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29화 (529/604)

필라와 루프가 개발한 ‘시드레터(Seed letter)’라는 프로젝트는 우체국과 전화 기지국을 잘 섞은 느낌이었다.

대나무숲에서 모티브를 따왔듯 중계 역할을 할 소규모 군락지를 테라리움 마다 마련해 두고 민들레 드라이어드의 힘을 이용하여 중계 지점에 연락을 보내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군락지의 왕인 단델리온 급의 능력이 아니라면 보통의 민들레 드라이어드가 테라리움에서 다른 테라리움까지 능력을 펼치기엔 큰 무리가 있었다. 여기에 중개 지점마다 연금술로 만든 증폭기를 세워 보완을 할 수 있었다.

민들레 종이 서로 간에 유대감이 높고 공명이 잘된다는 특징이 증폭기와 아주 잘 맞았다. 증폭기는 팀의 드라이어드의 힘을 증폭시키는 특정 드라이어드들, 예를 들면 스코플루스의 라피도포라와 같은 드라이어드의 힘을 응용하여 연금술로 탄생된 기계였다.

“이걸 월렛에 착용해 보세요.”

보고서를 읽고 있는 내게 루프가 유심 칩처럼 생긴 작은 물건을 내게 건넸다. 벌집 역시 이런 칩을 이용해 폰에 심을 수 있었다. 이젠 이용할 수 없게 된 벌집을 제거하고 새로운 칩을 폰에 장착했다.

그러자 새로운 화면이 나타났다. 민들레의 새하얀 꽃씨가 가득한 화면 안에 타이핑 창이 마련되어 있었는데, 시험 삼아 메시지를 적어 보니 글자를 적는 족족 꽃씨로 변하는 것이 보였다.

그런데 꽃씨로 변하는 게 단순한 효과로만 보이진 않았다. 꽃씨엔 특정한 규칙이 있었는데 특정 글자마다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꽃씨 모양이 있고 배열과 방향, 꺾임 등이 달랐다.

비로소 컴퓨터가 정보를 이진법으로 처리하듯, 민들레들이 효과적으로 송수신을 하기 위해 문자 자체를 전달하는 것이 아닌 꽃씨의 패턴으로 정보 전달을 하는 방식임을 깨달았다.

“아직 테라리움에 정식으로 설치하지 않아서 이용은 하실 수 없지만, 어떤 방식인지 체험해 보실 수 있도록….”

“와… 정말 대단해. 이거라면 정말….”

문자를 주고받는 거나 다름없잖아?

벌을 통해 제한된 글자 수의 문자만 겨우 주고받을 수 있던 것과 달리, 시드레터는 장문 전송이 가능했다.

“연락의 송수신 속도는 민들레 드라이어드 수에 의해 결정될 거예요.”

하지만 이 또한 각 테라리움에 상용화가 되어야 널리 이용 가능했다. 당장은 내 테라리움만 가능했다.

테라리움 내에 민들레 드라이어드들을 위시한 시드레터 중계국을 세우고, 난 내가 보유 중인 민들레들의 힘을 이용해 중계국으로 문자를 보낸다. 중계국에서도 내게 연락을 보내면 바로 폰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다만 시드레터는 민들레 드라이어들의 능력이 중요한 만큼 민들레 드라이어드가 없다면 사용이 불가능했다.

상회에서 물자를 실어 보낼 타이밍까지 기다리지 않아도 되기에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고, 능력만을 이용해 송수신을 하니 도중 적에게 습격을 받을 위험도 없으므로 많은 장점이 있었다.

민들레 드라이어드를 소유 중이라면 나처럼 폰에 칩을 꽂아 벌을 대신한 연락책으로 사용할 수 있지만, 민들레가 없다면 중계국까지 직접 찾아가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다. 아니면 주변에 민들레를 소유한 드루이드에게 부탁을 하거나….

하지만 이 모든 걸 제쳐 두고라도 내겐 벌보다 훨씬 유용한 연락책임은 변치 않았다.

“이후에 민들레 드라이어드의 능력과 비슷한 다른 드라이어드를 찾게 된다면 시드레터를 확장할 수 있어요.”

“그렇게 된다면 범용성은 더욱 늘어나겠네요!”

난 정말로 시드레터가 벌만큼 대중화된다면, 훗날 노멀 등급 드라이어드에 대한 인식도 많이 바뀌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전투를 제외하고도 다방면에서 능력을 활용 가능하니 등급만으로 버리는 일이 줄어들지 않을까?

“어서 정식으로 중계국을 세우고 이용해 보고 싶어요.”

당장 내 3개의 테라리움에 시드레터 중계국을 세우기로 했다. 필라와 루프가 내게 보고하는 단계였기에 그들이 실험 삼아 만들었던 중계국이 28번째 테라리움엔 이미 존재했다.

