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째, 대가를 원한다면 날 위해 일을 해.”
“바라는 게 참 많네.”
감히 누굴 부려 먹냐는 투였다. 물론 저 제약들을 다 던져 버리고 그와 가까이하지 않는 게 최선이지만 스텔라를 위해 시간을 벌어줄 필요가 있었으므로 참아야만 했다.
“내게 인페르노의 활동을 멈추게 만들라 명령하고.”
뚜벅, 날이 선 목소리와 함께 그가 나와 한 발자국 가까워졌다.
“하염없이 너만 기다리라고 명령했지.”
뚜벅, 마치 날 죽이고 싶다는 분노와 함께한 발자국 더 가까워졌다.
“부하들이 보는 앞에서 날 모욕해도 넘어갔고.”
우리 사이의 거리는 불과 보폭의 반도 되지 않았다. 조금만 손을 뻗어도 닿을 거리에 서서 살기를 가득 띤 얼굴이 날 내려다봤다.
“미처 숨통을 덜 끊은 내 어미도 가져가도록 내버려 뒀고 말이야.”
“스텔라가 살아 있다는 걸 알고 있구나.”
“그렇게 해서 죽을 위인이었으면 진작 죽였지. 그 할망구는 왜 데려간 거야?”
스윽, 애쉬가 허리를 숙이자 그의 붉은 머리칼이 쏟아져 내려 내 볼을 간지럽혔다. 얼굴이 지나치게 가까웠다.
“여태껏 내 기분을 망쳐 놓고 살아남은 사람은 없었어.”
“네가 기분에 따라 사람에게 폭력을 가하고 심하면 죽이기까지 하는 인물이란 건 스텔라에게 들었어. 넌 정말 사회악이야.”
번뜩이는 그의 눈을 피하지 않고 마주 봤다. 눈빛이 나를 녹여 버릴 것처럼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한여름의 뙤약볕 같은 더운 향이 그에게서 풍겨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려 줄게. 네 말을 들어줄게. 네가 있어야 내가 평화로워지니까.”
그날, 내 앞에 개처럼 납작 엎드려 샘의 기운을 갈구하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제 안에서 날 뛰는 열기를 잠재워주자 순종적으로 변한 야차의 모습이.
“떨어져.”
그를 밀어내려 했으나 몸뚱이가 바위처럼 단단해 도리어 내가 밀려났다. 밀려난 내 모습이 웃겼는지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제이가 떨어져 나가며 체력이 리셋되지만 않았어도 이 정도는 아니었을 텐데!
“그래서 무슨 일을 시키려고? 난 섬세함과는 거리가 멀어서 잡일이나 시킬 거면 좋은 결과물은 기대하지 않는 게 좋아.”
“101번째 테라리움으로 갈 거야.”
잘 나불대던 그의 입이 뚝 다물렸다. 무슨 헛소리를 하느냐는 표정이었다.
“거기서 널 좀 부려 먹으려고.”
“내가 잘못 들었나? 101번째 테라리움이라고? 거기 얼마 전에 망하지 않았나? 아, 이번엔 우리 쪽에서 손대지 않았어. 네가 얌전히 있으라고 했으니 아무 짓도 안 했다고.”
“누가 뭐래? 거긴 불에 의해 망했어. 너희가 해 먹은 테라리움이 여럿 있는 걸 잘 알고 있지만 지금은 그 죄를 물을 때가 아니니 넘어가겠어.”
문득 애쉬에게 그날 ‘얌전히 있어.’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페르노는 틈틈이 테라리움들을 노려 왔다. 제2의 파라다이스 건설을 위해서나 본거지로 쓰거나 여러 이유로….
101번째 테라리움이 망하며 축복의 균형이 깨진 지금, 위태한 테라리움이 한두 곳이 아니었다. 고위험군 리스트에 오른 90번대 테라리움이야 말로 인페르노의 좋은 먹잇감이 될 수 있었다. 불의 침입을 구실로 뒤에선 자기들이 꿀꺽해 버릴 수도 있고.
“그곳에서 해야 할 일이 있어. 하지만 이미 세계수의 축복이 사라진 곳이라 아주 위험하겠지. 공략을 도와줄 사람이 필요해.”
“그곳에 가는 게 이 셋이 전부라고?”
애쉬가 건성으로 나와 시들링을 가리키며 코웃음을 쳤다.
“자살하러 가는 거야?”
“나도 강하지만 시들링도 아주 강해. 그리고 애초에 널 데려갈 생각으로 다른 사람은 더 데려오지 않았어. 네가 해를 끼칠 수도 있으니 최소한의 인원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한 거지.”
“넌… 그래, 뭐. 그렇다 치고.”
날 빤히 바라보던 애쉬가 바로 시들링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건 나만큼 강하다고 생각 안 하는데?”
씨익 올라가는 입꼬리가 불길하게 느껴졌다. 아차 하는 순간, 애쉬의 다리가 시들링을 향해 뻗어 나갔다. 쾅! 하는 커다란 소리와 함께 둘이 부딪혔다.
