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명의 여성이 전합니다.
어떤 이들에게 가장 위대한 태양이라 칭송받는 당신에게, 그대의 한없이 타오르는 열기를 잠재울 수 있는 유일한 이가 기다리고 있다고 전해 드려요. 당신이 올 때까지 기다릴게요. 장소는 우리가 마지막으로 만났던 그곳에서. 날짜는….
대충 그런 식이었지만 모르는 이가 보기엔 누군가를 향한 고백처럼 보이기도 했다. 가장 위대한 불꽃은 인페르노에서 애쉬를 칭하는 말이었다. 더 노골적으로 쓰기엔 오히려 좋지 않은 상황이 우려되어 여럿의 도움을 받아 최대한 고백 편지처럼 보이게 썼다.
로웰라는 아직도 그날 적었던 글을 시들링을 향한 연애편지로 오해하고 있을 터였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신문 광고를 통해 사람을 찾던 방법을 응용한 건데, 애쉬가 알아보지 못한다면 소용이 없긴 했다. 결과는 소식지에 적어둔 장소, 우리가 마지막으로 만났던 장소인 60번째 테라리움으로 향하면 알게 될 것이다.
마차는 그대로 테라리움 안으로 보내고 애쉬를 기다릴 장소로 걸어서 움직였다. 괜히 마부가 사건에 휘말릴 것이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광고 효과가 없으면 어쩌나 했는데 도착한 장소에서 수상한 인기척들이 느껴지는 걸 보니 효과는 있었나 보다.
사람의 모습은 하나도 보이지 않지만 주변에 숨어 우리를 관찰하는 기척으로 보아 한둘이 아니었다.
“어그로를 잘못 끈 걸까?”
원하는 건 애쉬였지만 떡밥에 다른 물고기가 걸렸을 확률 역시 충분했다.
“그래서 가장 위대한 불꽃은 어디에 있는데?”
숨어 있는 자들을 슬쩍 떠보았다. 만약 그들이 인페르노라면 내가 한 말을 바로 알아들을 것이다. 이곳에 애쉬가 없어도 상관은 없었다. 인페르노라는 것이 확실해진다면 오히려 그들에게 애쉬를 불러오게 시킬 수 있으니까.
“이곳에 없다면 가서 전해. 그 녀석이라면 내가 누군지 알 거야. 들으면 신나서 꼬리를 흔들며 달려올걸?”
수장을 모욕하는 발언에 발끈한 것인지 지켜보는 기척들이 사나워졌다.
이쯤 되니 의심이 생겼다. 이 기척들을 우리가 알아볼 수 있도록 일부러 내뿜는 것인지, 아니면 실력이 낮아 전부 들키는 것인지. 후자라면 낭패였다. 조직원들 중에서도 상당히 지위가 낮은 하급들이 왔다는 뜻이니까.
그런 자들이 수장과 직접 마주할 확률은 꽤나 드물 것이다.
하지만 소식지에 정확한 장소를 기재한 것이 아닌, 애쉬만이 알아볼 장소를 작성했는데 정말 상관없는 자들이 낚여 온 것일까?
그 순간 엄청난 기척이 등 뒤 방향에서 느껴졌다. 그것은 빠른 속도로 이곳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등을 보인 사냥감에 달려드는 맹수처럼 무언가가 뛰어들었고, 찰나의 순간에 시들링이 검을 빼어 막아섰다.
내 아티팩트가 빛을 내며 속속들이 드라이어드들이 나타난 것도 거의 동시였다.
“기다렸잖아.”
살짝 맛이 간 붉은 눈, 우리가 기다리고 있던 애쉬였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만났던 그날, 그의 영혼을 정화시켜 열기를 죽여 놨었다. 그 덕인지 마주치면 강렬하게 느껴지는 화기가 많이 잠잠해져서 예전처럼 다가오는 이가 애쉬임을 단번에 알아차리지 못했다.
“물러서라.”
시들링이 애쉬를 향해 으르렁대며 말했다.
“왜 이렇게 늦은 거야? 네가 말하던 대로 얌전히 기다렸는데.”
하지만 애쉬는 그런 시들링을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 오히려 내게만 시선을 집중하고 있었다. 다른 이들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태도였다.
시들링의 든 검을 애쉬 역시 자신의 검을 꺼내 막고 있었는데 둘의 힘 차이가 비등하다는 사실이 상당히 놀라웠다. 시들링의 무력은 그간 모험에서 직접 경험해 봤기에 그가 얼마나 강한 지 잘 알고 있었다.
반면 애쉬가 무력을 사용하는 것을 본 건 파필리온을 두들겨 팰 때와 스텔라에게 검을 꽂을 때뿐이었는데, 그것만으론 그가 강한지 알 수 없었다. 그의 공격 수법은 주로 지상에 뜬 태양처럼 넘쳐나는 열기로 모든 것을 태워 버리는 것이었다.
따지고 보면 무력을 사용하는 물리 딜러보단 화염을 사용하는 마법사에 가깝다고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게임에서 보통 마법사는 근력이 약했고….
그런데 내가 만났던 드루이드 중 무력 원탑이라고 볼 수 있는 시들링과 비등하게 맞서는 걸 보면… 저놈은 마법도 강하고 근력도 강한 사기 캐릭이란 뜻이었다. 보통 마법이 강하면 근력 강화는 게을리하지 않나…? 꼴이 저래도 결국 인페르노의 수장이란 건가?
