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히 수장 자리를 얻은 건 아니라는 건가….”
힘의 위력이 마치 내 드라이어드가 그래프트를 펼쳤을 때와 같았다. 삽시간에 적을 압도하는 엄청난 위력. 그런 힘을 계속해서 사용할 수 있다면 애쉬는 가히 스페셜 등급의 드라이어드와 동급이라고 볼 수 있었다.
주변이 모두 새까만 재가 되었다. 애쉬가 사용한 기술의 여파에 휘말리지 않도록 거리를 두어야만 했는데, 멀리서 바라보는 전방의 모든 풍경이 하늘을 제외하고 새까맣게 변해 있었다.
다 좋은데 2차 피해가 너무 컸다. 적이고 아군이고 가리지 않고 태워 버리니 곤란했다.
드루이드끼리는 스톤헨지 모드로 팀을 맺으면 아군으로 인식되어 서로의 공격에 피해를 입지 않게 된다. 그런데 베스탈리스들에게도 그런 개념이 존재하는지 모르겠다.
스톤헨지는 드루이드들이 집결하는 성소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글을 본 적이 있었다. 그래서 드루이드들이 게임 속에서처럼 파티를 맺는 형태와 드루이드들로 이루어진 길드가 거점으로 사용하는 곳 모두 스톤헨지라고 불렸던 것이다.
그렇기에 스톤헨지 모드는 드루이드들만이 사용할 수 있다고 볼 수 있었다.
베스탈리스들이 협동을 할 때 우리처럼 특정 형태를 취하는 건 본 적이 없었다. 설령 모녀 사이라 할지라도 모친 쪽이 사용한 불꽃에 자식이 피해를 입는 모습을 봤다.
막 정화의 힘을 일깨운 에트나가 과하게 흥분한 나머지 힘을 주체하지 못했고, 곁에서 한눈 팔고 있던 포르낙스의 옷자락을 태워 먹고 말았다. 또한 베스탈리스들을 적으로 만났을 때, 그들은 서로의 능력에 피해를 입지 않도록 간격을 넓게 두고 서는 포메이션을 취했었다.
베스탈리스들 사이에서 스톤헨지 모드와 같이 아군은 서로에게 해를 입힐 수 없다는 초월적인 계약이 성립되지 않는 한, 집단 전투의 효율이 많이 떨어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애쉬의 경우만 봐도 저 불꽃의 방향을 우리에게 돌리지 않는 것만으로 같은 편으로서의 역할을 다한 거라 볼 수 있으니….
“하아….”
몬스터 불을 전부 해치우고 후련한 표정을 지은 애쉬가 내 쪽을 향해 걸어왔다. 그런데 표정과 달리 몸은 상당히 지쳐 보이는 듯했다. 그 모습을 보고 어렴풋이 그가 힘의 반동을 겪고 있음을 깨달았다.
애쉬에게 난쟁이가 없다는 사실은, 그가 힘을 사용했을 때 이를 복구해 줄 장치가 없다는 걸 뜻했다. 에트나가 힘을 사용하면 그녀의 아티팩트에 있는 난쟁이가 곧바로 신이 난 표정으로 영혼 속 오염된 부위의 결정을 캐낸다. 반면 애쉬는 그 결정이 제거되지 않고 계속 쌓이는 것과 같았다.
그는 에트나가 흥분하여 폭주할 때보다 훨씬 더 거대한 힘을 막 사용했다. 그리고 탈진한 것처럼, 무더위에 잡아 먹힌 사람처럼 흐느적대며 갈구하는 눈빛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에트나의 영혼을 복구하는 데엔 난쟁이 하나로 충분히 커버가 됐다. 애쉬는… 몇이나 필요하려나?
“무리하면 안 된다는 걸 방금 깨달은 것 같은데.”
“…….”
“그래서 새로운 힘을 사용한 기분은 어때? 아직도 내가 널 속여 먹는 사기꾼으로 보여?”
“입 다물고 날 도와주는 건 어떤가 싶은데. 귀찮다면 내가 그쪽으로 갈게. 손이나 잡게 해 줘.”
끝까지 날 죽일 기세로 의심했던 일에 대해 사과하지 않는다.
