행동에 대한 걱정이 앞섰다.
“대체 왜 그러는 거야?”
내 말에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던 난쟁이들이 일제히 입을 열었다.
[주인님! 주인님이 걱정하시잖아요!]
머리를 망치로 세게 맞은 기분이었다. 내 걱정은 난쟁이들에게까지 전염되었던 것이다. 애쉬가 자신에게 온 난쟁이를 잘 대해 주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걱정, 괴롭히면 어쩌나 하는 근심 등이 난쟁이들에게 전해져 그들 역시 애쉬를 꺼리게 되었다는 말이었다.
“내가 걱정하는 걸 너희도 느꼈다고….”
난쟁이들의 성향은 내 행복이 곧 자신들의 행복이었다. 내가 이 세계의 신이 되려 하는 것과 별개로 난쟁이들의 세계에서 난 이미 신이었다.
아주 간단하면서 직관적인 이유였다. 내가 난쟁이를 애쉬에게 보내는 걸 못마땅해하니 그들도 가는 것을 원치 않는다.
“내가 그동안 봐 왔던 네 모습으로….”
그렇다면 나는 더 이상 난쟁이들을 설득할 수 없었다.
“네가 정령들을 해코지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품었어. 그래서 내 감정을 알아차린 정령들이 네게 가는 것을 꺼려 하고 있어. 모습을 보이는 것도 원치 않을 만큼.”
내가 바뀌지 않았는데 작은 아이들에게 바뀌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네게 정령들은 꼭 필요한 존재야. 하지만 당장은 네게 그 정령을 소개해 줄 수가 없을 것 같네….”
이제야 민망해졌다. 결국 또 내 감정이 문제를 일으켰다.
세계수가 싫어하는 자를 가려 드라이어드 열매를 주지 않기라도 하던가? 모든 드루이드에게 공평하게 드라이어드를 내릴 뿐만 아니라 줬던 걸 취소하고 거둬 가지 않는다. 그자가 얻은 드라이어드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영혼의 연결을 끊어 버릴 만큼 매몰찬 사람이라 할지라도.
난 세상 밖으로 나오고자 하는 베스탈리스들에게 내 난쟁이들을 나눠 줘야 했다. 그건 의무에 가까웠지만 신이 되려 한다면서 치졸한 인간성마저 버리지 못할 만큼 한참이나 모자란 사람이었다.
내 말에 애쉬는 꽤나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정령을 해코지할지도 모른다는 내 말에 딱히 반박하지도 않는다. 자신조차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 판단한 게 아닐까?
“네가 생명을 함부로 해치지 않을 거란 확신이 내게 생기지 않는 한….”
“그렇다면 난 반쪽짜리 인간이 되는 거겠네. 네가 말했잖아. 그게 없다면 난 힘을 사용하고 매번 네게 치유를 받아야 한다고. 제법 나쁘진 않지만….”
그는 별안간 시들링을 향해 기분 나쁜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아니 오히려 즐겁겠네. 내게 평생 붙어 있는 거야. 해결되기 전까지.”
“끔찍한 소리 하지 마.”
폰을 집어넣고 등받이에 한껏 기댔다.
“그럴 마음은 추호도 없어. 그러니 네가 노력해야지. 반동이 걱정 되서 힘을 맘껏 사용하지 못해도 답답하게 여기지 않을 거라면 스스로에게 제약을 걸든가. 네게 걸린 제약을 상당 부분 해소해 주겠다는데 어떠한 협조도 하지 않겠다면 곤란해지는 건 너야.”
“나보고 어쩌라고?”
나는 이마가 지끈거리는 걸 느끼며 눈을 감았다.
“내가 아는 넌, 그동안 봐 온 넌, 생명을 전혀 존중하지 않는 인물이야. 서슴없이 파괴하는 잔혹한 성정에 피를 나눈 자에게도 가차 없지. 그런 너에게 내가 아끼는 걸 내어 줄 마음이 쉽게 들겠어? 네 손엔 이제 오로지 파괴만 할 수 있는 무기만 있는 게 아냐. 누군가를 돕고 살릴 수 있는 무기가 쥐어져 있어. 무기가 바뀌었으니 그걸 쥔 너도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이젠 네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이 넓어졌잖아.”
