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101번째 테라리움으로 향하는 길에 애쉬의 동행이 확정되었다. 그는 내게 일꾼처럼 다뤄질 거란 것보다 나와 함께하면 내면의 열기를 잠재울 수 있다는 사실을 더 우선시한 듯했다.
애쉬를 조우한 건 막 해가 넘어가는 늦은 오후였기에 60번째 테라리움에서 마차를 빌려 어두워지기 직전까지 다음 장소로 달렸다.
흉악범인 애쉬와 함께 테라리움에서 묵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를 데리고 테라리움으로 데리고 가는 것 자체가 그곳의 행정 관리원에게 상당한 민폐였다. 그래서 101번째 테라리움까지 향하는 모든 과정에 야영이 필수가 되었다. 식사 또한 식당을 이용할 수 없기에 적당히 목 좋은 곳에서 비상식량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애쉬에게서 불만이 터져 나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그는 태연해 보였다. 애초에 그에겐 테라리움 내 시설을 이용하지 않는 것이 무척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던 것이다.
그래도 스텔라는 정체를 숨기고 고급 식당을 자주 이용하는 모습을 보여 줬는데 말이야.
“난 네가 불평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셋이서 넓은 바위에 등을 보인 채 걸터앉아 간단한 저녁 식사를 끝냈다. 조용한 분위기를 견디기 힘들어 나도 모르게 입을 열게 된다. 애초에 이 셋 중에 그나마 정상적인 대화를 이끌어 갈 수 있는 건 나뿐이었다.
“내가 불평을 한다라. 어떤 점에서 그렇게 말하는 거지?”
“조직의 수장이잖아. 우리로 치면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 급인 거고. 노숙을 달가워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거든. 적어도 마차에서 해결하려고 할 줄 알았지. 아니면 모습을 숨겨서라도 테라리움에 진입하자고 제의할 수도 있고.”
“흠.”
내 말을 들은 애쉬는 콧소리를 크게 내며 한쪽 눈썹을 삐죽였다. 잠깐 생각에 빠진 듯한 얼굴이었다.
“뭐 지금은 그런 것도 가능하겠네. 모습을 숨기고 테라리움에 들어간다라. 과거엔 내 모습을 숨기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으니까.”
그에게서 터져 나오는 열기는 그의 시그니처나 다름없어서 멀리서도 주변의 온도만으로 그가 오고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였다. 더구나 주렁주렁 매단 제어 액세서리들까지 있으니 워낙 눈에 띄어서 숨기기도 힘들겠지. 하지만 이젠 아니었다.
“재밌겠네.”
“행여나 다른 테라리움에 피해를 줄 상상을 하고 있다면 그만둬. 수틀리면 네 초상화를 온 테라리움의 소식지에 뿌려 버릴 테니까.”
영양가 없는 말을 주고받으며 거의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언제든 불의 습격을 받을 수 있다는 위험 때문도 있었지만 아직 애쉬를 완전히 신뢰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잠을 제대로 자지 않은 건 다른 둘도 마찬가지였다. 시들링은 보초를 서겠다고 우직하게 고집을 부렸는데 아마 나처럼 애쉬를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반면 애쉬는 어찌 그리 밤 산책을 자주 나가던지, 틈만 나면 주변을 휘적휘적 돌아다니며 신경을 더욱 곤두서게 만들었다.
뒤 번대를 모험하면 어김없이 불의 습격을 받게 된다. 날이 밝고 마차가 출발했음에도 좀처럼 속도를 내지 못하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축복의 불균형 탓인지 불의 위협이 더욱 거세게 느껴졌다. 꼭 주변 사냥터의 레벨대가 급속도로 상승한 것처럼 말이다.
전투가 벌어질 때마다 난 애쉬가 불의 전투에 어떻게 임하는지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기존에 만났던 정화의 힘을 얻기 전의 베스탈리스들은 불을 완전히 해치울 수 없으니 후퇴하는 전략을 취해 왔었다.
애쉬의 파괴적인 힘은 우리들에게나 강하게 작용하지, 어떻게 보면 몬스터 불에게는 그다지 영향력을 많이 끼칠 수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더구나 같은 속성의 불의 힘이니까.
물론 지금의 애쉬는 영혼 내 필터를 한 번 손봤기에 이론적으론 불을 해치울 수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난 그에게 정화의 힘에 대해 제대로 알려 준 적이 없었다. 그러니 그는 의식적으로 그 힘을 발휘할 수 없는 상태나 다름없었다.
불과 마주쳤을 때 애쉬는 다른 베스탈리스들처럼 곧바로 전투를 피하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호전적인 성격답게 상성상 열세이면서도 맞서는 것이다. 그는 먼저 자신과 불 사이에 장애물을 만들었다.
지반을 파괴하거나 흙이나 돌을 튕겨 불이 곧바로 자신을 향해 올 수 없도록 막는다. 당연하지만 그는 전투에 불을 사용하지 않았다. 사용해 봤자 통하지 않는다는 걸 오랜 세월 동안 겪어 왔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전투는 의미 없는 소모전만 지속되었다.
애쉬의 곁엔 따르는 부하들이 많았다. 특히나 인페르노엔 베스탈리스 외에 드루이드들도 존재했는데, 아마 불과의 전투가 발생하면 드루이드인 부하가 처치에 나섰을 것이다.
조금 아이러니한 일이기도 했다. 인페르노엔 드루이드를 좋아하지 않는 자들이 많을뿐더러 드루이드가 다루는 드라이어드를 하등하게 여기는 자들도 많았다.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이 그 증거였다.