털썩, 기진맥진한 그가 내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힘이 빠져 저도 모르게 꿇은 모양새라 조금은 고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베스탈리스도 불을 해치울 수 있어.”
직접 제 눈을 확인했으니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게 뭘 의미하는지 너는 잘 알 거라고 생각해.”
내 손을 태워 버릴 기세로 뚫어져라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져 할 수 없이 낮아진 그의 머리 위로 손을 올렸다. 스스로 제어하지 못해 흘러나오는 열기가 가득 느껴졌다.
“아주 많은 것이 바뀔 수 있다는 걸 의미하지. 그리고 난 그 변화를 앞장서서 이끌고 싶어.”
샘의 기운을 끌어 올려 그의 망가진 영혼을 훑는다. 잠깐 사이에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다.
좀 전엔 드라이어드로 치면 그래프트를 계속해서 쓸 수 있는 베스탈리스들이 금방 드루이드의 위치를 추월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었는데, 조금 수정해야 될 것 같다.
반동이 상당해서, 그래프트를 쓰기 위해선 교감도를 끌어 올려야 하는 조건이 붙듯 베스탈리스 또한 나름의 제약이 있는 셈이었다.
다만 드라이어드와 친해지면 그래프트 사용 주기를 앞당길 수 있듯 베스탈리스 또한 난쟁이들과 친해지면 제약을 많이 완화시킬 수 있긴 했다.
“베스탈리스들은 더 이상 베스탈리스라는 이유만으로 숨어 지내지 않아도 돼. 오히려 자신이 베스탈리스임을 자랑스레 내보일 수 있는 시대가 올 거야.”
“…….”
“드루이드처럼 의뢰를 받고 어디서나 필요로 하고….”
“그만. 베스탈리스도 아닌 너에게서 그런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아.”
날이 선 목소리에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는 내가 주제넘는다고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평생 베스탈리스로 살아온 그와 달리 나는 외부인에 불과했으니까.
“그래. 그럼 너 혼자 많이 생각해라.”
힘을 마구잡이로 사용한 만큼 영혼의 손상도가 꽤 심했기에 복구하는 덴 제법 시간이 걸렸다.
전투를 끝낸 우리는 다시 마차를 타고 달렸다. 이 정도 속도라면 이틀을 꼬박 밤을 새우며 달린 후에야 간신히 101번째 테라리움에 도착할 것 같았다.
“네가 힘을 사용한 후 매번 꼬박꼬박 내게 치료를 받지 않아도 되는 방법이 있어.”
마차에 탄 이후로 생각에 잠긴 얼굴로 창밖만 바라보던 그가 곧바로 내게 고개를 돌렸다.
“내가 매번 힘을 사용한 베스탈리스 곁에 붙어 있을 순 없는 노릇이잖아? 적어도 베스탈리스들이 독립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게 보장되어야 드루이드들처럼 의뢰도 맡고 모험도 떠나겠지.”
“요점만 말해.”
더 이상 베스탈리스의 삶에 대해 언급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것처럼 으르렁댔다. 그가 내게 적대감을 표할수록 옆에 앉은 시들링의 적대감도 덩달아 상승하여 마차 안의 분위기가 지독하게 무거워졌다. 숨이 막힐 정도로 답답했다.
이리스 파티 그리고 로웰라와 함께 화기애애하게 여행을 다니던 날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았다.
“자꾸 베스탈리스에 대해 언급하는 내가 위선적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난 오로지 선의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건 아니란 걸 알아 둬. 차라리 그렇게 생각하는 게 네게 편할 거야. 어쨌든.”
애쉬의 손목에 채워진 아티팩트를 바라보자 그 역시 내 시선을 따라 아티팩트를 바라봤다.
“그건 그냥 장식이 아니야. 지금은 제 구실을 못 하고 있어.”
“너희들은 이걸 통해 드라이어드를 불러내지 않나? 나도 드라이어드를 불러내라는 뜻인가?”
그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틀려. 그곳을 채워 주는 건 드라이어드가 아니라 다른 거야.”