바라는 미래가 명확한 스텔라와 달리 애쉬는 아직까지 수수께끼였다.
그가 베스탈리스들이 지배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계획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안다. 그걸 갈구하는 이유가 어떤 궁극적인 목표에서 기거하는지 알 수 없을 뿐. 복수? 단순한 파괴 욕구? 지배하려는 욕망?
스텔라가 원했던 건 자신이 영웅이 되는 길이었다. 모두가 우러러볼 수 있는 밝은 세상의 영웅. 기회만 있다면 자신도 남을 구원할 수 있는 길을 걷고 싶어 했다.
베스탈리스 출신인 자신이 영웅이 된다면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편견이 희석되고 그 뒤를 다른 베스탈리스들도 따라 걸을 수 있을 거란 희망을 품었었다.
“넌… 어떤 미래를 꿈꾸고 있어…?”
그래, 우린 먼저 이걸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었다. 내가 가려는 길에 애쉬도 함께 데려가려 한다면 우리 사이엔 심도 있는 대화가 필요했다.
“이제 너에겐 드라이어드와 마찬가지로 불을 해치울 수 있는 힘이 있잖아. 그 힘을 이용해 뭘 할 거야? 뭘 하고 싶어? 그 힘을 사용해서 네가 어떤 미래를 만들 수 있을 거라 생각해?”
그동안 난 베스탈리스들에게 가장 이상적이며 밝은 미래를 제시해 주기만 해 왔다. 그건 결국 그들 본연의 꿈이라기보단 어느 정도 내 소망이 담겨 있는 거나 다름없었다.
어쩌면 어떤 베스탈리스는 정화의 힘을 손에 넣고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조용히 사는 것을 바랄 수도 있다. 거창한 미래 같은 것보다 누구에겐 그저 평온하고 안일하고 조용한 삶이 거창한 미래가 될 수도 있는 거니까.
그러니 정말 정화의 힘으로 세상을 구하는 모험가가 되고자 한다면 그들 스스로 그런 꿈을 꾸며 계획을 세우고 이를 실천하는 것이 중요했다.
꿈이 빛나기 위해선 그 꿈을 직접 스스로 몇 번이고 갈고 닦아야 했다. 자주 들여다보지 않는 꿈은 막연해져 어느샌가 희미해진다. 생생하게 꿈꿀수록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하지 않는가?
애쉬를 상대로 다른 베스탈리스들에게 했던 것처럼 영웅이 되라고 강요하는 건 무의미할지도 모른다. 그 스스로가 그 꿈을 확립하고 소망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글쎄, 아무것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는 금방 지루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정화의 힘을 막 손에 넣은 스텔라의 얼굴은 빛이 났었다. 눈빛이 햇살처럼 반짝거렸었다. 반면 애쉬는 오히려 더 어두워진 기분이다. 그는 마치 시작도 전에 기대를 버리고 포기한 사람 같았다.
어떤 사람들은 미리 포기하는 것이 편한 환경에서 자라 왔다. 꿈이 사치인 환경에서 자란다면… 그 상황에서 가장 고르기 쉽고 직관적인 꿈을 대충 짚게 되겠지.
“그런 힘을 알아 봤자 내가 할 일은 변하지 않아. 아, 불을 빨리 해치울 수 있다는 장점은 생겼네.”
사람은 모두 선하지 않다. 선한 힘을 가졌어도 악하게 사용하는 사람도 많다. 세상을 구원하라는 사명을 가진 드루이드 중에서도 드라이어드의 힘을 악용하는 자들도 많지 않은가?
하지만 선하게 변할 수도 있다는 믿음은 있다.
“혹시 스텔라가 네게 꿈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 있어? 꿈에 세계수가 찾아온 이야기 말이야.”