“그래, 사고는 안 친 것 같더라.”
경악을 넘어 새삼 부럽기도 했다. 드라이어드를 믿고 상대적으로 근력 수련을 덜 하는 내가 부끄러워질 정도로. 저놈은 불의 힘만 놓고 보면 세상 그 누구도 덤빌 수 없는 엄청난 힘을 가지고도 무력도 수련한 드루이드에게 지지 않을 정도로 강한데.
“그래서 상은?”
쾅! 큰 소리를 내며 시들링의 폼이 무너졌다.
검으로 치울 수 없으니 불의 힘까지 사용해 시들링을 공격한 애쉬가 성큼성큼 내게 걸어왔다.
“널 왜 불렀는지 궁금하지도 않은 거야?”
“상 주려고 부른 거 아니야?”
어찌 보면 초기 시들링과는 다른 느낌의 답답함이었다. 이런 놈을 계속 데리고 있어야 하다니….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렸다.
“난 널 좀 부려 먹으려고 불러낸 건데.”
내 말에 주변의 기운이 매우 흉흉하게 변했다. 실로 모욕적인 발언이긴 했다. 한 조직에서 신과 동급으로 여기는 수장을 하인처럼 대하는 태도이니 당장 공격이 쏟아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러지 않을 거란 걸 이미 알고 있기에 하는 행동이었다.
“얼마든지 네 곁에 두고 부려 먹어.”
일단 그 수장이 이런 반응을 보이니, 그 말에 절대 복종하는 이들이 뭐 어쩔 수나 있겠는가?
이름만 언급해도 파필리온이 덜덜 떨던 자였다. 처음 만났을 때도 두 눈이 마주하는 순간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느꼈었다. 그런 그를 지금은 막말을 퍼부을 수 있을 정도로 하찮게 느끼게 되다니.
“날 좀 만져 준다면 기분 좋게 넘어갈 수 있지.”
애쉬는 나와 접촉하는 것만으로도 자신을 괴롭히는 열기가 사라진다고 느꼈었다. 그는 오랫동안 자신의 육체와 영혼을 잠식하려는 불의 힘에 맞서 제어 효능이 있는 장신구를 주렁주렁 달고 다녔다. 내 손이 그의 머리에 닿았을 때, 그는 후련하다는 표정으로 제 목걸이를 뜯어냈다.
값비싸 보이던 보석이 흙바닥을 뒹굴든 말든, 그에겐 보석이 아니라 족쇄로 느껴졌을 것이다.
난 그의 손목에 달린 새까만 아티팩트를 바라봤다.
“정화의 힘은 아직 잘 작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얼마되지 않았고.”
그리고 그의 눈을 바라봤다. 무언가 취해 있거나 고통받는 사람은 눈가에 표시가 났다. 새빨개지거나 새까매지거나. 그의 눈가는 열에 달뜬 사람처럼 은은한 붉은 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설마 벌써?”
내 말에 기다렸다는 듯이 손을 뻗는 애쉬를 향해 시들링이 검을 내려쳤다. 팔이 동강 잘릴 수도 있는 가차 없는 공격이었지만 이를 애쉬는 가볍게 막아 냈다. 팔이 마치 건틀렛을 덧입히듯 불을 뿜어냈고 그 압력으로 인해 검의 궤도가 허공에서 가로막혔다.
그의 반사 신경으론 충분히 피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는 피하기보다는 그대로 맞서는, 다소 비효율적인 모습을 보였다.
“벌써 열기가 정화의 힘을 이겨 먹기 시작했다고?”
“그날 이후 며칠 동안은 참 행복했지. 날 불러내는 게 더 늦었다면 널 찾기 위해 테라리움 하나를 통째로 태웠을 거야.”
겨우 며칠이라고? 다른 베스탈리스들은 지금까지 멀쩡한데?
스텔라 역시 애쉬와 맞먹는 영혼 손상도를 가졌음에도 정화의 힘을 사용해 준 날부터 그녀가 테라리움을 떠나는 날까지 멀쩡해 보였었다.
왜 애쉬는 다른 걸까? 힘이 강해서? 불의 힘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여자가 아니라서? 아니면 아티팩트에 난쟁이를 고용하지 않아서?
“착하게 잘 참았네.”
다시금 주변의 분위기가 흉흉해진다. 하대하는 것이 어지간히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주변에 있는 녀석들은 돌아가라고 해. 하나도 남김없이. 자꾸 날 향해 살기를 내비치면 싸워 보자는 뜻으로 받아들이겠어.”
여긴 60번째 테라리움 근처였다. 행정 관리원으로서 세계수 가지의 효과를 최상으로 받을 수 있는 데다 여차하면 가드닝 스킬까지 구사 가능하니 두려울 건 없었다.
“쓸데없는 녀석들. 썩 꺼져. 이게 다치기라도 하면 어쩔 거야?”
“이게?”
도저히 사람 취급으로 여겨지지 않는 단어에 황당했으나 빠르게 주변의 인기척들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기에 참았다.
“그래, 서로가 서로를 사람으로 보지 말자는 거지? 그렇다면 쉽지.”
“혹시 네 잘린 신체도 동일한 효능을 가지고 있어?”
그 말에 분노로 인해 얼굴에 열이 확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