정화의 힘의 핵심이 되는 난쟁이. 베스탈리스에게 난쟁이의 존재는 어쩌면 드루이드의 COST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좀 전에 애쉬가 과하게 힘을 사용한 후 탈진한 모습을 보면서 느꼈다.
드루이드의 힘은 드라이어드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많은 드라이어드를 얻거나, 강한 드라이어어드를 얻는 데는 COST가 많이 들었다. 즉 영혼의 크기가 커야 했다.
베스탈리스가 많은 힘을 사용하려면 그에 따른 반동을 억제할 수 있는 난쟁이들이 많이 필요했다. 애쉬 정도의 베스탈리스를 감당하려면 시작부터 난쟁이가 둘은 필요할 테다.
“베스탈리스의 영혼은 균열이 사라지지 않는 한, 그 너머의 미지의 불의 존재가 사라지지 않는 한 계속해서 오염될 거야. 나는 베스탈리스에게 정화의 힘을 심어 준 게 아니야. 그들은 본래부터 정화의 힘을 가지고 있었지만 오염을 통해 정화의 힘이 약해진 거야. 정화의 힘을 사용하면 할수록 지친 영혼은 오염에 잠식당하기 더 쉬워지는 것 같아. 그래서 네가 그렇게 지치게 되는 거지.”
그에게 다른 베스탈리스들에게 이미 설명했던 정화의 힘의 본질에 대해 차분히 이야기해 주었다.
“인페르노의 특정 부서의 이탈률이 높다고 들었어. 나는 지금 내가 하는 이야기들을 그들이 알게 되었고 그로 인해 정체성에 혼란이 생겨 이탈했다고 보고 있어.”
“조직 이야기를 전혀 상관없는 외부인이 알 정도라면 단속을 더 철저히 해야겠네. 나비 새끼지? 네게 주절주절 털어놓은 놈이.”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어쨌든 베스탈리스가 본연의 힘을 사용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존재가 있고 그 존재들은 네 손목에 채워진 아티팩트에서 머물며 언제 어디서나 함께하게 될 거야.”
애쉬가 아티팩트를 바라보는 눈빛이 조금 꺼림직하게 바뀌었다. 이는 다른 베스탈리스들 역시 초기에 보였던 행동이기에 그러려니 했다.
“정령과 같은 존재야. 그들은 아무런 대가 없이 네 영혼을 복구하는 걸 도울 거야. 아, 아무런 대가가 없다는 말은 조금 틀렸나? 그들은 노동하는 걸 굉장히 좋아해서 일하게 해 주는 것 자체를 보상으로 여기니까….”
난쟁이들은 정말 알쏭달쏭한 존재들이긴 하지. 곡괭이질 하는 걸 인생의 낙으로 삼으니까.
“그래서 그 존재들은 어디에 있는데?”
“흠….”
이 시점에서 조금 고민이 되었다. 애쉬에게 내 난쟁이들을 맡겨도 될지에 대하여.
콩알만 한 애들이 저렇게 포악한 주인 밑에서 괴롭힘을 당하진 않을지…. 다이아 캐는 것밖에 모르는 순박하고 착한 아이들인데….
아니, 그것보다 난쟁이들이 애쉬에게 가는 걸 거부하게 된다면 어떡하지?
사실 이게 가장 중요한 관건이긴 했다. 애쉬를 원하는 난쟁이가 단 하나도 없다면?
난 착잡한 마음으로 폰을 꺼냈다. 본래라면 기회를 틈타 제멋대로 핸드폰에서 빠져나와 자기를 어필해야 할 꼬맹이들이 잠잠했다.
무한 다이아 화면을 켜자 오늘도 열심히 행복한 표정으로 다이아를 캐고 있는 난쟁이들이 보인다.
[주인님! 다이아를 가져가실 건가요?]
그 대단한 스텔라에게도 엄청난 취업난을 보여 줬던 난쟁이들이 모른 척 내게 다이아에 대해서만 묻는다. 이로 인해 어떠한 걱정이 들었다. 드라이어드에게 호감도 시스템이 있듯… 혹시 난쟁이에게도 호감도 시스템이 있다면 어떡하지?
“소개할게. 내가 사역하는 작은 정령들이야.”
난 애쉬에게 핸드폰 화면이 잘 보이도록 들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