함부로 손을 대지 말라는 조건에 시들링을 포함시키지 않은 것이 실책이었다.
파필리온을 무자비하게 팼던 발이 시들링에게 쏘아지고 있었다. 군데군데 불꽃이 피어나는 걸 보니 내게 못 한 화풀이를 시들링에게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만둬! 당장 멈춰!”
시들링은 단순 무덤덤한 사람이었지만 무엇보다도 오랜 모험 생활이 몸에 밴 사람이었다. 걸어온 도발을 노련한 용병답게 넘어갈 법도 했으나 아예 잘됐다는 식으로 맞받아치기 시작했다. 시들링 역시 애쉬에게 쌓인 감정이 많은 듯 둘의 싸움이 극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정말 최악이었다. 우리 셋은 이제부터 험난한 101번째 테라리움을 함께 공략해야 하는 동료였다. 그런데 동료는커녕 지금 상황에선 원수 둘을 붙여 놓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베스탈리스들은 힘의 논리로 강한 자들이 영향력을 얻는다. 애쉬가 시들링에게 싸움을 거는 이유는 뻔했다. 화풀이도 있지만 본질적으론 서열 정리였다. 정말이지, 비이성적이고 단순무식한 행위였다.
둘을 말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난 내 안의 화를 가라앉히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내가 애쉬를 혐오하면 다시금 정화의 힘이 휘발되어 버린다. 눈앞의 애쉬를 다루는 것은 내가 앞으로 맞서야 할 거대한 시련의 겨우 일부에 불과했다. 내면을 다스려야만 했다. 내면을….
“저 망나니가!”
그게 쉬워야지.
우르릉, 말 그대로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쳤다. 이곳은 60번째 테라리움의 영역권. 가드닝 스킬을 사용할 수 있는 구역이기도 했다. 이곳에서 길드전을 벌이며 깨달은 나의 세 번째 가드닝 스킬은 지역의 날씨 및 기온 조정이었다.
생명이 자라나는 데 더없이 필요한 기후 조건,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은 결코 움트는 새 생명을 위한 힘이 아니었다.
정말 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는데.
하늘에서 내려친 천둥 번개가 애쉬와 시들링의 사이를 갈랐고 순간 시야가 새하얗게 변했다. 둘의 단순무식한 싸움에 나까지 옮은 것인지, 너무나 무모한 공격을 감행해 버리고 만 것이다.
땅에 그을음이 생긴 것 외에 큰 피해는 없었으나 적어도 둘의 싸움을 말리기엔 적절했다. 드라이어드를 투입시키는 방법도 있었는데 왜 하필 가드닝 스킬을 사용한 걸까. 그것도 이런 무의미한 싸움에.
“멈추라고 했지.”
“방금 무슨 힘을 사용한 거야?”
조금만 빗나갔으면 크게 다쳤을 수도 있는 공격을 받고도 애쉬는 태평해 보였다.
“너희 베스탈리스가 어떤 성향을 가지고 있는지는 나도 잘 알아. 힘이 강한 자가 큰 영향력을 가지잖아? 그것 때문에 네가 인페르노에서 유일무이한 왕 노릇을 하는 것도 알아. 하지만 어떤 곳에선 이런 방식을 쓰거든?”
난 공격을 피하기 위해 뒤로 물러나 한쪽 무릎을 꿇고 있는 시들링의 팔을 붙잡았다. 그리고 안간힘을 써서 일으켰다.
“절대 권력을 가진 왕이 있으면 그 옆의 배우자도 같은 권력을 갖는 거야. 너와 나 사이에서 힘의 우위는 누구에게 있는지 알고 있지? 넌 열기를 잠재우기 위해서라도 내게 복종해야 돼.”
“그래서?”
“그리고 얜 내 연인이야. 그러니 나와 동등한 권력을 갖는 거지. 이제 서열 정리 따위 필요 없겠지?”
말을 하고 나니 급격히 부끄러운 기분이 밀려들어 와 차마 시들링을 쳐다볼 수 없었다.
“알았으면… 제대로 행동해.”
애쉬는 전혀 이해한 표정이 아니었으나 더는 쓸데없는 소모전이 일어나진 않았다.
“내가 너의 배우자라는 건가?”
“연인이라고 다음 말에 언급했잖아.”
다만 시들링은 상당히 기분이 들뜬 듯한 목소리로 꽤나 집요하게 날 괴롭혔다.
“그래서 실력도 변변찮은 녀석을 동행시킨 건가? 잠시도 떨어지기 싫어서?”
비아냥대는 애쉬는 덤이었다. 무엇이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는지 시들링을 향한 목소리는 항상 날이 서 있었다.
“어휴, 그래. 죽고 못 사는 사이다. 됐어? 나이가 몇인데 유치하게.”
이 상황에선 최대한 내가 의연해질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