26번째 테라리움 근처 민들레 군락지의 드라이어드들이 다수 채용되었다. 물론 그곳의 모든 아이들을 데려올 순 없었다. 하지만 굳이 군락지를 옮길 필요 없이 그곳을 또 하나의 기지국으로 삼는 방 안도 있었다.

증폭기를 세우며 이를 지킬 인원을 배치하니 자연스레 군락지의 안전도도 향상되었다. 단델리온 홀로 민들레 묘목 아이들을 지키고 있기 때문에, 그녀는 종종 그곳을 지나다니는 드루이드들에게 불을 퇴치하는 걸 부탁해 왔다.

하지만 기지국이 들어서게 된다면 더는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물론 최대한 군락지의 환경을 해치지 않는 쪽으로 설치가 이뤄졌다. 덕분에 민들레 묘목들이 더 넓은 공간을 안전히 마음 놓고 뛰어놀 수 있게 되었음을 전해 듣게 되었다.

“민들레 드라이어드는 열매 개화를 통해서도 빈번하게 볼 수 있으니, 필요한 수를 군락지에서 데려와 채우는 것보다 테라리움에서 자체적으로 채우는 방안이 좋을 것 같네요.”

물론 다른 테라리움에서 이 방법을 수용하는 한에서 가능한 사항이었다.

기지국이 정식으로 세워지고 시드레터를 보내 봤다. 문자나 이메일을 보낼 때처럼 하고 싶은 말을 걱정 없이 꽉꽉 채우니 속이 다 후련해질 지경이었다.

벌을 사용할 땐 몇 글자 보내고 기다리고, 또 몇 글자 보내고 기다리고….

“전화가 가장 편한데….”

음성 통화가 간절했지만 대나무숲 중계방송도 기본 세 시간의 텀이 있는 만큼 더 개발이 필요한 분야라 어쩔 수 없었다. 지금은 더 많은 내용을 한 번에 전달할 수 있음에 감사해야 했다.

“이제 보내면 되는 거야?”

“네! 한번 전송해 보세요.”

쓰고 싶은 말을 전부 타이핑하자 폰 화면이 꽃씨들로 가득 찼다. 전송 버튼을 누르자 거센 바람을 맞은 것처럼 꽃씨들이 일제히 화면 밖으로 훅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벌을 이용할 때도 윙윙거리는 날개 소리는 들리지만 실체를 볼 수 없듯, 꽃씨도 효과만 보일 뿐 실체가 없어 만질 순 없었다.

내가 보낸 메시지를 받은 것인지 기지국에서 대기 중인 민들레 드라이어들의 스태프가 빛이 나는 것이 보였다. 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모든 과정을 지켜봤다. 정말 전달이 될까?

민들레들은 넓은 판 위에 스태프를 흔들어 꽃씨를 떨어뜨렸고, 이 판이 어떠한 기계 안으로 들어가자 글자로 변환된 종이로 출력되는 것이 보였다. 민들레들이 일일이 내용을 해석하지 않고 자동화에 맡김으로써 수고를 덜어 주는 과정이었다.

“보내신 내용이 이게 맞는지 확인해 보세요.”

루프가 출력된 종이를 들고 달려오며 소리쳤다.

종이엔 시드레터를 개발한 필라와 루프에 대한 나의 감사 인사와 노고 치하가 가득 적혀 있었다. 내가 보낸 내용이 맞았다. 이 정도 분량이라면 서류를 통째로 옮기는 것도 가능했기에 지켜보고 있던 내 보좌관들이 작게 환호성을 지르기도 했다.

반대로 기지국에서 보낸 문서가 완전히 내 폰에 도착하는 것까지도 확인했다. 최고였다.

다음으로는 기지국에서 문서화된 통신들을 분류할 직원들을 따로 고용할 필요가 있을 듯했다.

일이 밀려들기가 무섭게 착착 해결된다. 유능한 인재들을 곁에 둔 효과를 매번 실감하고 있었다.

연금술이 만들어 낸 기적들을 볼 때마다 테라리움 내에 연금탑을 하나도 보유하지 못한 것이 안타까워 미칠 지경이었다.

16번째 테라리움은 과거의 사건으로 탑이 폐기되었고 28번째 테라리움은 인공 개량 드라이어드들의 터나 다름없어서 아직 연금탑을 들여올 수 없었다. 60번째 테라리움은 너무나 뒤 번대 테라리움이란 인식이 있어서 연구원들이 비선호하는 곳이다 보니 세우고 싶어도 세울 수 없었다.

물론 인식이야 차차 개선해 나가면 되지만 아무리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 놔도 테라리움에 붙은 번호가 가져오는 편견은 관습처럼 굳어져 쉽게 해소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제 떠나시는 거죠? 앞으로는 연락 문제 핑계로 더 잡아 둘 수도 없고, 저분들이 조금은 원망스럽네요.”