그런데 몬스터 불과의 전투처럼 어쩔 수 없는 경우엔 결국 드루이드의 힘을 빌리게 된다. 이런 경우가 없었다면 인페르노는 드루이드를 더 험하게 대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애쉬가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기술을 펼쳐 불의 기세를 줄이고 나면 시들링이나 내가 드라이어드의 힘을 이용해 불을 완전히 퇴치하는 전투가 길게 이어졌다.
일련의 과정 끝에 애쉬는 정화의 힘에 대해 완전히 모르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베스탈리스들에겐 불을 정화할 수 있는 힘이 있어.”
“허?”
그는 무슨 헛소리를 하냐는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네가 내게 치유를 받은 이후 한 번이라도 불을 상대로 네 힘을 사용해 봤다면 알았을 텐데.”
그렇기에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한 번이라도 불을 사용해 봤다면 평소와 무언가 다름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영혼을 치유 받은 베스탈리스들은 몬스터 불을 상대로 제 힘을 평소처럼 펼쳐 수월하게 전투를 끝내왔다.
의식해서 힘을 사용하지 않아도 힘의 속성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불에 불로 맞서라고?”
“못 믿겠으면 직접 사용해 보든가.”
애쉬의 얼굴이 점차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내게서 모욕적인 말을 들은 것처럼 말이다.
“네가 믿지 못하는 걸 이해해. 불을 상대로 네 힘을 사용해 봤자 아무 소용도 없다는 걸 수없이 겪어 봤으니 알겠지. 하지만 확실하게 말해 줄 수 있는 건, 너의 힘은 나로 인해 이젠 완전히 달라졌다는 거야. 드라이어드가 힘을 사용해 불을 퇴치할 수 있듯 베스탈리스도 자신의 힘으로 불을 퇴치할 수 있어. 난 그걸 정화의 힘이라고 부르고 있고.”
“놀리려는 거면….”
“널 놀려서 뭐 하게? 그리고 날 그런 사람으로 봤다면 실망스러운데. 네가 사람 보는 눈이 완전 쓰레기라는 뜻이니까.”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그는 내가 나를 위해 일하라는 소리를 했을 때보다 더욱더 기분 나빠하고 있었는데, 그 점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정 못 믿겠다면.”
믿지 못하겠다면 강수를 두는 수밖에 없었다. 불을 해치우고 나아가자 또다시 불이 우릴 반겼다. 새파란 초목이 자라고 생명이 가득한 곳을 탐하기 위해 꾸역꾸역 밀고 들어오는 불은 마치 걸신들린 아귀와 같았다.
“너 알아서 해치워.”
나와 시들링은 애쉬를 서포트해 주는 걸 중단해 버렸다.
애쉬의 성격상 전투를 피해 도망갈 자가 아니었다. 애쉬가 쓰러져야 끝나는 의미 없는 싸움이 쭉 지속될 뿐이었다.
“직접 해치우라고.”
“…….”
마치 날 죽이고 싶다는 눈빛을 목격했다.
그저 힘을 한번 사용해 보면 될 텐데. 열기를 내뿜어 보는 게 뭐가 그리 어려운지.
“해 보라고!”
결국 애쉬가 이를 갈며 검을 집어넣었다. 그러곤 몬스터 불을 향해 손을 뻗었다.
“장난이라면 널 머리부터 발끝까지 태워 숨만 붙여 둔 상태로 만들 거야.”
드디어 그의 손끝에서 새빨간 불꽃이 피어올랐다. 그가 힘을 끌어 올리자 그렇지 않아도 몬스터 불로 인해 뜨거운 주변의 온도가 더욱더 상승하기 시작했다.
작은 불꽃은 점점 그의 팔을 휘감을 정도로 커졌으며 마침내 과거 우릴 향해 무지막지하게 쏘아대던 대로 공격을 퍼부었다. 시험 삼아 해 보는 행동 따윈 없었다. 그저 분노를 담아 장전, 발사였다.
수없이 경험해 봤을 거다. 그리고 수없이 깨달았겠지.
베스탈리스의 불은 세상에서 가장 위협적인 존재들을 해치울 수 없다는 것을. 오히려 몬스터 불에 섞여 들어가는 자신의 불꽃을 보며 좌절했을 것이다. 동류의 불꽃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좌절감.
이로 인해 베스탈리스는 그 자리에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아니 숨어들 수밖에 없었다.
“어때? 내 말이 맞지?”
몬스터 불에 애쉬의 불꽃이 닿자 완전히 녹아내리더니 도리어 흡수당했다. 물론 현재 몬스터 불의 크기가 상당히 커서 일부만을 해치운 꼴이지만, 애쉬 역시 제 힘을 완전히 펼친 것은 아니었다.
“해치울 수 있을 것 같지?”
“어떻게… 어떻게 이게 가능하지?”
이젠 가능하다. 베스탈리스에게 드라이어드와 마찬가지로 불을 해치울 수 있는 힘이 있으니까. 세상에서 가장 위협적인 존재들에게 맞설 수 있는 건 이제 드라이어드뿐만이 아니었다.
불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는 걸 확인한 애쉬에겐 더 이상 거리낄 것이 없었다. 그는 온몸이 화염에 감싸일 정도로 막대한 힘을 끌어 올리기 시작했다.
익히 본 적이 있는 지상에 뜬 태양이었다. 테라리움에서 그를 쫓아내는 방법으로만 파훼할 수 있었던 파괴적인 공격 스킬. 그 공격이 이젠 전면에 득실대는 몬스터 불들을 향해 있었다.
적일 땐 최악이나 아군일 땐 더없이 든든한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