그리고 내게서 더 그 믿음을 부추기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건 스텔라와 마찬가지로 애쉬에게도 찾아온 세계수의 계시 때문이다.
“네가 나보다 내 어미와 친한 것 같은데?”
그 말은 모른다는 뜻에 가까웠다. 스텔라가 애쉬를 낳았던 시점엔 이미 세계수에 대한 믿음이 사라진 후였던 걸까?
“예전에 60번째 테라리움에서 너를 처음 치료했을 때, 네 과거를 엿봤어. 정확히는 네가 들었던 누군가의 목소리를 나도 들은 것뿐이지만. 네게 빛이 될 거라고 말했던 것 기억나?”
세계수는 스텔라의 꿈에 찾아와 말했던 것처럼 애쉬에게도 빛이 될 거라 말했다. 그리고 그 빛을 알아볼 자가 후에 나타날 거란 것도. 난 그게 애쉬가 훗날 나의 동료가 될 거란 예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본래 스텔라가 현역으로 활동할 시절 내가 이 세계에 도착했어야 했다. 그리고 예정대로라면 스텔라는 나와 모험을 함께하는 동료가 되었겠지.
하지만 시대가 변했고 그 계시가 나와 또래인 애쉬에게로 내려갔다고 보고 있었다. 스텔라나 애쉬, 둘 다 베스탈리스 세계에선 아주 중요한 인물들이었다. 가장 큰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자들이란 뜻이었다. 그러니 명백히 내가 주요하게 공략해야 할 인물도 그 둘이었다.
“그런 적이 있었나? 기억에 없는데.”
“…….”
스텔라는 어릴 때 들었다던 그 목소리를 지금도 잊지 못했다. 하지만 애쉬는 잊었다. 그다지 마음 쓰지 않는 일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정말 어렵네.”
결국 나 스스로 그가 선하게 변할 거란 믿음을 찾아내야 할지도 모른다.
애쉬는 마치 겨울눈 속에 몸을 숨긴 스노우 필드의 드라이어드와 같았다. 불과 같은 그를 차디찬 환경의 드라이어드에 빗대는 것이 우습지만, 내게 일말의 속내를 내비치지 않는 걸 달리 표현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건 없을 거야.”
그가 처음으로 불을 물리쳤을 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 무슨 마음으로 불을 해치웠을까?
그동안 자신의 힘으로 이기지 못한 것에 대한 해방감? 복수? 정복감?
그는 정말 자신의 힘으로 해치운 불을 보며 어떠한 희망도 얻지 못한 걸까?
“드루이드님들.”
한참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마부가 우릴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죄송하지만 운전은 여기까지만 가능할 듯합니다. 이 이후론 돌아가는 일이 걱정이기에 곧 도착할 테라리움에서 모두 내려 주셔야겠습니다.”
“아, 알겠어요. 감사했어요.”
일반 마차가 운영되는 마지막 지점까지 도착했다. 그 이상 갈 수 있는 마차는 테라리움이나 길드의 비호를 받아 특수하게 운영되는 마차들뿐이었다.
89번째 테라리움과 90번대 테라리움이 망한다면 그다음으로 위험한 곳일뿐더러 이젠 대부분의 상회들이 물자 이송마저 꺼리는 곳이었다. 101번째 테라리움이 멸망한 지금, 그곳에 가려는 마차는 단 한 대도 없을 것이다.
다만 1번째 테라리움의 소집령 이후 90번대 테라리움을 향한 전력 지원 정책이 생겨서 병력을 이송하는 군용 마차는 이용할 수 있었다. 그걸 이용해도 92번째 테라리움에 도착하기 전에 내려야 했고 101번째 테라리움까지는 얄짤없이 걸어가야 함을 뜻했다.
전부 각오한 일이지만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어렵사리 군용 마차로 갈아타고 시간이 빠듯하여 곧바로 이동했다. 그리고 마침내… 방어전이 한창인 90번대 테라리움을 목도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