보좌관들이 장난스레 우는 소리를 내며 말했다. 연락 문제가 해결되었다곤 해도 행정 관리원이 직접 남아 업무를 보는 것과는 차이가 있었다.

“일하러 가야죠. 전 드루이드이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가장 우선시해야 할 업무가 있잖아요?”

“드루이드인 다른 행정관리원들은 그렇게까지 열심히 하는 것 같진 않던데.”

어지간히 아쉬운가 보다. 그나마 가장 큰 이벤트인 수확제를 잘 넘겨서 이젠 한숨 돌릴 일만 남았을 텐데도 목소리에 담긴 염려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이번엔 얼마나 밖에 나가 계시나요?”

“글쎄요. 난이도에 따라 다르겠지만….”

이번엔 고난이도 퀘스트가 동시에 걸려 있었다. 애쉬 컨트롤과 카수스 찾기.

따지고 보자면 내 모험엔 항상 쉬운 난이도가 드물긴 했지만.

“금방 돌아오진 못할 거예요.”

“…시드 레터 기지국 건설 관련해서 여러 테라리움들과 연락해 보겠습니다. 상업성이 있어서 기업들과도 이야기가 잘 통할 것 같아요.”

“항상 절 잘 보좌해 줘서 고마워요. 두 분 덕분에 마음 놓고 일하러 갈 수 있어요.”

디케와 에이레네가 살포시 웃으며 그제야 날 놓아주었다. 동시에 내 채비도 끝났다. 간만에 입는 전투복이 내게 새삼스러운 느낌을 준다. 겨우 한 달여의 시간 동안 평상복을 입고 다녔다고 몸이 익숙해지다니.

“제이 님, 시들링은 준비 다 끝났는데 아직 인가요?”

어쩐지 잔뜩 신난 칼미아의 재촉에 따라 나가니 간만에 갑옷을 풀 세팅한 시들링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도 둘만 보내기 걱정되는데.”

물론 길드원들도 배웅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다.

“무슨 소리예요! 둘이라서 완벽한 거라고요!”

이리스의 말에 칼미아가 화들짝 놀라 반박했다. 그제야 저 드라이어드의 신난 감정의 기저에 깔린 원인에 대해 알 수 있었다. 칼미아는 혹시라도 일행이 더 늘어날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너무나 속이 보이는 반응에 이리스와 제퍼가 잘 걸렸다는 식으로 칼미아를 향해 장난을 걸기 시작할 때쯤 우리를 데려다줄 마차가 준비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다녀올게요.”

그렇게 101번째 테라리움으로 떠나는 여정이 시작되었다.

이동하는 동안 휴식 시간을 극도로 줄였고 이 때문에 마부의 피로도를 휴식으로 채우는 것이 아닌, 중간 지점마다 마차를 교환하는 식으로 일정이 짜였다.

“애쉬와 접선은 어떻게 할 생각이지?”

“음….”

나와 애쉬의 연결 고리는 단 하나뿐이었다. 그에게 만들어 준 아티팩트. 하지만 아티팩트가 연락 역할을 하진 않는다.

나는 그를 아무 때나 찾을 수 없으나 반대로 그는 가능했다. 길드전으로 인해 내 정체를 들켰으니 항상 주시하고 있을 것이다. 더구나 그는 내게 간절히 원하는 게 있으니 더욱 눈을 떼지 못하겠지. 어쩌면 스텔라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수도.

“그가 날 찾아오게 해야지.”

난 에우노미아가 내게 건네준 정보를 떠올렸다. 그녀는 스텔라를 만나기 위해 어떤 고급 식당에서 계속 기다렸다고 말했었다. 스텔라가 친히 방명록을 남길 정도로 아끼는 식당이 있었고 그곳에서 결국 둘은 만나게 되었지.

신분이 들킬 위험을 무릅쓰고 스텔라가 자주 찾던 식당, 그 식당이 있는 테라리움 근방에 인페르노의 근거지가 있거나 그들의 주 활동 장소일 확률이 컸다.

그래서 출발하기 전 그 테라리움과 주변 테라리움의 소식지에 광고를 걸어 놨었다.

소식지에는 주민이나 외부인들이 직접 홍보를 위한 기고를 할 수도 있는데, 정식 소식지에 광고지처럼 끼워 발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보만 원하는 사람들은 해당 페이지를 받자마자 버리기도 했다. 중요한 건 다이아를 더 주면 익명으로도 걸 수 있다는 거였다.

어떤 문구든 상관없었다. 누군가를 향한 고백 편지가 실리는 것도 봤다. 신문이 고객을 늘려 더 많은 광고를 유치해 수입을 늘리는 것처럼 소식지도 같은 방식을 채택한 것이었다.

난 그곳에 인페르노와 애쉬가 알아볼 수 있는 글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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